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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저 그날 독후감 일곱 개 다 쓰고 잤어요!”
자리에 앉자마자, 예슬이가 말했다.
“일곱 개를 다? 정말 대단한데!”
내 말에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으로,
“그렇죠! 아마도 전 천재임에 틀림없는 것 같아요.”
“내가 봐도 그래. 예슬이는 천재임에 틀림없어! 참, 수진이 지난 주에 못 나온 게 혹시 방학숙제 때문?”
“그건, 아닌데…….”
 
지난주에는 수진이가 오지 않아, 지민이, 예슬이와 수업을 했었다. 아래층에 살고 있어, 할머니께서 직접 올라오셔서 수진이가 오늘은 뭘 하느라고 공부를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알려주신 터였다. 난 이유는 묻지도 않고 알겠노라고 대답을 드렸었다.
 
그리고 수업을 시작하려는데, 예슬이가 내일이 개학이라는 사실과 독후감 숙제를 오늘 내로 일곱 개나 해야 된다는 걸 알려주었다. 나는 그걸 어떻게 다 쓰냐며 함께 괴로운 표정을 지었는데, 다시 일주일이 지난 오늘 예슬이는 앉자마자 내가 걱정했을 거라고 생각해서인지 그 소식부터 꺼낸다.
 
예슬이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나도 어린 시절 방학숙제를 한 기억이 났다.
“너희들한테 개학 날 아침마다 숙제 하느라고 밥도 못 먹은 얘기 해줬어?”
아이들이 입을 모아 대답한다. “아~니요!”

 
“선생님은 방학숙제를 다 못해, 항상 개학 날 아침까지 숙제를 했어! 밥도 못 먹고, 아침 식사하는 가족들 옆에서 꼭 엉엉 울면서 말이야. 그런데 가족들은 나한테 밥 먹으라는 말은 한 마디도 않고 자기들끼리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실제로 부모님은 이런 나를 꾸짖지도 않으셨지만, 그렇다고 그만하고 와서 밥을 먹으라는 말씀도 한번 하신 적이 없다. 나는 밥을 못 먹는다는 사실이 너무 마음 아파 항상 울면서 숙제를 했더랬다.
 
“저도 자다가 새벽 4시에 일어나 7시까지 숙제하고 다시 조금 자고 했어요.”
수진이가 자기 고생한 이야기를 덧붙인다.

 
“그러면서 선생님은 항상 생각했지. 다음 번 방학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미리미리 숙제를 해, 이렇게 개학 날 밥을 못 먹는 일은 없어야겠다고. 그런데!”
“하하하, 다음에도 그랬죠!” 지민이가 내 말을 쑥 끊으며 끼어들었다.
“그래! 다음 번 개학 날에도 난 또 울면서 숙제를 하는 거야. 사실 숙제를 다 못해가도 선생님은 그걸 가지고 혼내지도 않는데!”

 
내 말을 받아 수진이가 이어서,
“맞아! 저도 항상 그래요! 그리고 우리 선생님도 숙제에는 관심도 없어요.”
예슬이도 거든다.
“맞아! 맞아! 검사도 안 하고 그냥 지나갈 때가 정말 많아요!”
“그렇지만, 그걸 알면서도 숙제를 안 하면 큰일날 것 같아, 꼭 하게 되요.”
둘의 말에 지민이도 맞장구를 친다.
“맞아! 맞아! 맞아!”
나도 아이들도,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했다.

 
“정말, 이건 경험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절~대 몰라요.”라며 수진이가 덧붙였는데, 그 속에는 어떤 연대감 같은 것이 담겨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이제 화제를 돌려 공부를 시작했다.
 
잠깐 동안이지만, 어느새 나도 그들처럼 초등 4학년 어린이가 된 듯 했다. 30년도 더 된 시절의, 기억 저편으로 물러나 있던 대수롭지도 않았던 기억이, 바로 눈앞으로 다가와 잡힐 듯 생생하다. 아이들을 통해 이렇듯 유년을 떠올리는 일이 즐겁다. 아이들이 아니었다면, 인생 속에서 한번이라도 다시 생각하지 못하고 지나쳤을 기억을 떠올릴 때가 참 많다. 그날 방학숙제와 관련된 기억도 그 중 하나다.
 
그러나 수진이의 마지막 말과 그 표정은 오랫동안 마음을 떠나지 않는다. ‘경험 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모른다’는 말을 그녀는 누구를 생각하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난 어른들을 향한 말처럼 생각되었다. 어린 시절이 없었던 듯 행동하는 어른들에게, 마치 유년을 거치지 않고 어른이 된 것처럼 말하는 어른들에게.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을 통해 그들이 자기와 같은 어린 시절을 거친 사람이라는 걸 상상하기는 힘들다.
 
어른들 모두 그 시절, 비슷한 기억들을 갖고 있지만, 그런 시절이 아예 없었던 듯 아이들 앞에서 행동할 때가 너무 많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되살려서 아이들의 입장이 된다면, 아이들에게 지금보다 좀더 행복한 시절을 안겨줄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일다▣ 정인진 
(교육일기에 등장하는 아이들의 이름은 가명입니다.)

[정인진의 교육일기] 동심을 일깨우는 아이들  2009/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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