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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짐을 싸야겠다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흘러가는 것 더하기 나 자신”


※ ‘길 위의 음악가’가 되어 새로운 장소와 사람들을 만나고 있는 싱어송라이터 이내의 기록 마지막 연재입니다. 노래여행에 함께해준 독자들에게 감사드립니다.  Feminist Journal ILDA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나에게 물었다

 

▶ 산티아고 순례길 ⓒ그림: 기묘나 작가(호랑이출판사)


세면도구는 언제나 여행용 주머니에 들어있다. 언제부터인가 샴푸, 린스, 화장품을 쓰지 않아서 단출하다. 당장에라도 길을 떠날 수 있는 상태로 지낸 지 오래되었다.

 

기타가 든 가방에는 제법 큰 주머니가 달려있다. 거기에는 ‘이내’ 1집 <지금 여기의 바람>, 2집 <두근두근 길 위의 노래> 앨범과 내가 쓴 단편들을 모은 손바닥소설책 <작은집>, 동네 친구들이 만든 독립출판물이 몇 권씩 들어있다. 어디서든 좌판을 열어 ‘이내책방’이라는 이름을 달아 둘 준비는 이 정도면 충분하다. 돌아다니는 것, 무엇보다 걷는 것을 좋아하지만 늘 짐이 많으니 요즘 들어 어깨가 자주 아파온다.

 

어깨가 아플 때면 2012년에 걸었던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생각이 난다. 당시 하루에 20-30킬로미터씩 걸으며 가장 많이 했던 생각은 ‘오늘은 무엇을 더 버릴까’ 하는 것이었다. 함께 걷던 한 친구는 후드 티셔츠의 모자와 소매를 잘라버리고는 한결 가벼워졌다고 말해서 모두를 웃게 만들었다.

 

길 위에 있기 위해서는 항상 버릴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길 위의 음악가’라는 이름으로 여기저기에서 노래를 부른 지 3년이 넘어가니, 버리지 못하고 쌓인 것들이 많아졌다. 관계도 늘고 일도 늘고 책임도 늘었으니 어깨가 아픈 것은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순례길 위에서 많이 했던 또 하나의 생각은 ‘나는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 하는 것이었다. 그 전까지는 ‘어떻게’ 살 것인지를 주로 생각하느라 ‘무엇’에 대한 생각은 별로 하지 않았다. 여행 자금을 조금이라도 모아보자는 아이디어로 가내수공업 음반을 만들어 팔 때만 해도, 그것은 그저 재미있는 놀이에 지나지 않았다. 핸드폰에 저장해 온 내 노래들을 들려주기 위해 산티아고에서 만난 사람들에게 이어폰을 건넬 때, 그것은 낯선 사람들과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도구였다. 그런데 예상하지 못했던 ‘넌 음악가구나’ 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공항에서 입국신고서 직업란에 한 번도 시원한 대답을 쓴 적이 없었던 나였다. 음악가라고? 과연 나를 그렇게 불러도 괜찮은 것일까. 노래를 몇 곡 만들어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시디에 모아서 재미삼아 팔았을 뿐이었다. 친구네 가게 1주년 파티에 가서 축하노래를 수줍게 부르고 돌아오거나, 집들이에 가서 선물 대신 노래를 불렀던 것도 이전에 해 본 적 없는 새로운 놀이였다.

 

나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내 노래를 들었을 때, 그들이 나를 ‘노래하는 사람’으로 인식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를 가장 오래 봐온 내가 나를 그렇게 받아들이는 데에는 제법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그 길 위에서 결심 같은 것을 했던 것도 같다. 뭔가 음악가가 되어보는 노력을 한번 해 보자, 라고.

 

과거도 미래도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그때, 그때의 생각을 담은 노래를 만들었고, 나를 불러주는 곳이 생기면 가서 떨면서 노래했다. 후원을 받아서 앨범을 만들었고 앨범이 생기자 공연을 하며 그걸 팔 수 있었다. 신기하게도 생계가 유지되었다. 자주 가서 공연을 하는 장소들이 전국에 늘어가는 사이 앨범은 두 장이 되었고, 지금은 세 번째 앨범을 만들고 있다. 스스로를 음악가라고 부르기 위한 노력을 천천히 이어온 기분이다. 그 방점은 결코 ‘음악가’에 있지 못하고, 다만 ‘천천히’에 머문다.

 

되고 싶은 노래, 되고 싶은 나 자신

 

나는 지금 경상남도 진주의 헌책방 <소소책방>에서 며칠 간 책방지기를 하고 있다. 가끔 대표님이 자리를 비울 때 알바 제안을 해오면 소풍삼아 진주에 온다. 단풍놀이 시즌이라 손님이 없을 거라고 일러주신 것처럼 책방은 조용하다. 니나 시몬의 음악을 선곡해 틀어 두고 조용히 앉았지만, 생각은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느라 시끄럽다. 그 생각들을 붙잡아서 3집 앨범 <되고 싶은 노래>의 녹음 계획에 집중해 본다. 이상하게도 녹음할 때가 되면 전에 없던 감기 증상이 나타난다. 부담을 느끼고 있기 때문일 거다. 조용한 책방에서 노래를 몇 곡 불러 보았다.

 

▶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그림: 기묘나 작가(호랑이출판사)

 

눈앞의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글쓰기가 자신에게 구원이었다고 고백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보면 나에게 한 가지 굉장히 유용했던 습관이 있었다. 늘 종이와 연필을 가지고 다니면서 떠오르는 생각들이나 책에서 발견한 글귀들을 써 둔 것이다.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메모들을 가끔 꺼내 읽어보면, 새로울 것 없는 반복되는 패턴이 보인다. 불안과 두려움을 잔뜩 안고 ‘모르겠다!’를 외친다. 후회와 반성이 이어지고 그런 스스로를 다독여 데리고 가려는 애씀이 따라온다. 그리고 그 글들은 때때로 노래가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내가 종이와 연필이 있어야만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이라는 것을 잊고 지냈다. <소소책방>에 앉아서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책등을 보고 있자니, 다시 종이와 연필을 붙잡고 싶어진다. 글을 써내려가는 습관이 사라진 시점과 노래가 잘 만들어지지 않게 된 시점이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 종이와 연필을 다시 짐 가방에 챙겨 넣어야겠다. 크게 무게를 더하지도 않는 물건들이다.

 

“똑같은 선택, 똑같은 불안, 똑같은 실수, 그런데도 내가 여기 당신 앞에 있다는 것의 경이로움. 결국 흘러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가는 것을 놓치지 않으려는) 조심성이 아니라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려는 자세일지도 모른다. 그럴 때 우리 삶은 단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흘러가는 것 더하기 나 자신’이 될 수 있을지 모른다. (…) 흘러가는 모든 것들은 아직도 우리가 경험하고 알고 해석해야 할 세계와 감정이 얼마나 많은지를 말해주는 형식으로 존재하는지도 모른다.” -정혜윤 <그들은 한 권의 책에서 시작되었다> 중에서

 

또 다른 책 한 권을 펼치니 위로가 되는 구절이 튀어나왔다. 설명할 수 없는 우연들을 따라 여기까지 흘러온 셈이다. 3일간의 책방 알바가 끝나고 나면, 어느 지역복지관에서 열리는 작은 북 콘서트와 숲속에서 열리는 작은 축제 공연에 참여하러 또 길을 나선다. ‘작은’이라는 수식을 붙일 수 있는 곳에서는 아직 다다르지 못한 나의 ‘되고 싶은 노래’들도 제법 어울리는 것 같다.

 

가볍게, 최대한 가볍게 다시 짐을 싸야겠다. 흘러가는 삶의 길 위에서 가만히 계속해서 무언가를 써 내려가다 보면 언젠가는 ‘되고 싶은 나 자신’에 가까워져 있을지도 모른다. (끝)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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