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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 위기’ 현실과 ‘남성성 위기’ 신화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 영화 「화장」의 남자들①


※ <이미지 페미니즘>의 저자 김영옥(생애문화연구소 옥희살롱 대표)님이 “오지 않은 미래의 발견”이라는 화두로 기사를 연재합니다.  Feminist Journal ILDA 


임권택 감독의 <화장>은 2004년 이상 문학상을 받은 김훈의 단편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죽음을 앞둔 아내 곁에서 생의 한가운데 있는 젊은 여성을 사랑하는 중년 남성의 이야기다.

 

“아, 살아 있는 것은 저렇게 확실하고 가득 찬 것이로구나.”

 

젊은 여성을 향한 그의 이 감탄은 그의 사랑이 어디에서 시작하고 있는지 징후적으로 드러낸다. 바람 빠진 공처럼 삶이 헐거워지고 여기저기 뿌옇게 곰팡이가 슬기 시작한다고 느끼는 나이. 그의 사랑은 이 나이의 후유증이거나 아니라면 적어도 이 나이의 효과다. 이 나이는 화장(化粧)과 화장(火葬)이 서로 겨루고 서로 의미가 되어주는 경계 지대다.

 

관객이 외면한, ‘늙어가는 남자’의 사랑‘타령’

 

▶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은 2004년 이상 문학상을 받은 김훈의 단편을 영화로 만든 것이다. 


영화에서 50대 중반의 이 주인공 남성은 배우 안성기가 연기했다. 영화 <화장>은 이미 구상 단계에서부터 임권택, 김훈, 안성기 이 세 명의 남성들 이름과 단단히 묶여 있었다. 여기에 명필름이라는 제작사까지 덧붙여지고 나니, 더 이상의 품질보장은 없는 듯 소란스러웠다. 이러한 소란스러움은 나중에 완성된 영화 앞에서 당혹을 금치 못했던 관객들의 난처한 침묵과 쌍을 이루며, 이 영화의 독특한 젠더 성격을 여실히 드러낸다. 영화는 제작 과정에서의 소란스러움과는 달리 너무나 적은 관객 수를 기록했다. 영화진흥위원회의 통합전산망 자료에 따르면 <화장>을 본 사람은 14만2천382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영화는 묘하게도 ‘다양성’ 영화로 분류되었다. 이 영화가 왜 다양성 영화인지, 다양성 영화의 정의는 무엇인지, 질문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다양성 영화는 통상 작품성, 예술성이 뛰어난 소규모 저예산 영화로서 상업영화와 대비되는 의미로 사용되며, 독립영화나 예술영화, 또는 다큐멘터리 영화를 포함한다.

 

<화장>이 소규모 저예산 영화로 ‘기획’되었을까. 상업영화와의 대비 속에서 정체성을 주장할만한 주제나 표현 방식 등 뭔가 특별한 실험적 요소를 품고 있는가. 유감스럽게도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이상 문학상을 받은 소설을 토대로 한 것이기 때문에, 국내외에서 ‘인정받고 존경받는’ ‘거장’ 감독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그러니 당연히 예술영화라서?

 

천만 관객이라는 어마어마한 흥행을 누린 <암살>이나 <국제시장>, 그리고 <베테랑>이 한국의 근현대사나 민족/주의, 자본주의, 젠더 등과 관련해 치밀한 분석의 대상이라면, 철저하게 흥행에 실패해 다양성 영화 범주로 피신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화장> 역시 분석의 대상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 분석의 초점을 ‘늙어가는 남자들’의 사랑‘타령’을 경유해 궁극적으로 ‘돌보는 남자들’에 맞추려 한다. 시대의 환경 상 어쩔 수 없이 돌봄을 하게 된 남자들의 미성숙, 사랑의 알리바이로 도망치면서 돌봄의 윤리를 훼손시키는 저 ‘삶에 철들지 않는’ 남자들의 미성숙에 말이다. 이 미성숙이야말로 영화 <화장>이 그토록 요란했던 소문과는 달리 관객들의 외면을 면치 못했던 까닭이기 때문이다.

 

‘돌보는’ 남자들?

 

아내가 죽은 날부터 장례를 치르는 날까지 삼일 동안 주인공의 머릿속과 마음속을 맴돈 사념들이 <화장> 텍스트의 내용을 이룬다. (그러나 이 내용은 활자 텍스트보다 이미지 텍스트에서 훨씬 더 자극적이고 명백한 남성의 욕망/판타지로 전개된다.) 화장품 회사 상무인 주인공 남자는 2년 동안 세 번 수술을 받은 뇌종양 환자 아내의 ‘병수발에 지쳐있고’, 의사가 ‘병이라고 할 수도 없는 노화현상’이라고 말하는 전립선염 때문에 가끔 방광 속의 오줌을 빼러 비뇨기과에 들러야 한다. 아내에게서 아무런 끌림도 느끼지 않은지 오래된 그는 회사에 들어온 신입사원 추은주에게 온전히 마음을 빼앗기고 있다.

 

▶ <화장>에서 ‘아내 병수발에 지쳐 있다’는 것은 중년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알리바이로 동원된다.

 

‘병수발에 지쳐 있고’라는 말을 작은따옴표로 묶으면서 나는 단편소설이나 영화 모두에서 느낀 언짢음을 표현하고자 한다. “여성들이 흔히 경험하는바, 익숙하게 들리므로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뭔가 불쾌하고 분한 감정이 드는 말을 들으면 이에 대해 당황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는 자신을 스스로 탓하게 된다”는, 정희진이 <여성혐오가 어쨌다구?>(2015)에서 쓴 말 그대로다. 중년(혹은 예전의 관습적인 사회적 연령 지각대로라면 장년?) 남성의 흔들리는 남성성, 그렇기 때문에 거의 목숨을 건듯 ‘젊고 아름다운’ 여자를 욕망하는 태도는 너무나 흔하고 익숙한 주제라서 왠지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은데, 이 흔한 서사에 ‘병수발에 지친’이라는 알리바이까지 덧대니 불쾌감과 언짢음이 배가 되고 말았다.

 

도대체 병수발처럼 자연스럽게 여성과 연결되는 단어가 또 있을까? 집안에 노/약자나 환자가 있을 때 여자들은 자발적으로 또는 강제 하에 돌봐왔고, 집밖에 즉 사회에 약자나 환자가 있을 때 여자들은 ‘봉사’의 이름으로 혹은 아주 적은 보수를 받고 ‘천사’의 이름으로 돌봐왔다. 그런데 고령화가 심해지면서 어쩔 수 없이 돌보는 남성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물론 <화장>의 맥락은 고령화와 무관하다(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돌보는 남자’가 나름 의미 있게 등장하는 맥락은 역시 전 세계적 추세인 초/고령 사회다.

 

예를 들어 헌신적으로 반신불수가 된 아내를 돌보는 남편이 나오는 영화 <아무르>(미카엘 하네케 감독, 2012)를 떠올려보자. 핵가족화와 (쟁취된 혹은 떠넘겨진) 개인주의로 자식들의 돌봄을 기대할 수 없게 된 노년의 부부는 이제 서로 돌봐야 한다. 물론 <아무르>의 부부는 깊숙이 나이가 들도록 평생 서로 이해하고 존경하고 사랑한 사이다. 더구나 그들은 음악을 매개로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병든 아내를 돌보는 남편의 등장이라는 면에서 <아무르>와 <화장>은 비교 가능한 연상 관계에 있다.

 

더 이상 ‘자기’로 생각하고 움직이는 것이 가능하지 않은 병든 아내를 돌보는 게 힘들거나 싫어서가 아니라 아내를 존중하기에, 아내가 제 정신이라면 진정 원했을 ‘끝’을 감행하는 <아무르>의 남편과, 아내와 그저 관습적 관계로만 엮여 있기에 아내가 진정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알고 싶어 하지도 않는 <화장>의 ‘병수발에 지친’ 남편은 어쩌면 비교해서는 안 될 두 주인공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움직이지 못하게 된 아내를 돌보는 두 남자의 태도가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유감스럽게도 비교와 연상은 더욱 떨치기 어렵다.

 

▶ 반신불수 아내를 돌보는 남편이 나오는 영화 <아무르>(미카엘 하네케, 2012)는 <화장>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그렇게 두 영화는 ‘병수발에 지친’이라는 형용어구가 젠더 정치학과 얼마나 깊숙이 연결되어 있는지, 젠더 정치학이 윤리학을 얼마나 철저하게 조직하는지 살필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된다. <화장>에서 ‘병수발에 지쳐 있고’는 주인공 남성의 성적 판타지에 알리바이로 동원되고 있다. <화장>이 ‘다양성’ 영화가 된 연유, 즉 제작과정에서의 그 소란스러움에 비해 너무나 조용했던 상영 후의 반응 등을 볼 때 저 언짢음은 나만 아니라 다른 관객들도, ‘거장을 흠모하는 후배들’도 공유하는 지각이었으리라, 추측해본다.

 

오늘날까지 역사가 이어져오는 동안 그렇게 한결 같이 여자들은 노/약자와 환자들을 돌봐왔고, 아내들은 남편들을 돌봐왔다. 그리고/그런데 그 여자들이 ‘병수발에 지쳐서’ 이런 저런 정신적, 실존적 상태가 되었다고 긴 넋두리를 펼치는 글이나 영상물을 나는 본 적이 없다. 더군다나 뇌종양으로 2년 동안 세 번이나 수술을 받은 ‘남편’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고통의 극한을 경험하고 있는데, 그 남편을 돌보는 ‘아내’가 회사에 갓 입사한 젊은 신입사원에게 마음을 모조리 빼앗겨, 낮이고 밤이고 그 남자만을 생각하고 욕망하는 이야기라면?

 

이렇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성을 바꿔 대입해 보는 것은 별로 권장할만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화장> 같은 이야기가 ‘수상작’으로(소설의 경우), ‘어려운 주제를 다루는 거장다운 솜씨’로(영화의 경우) 수식되며 유통되는 와중에 실종되는 돌봄의 윤리를 고려한다면, 이런 대입에는 기계적이라는 말로 비난받을 수 없는 정당성 혹은 필연성이 있다. 자신의 욕망을 위해 ‘병수발에 지친 피로감’이라는 두툼한 매트를 당당하게 사용한 ‘아내’가 있던가. 기억나지 않는다.

 

더군다나 그러한 욕망의 이야기를 나이 든 사람이기에 깨닫고 도달할 수 있는 생과 사의 어떤 비의적 진실로 당당하게 내세우는 ‘여성들’의 문화 집단을 마주한 적도 없다, 아직까지는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여성들에게는 이토록 낯설고 기이한 일이 남성들에게는 여전히 매우 자연스럽고 또한 존재론적으로 중요한 일이 될 수 있다니 가부장제 내부·외부에서 남성/성과 문화, 그리고 젠더권력 간에 맺어지는 연결고리는 아직 너무나 견고한 것인가.

 

중년 혹은 장년 남자의 정체성 위기와 그 탈출로서의 욕망 서사는 매번 신선한 ‘존재의 열림’으로 과대 포장된다. 사실 ‘나이 든’ 남자와 ‘어린’ 여자의 사랑 이야기는 너무나 흔해서 구태여 특별히 언급할 필요도 없다. 상대는 대부분 이십대 초중반 여자지만 로리타 콤플렉스에서처럼 십대 초반 여자인 경우도 드물지 않다. 위협받지만 그러나 건재한 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에게 그리고 외부에게 확인시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욕망하는 남자의 경우 연령의 한계란 없다. 오십대, 육십대, 칠십대, 팔십대, 그리고 구십대까지 이어진다. 노벨상 수상작가인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서 남자 주인공은 90세, 그가 욕망하고 사랑하는 상대여자는 십대 초반이다.

 

▶ 임권택 감독의 영화 <화장>에서. 화장품회사 중역 오성무와 젊은 직원 추은주.

 

욕망하는 ‘나이 든’ 남자들

 

이런 유의 스토리에서 남자들은 주로 ‘아는 – 혹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안다고 가정되는 – 주체들’이다. 직업으로 보자면 교수, 교사, 문화예술 분야의 전문가 등이 가장 많다. 영화 <엘레지>(이자벨 코이젯트 감독, 2008)에서 욕망에 흠뻑 빠져드는 남자주인공은 62세의 대학교수이고 그의 상대는 언제나 그랬듯이 이번에도 ‘그의 강의실’에 앉아있던 여학생이다. 그는 문화예술에 대해서, 장르를 불문하고, 대중매체에 나가 ‘한 말씀’ 하시곤 하는 전문가다. 문화 전문가인 그의 말에 실린 권위는 곧바로 욕망의 보증수표로 기능한다. 쿠바 출신 어린 여학생은 완벽한 몸매, 특히 지상에 없을 것 같은 완벽한 가슴의 소유자이고, 그런 그녀에게 그는 “너는 예술작품이야”라고 말한다.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모른 채 이 영화를 봤던 나는 우연히 제목에 끌려 손에 쥐게 된 필립 로스의 소설 <죽어가는 짐승>(필립 로스 저)의 첫 문장들에서 바로 <엘레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의 전형성은 그만큼 흔들림이 없다. “그 아이는 팔 년 전에 알았지. 내 수업을 들었어.” 더 긴 설명이 필요할까. “내가 가르치는 반에는 여학생이 많이 와.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이것이 문학적 광채와 저널리즘의 광채를 매혹적으로 결합한 과목이라는 것 때문이고, 또 하나는 내가 NPR(National Public Radio)에서 서평을 하는 것을 들었거나 서틴(뉴저지의 TV 방송국)에서 문화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야.”

 

소설 첫 페이지의 이 첫 문장들을 읽는 순간 피로감이 엄습했다. 뭐야, 또 그 얘기야? 라디오나 텔레비전의 정기적 출연이 ‘광채’로 연결되는 것도 난감하지만, ‘문학적 광채와 저널리즘의 광채를 매혹적으로 결합한 과목’에서 자연스럽게 과목이 그 과목을 진행하는 남자로 미끄러지면서 치환되는 것은 더욱 난감하다. 이렇게 해서 광채와 매혹을 지닌 남자교수의 욕망 이야기는 정해진 제 길을 간다.

 

▶ 영화 <엘레지>(이자벨 코이젯트, 2008) 남자주인공은 62세 대학교수, 상대는 그의 강의실에 앉아있던 여학생이다. 

 

마르케스의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에서는 신문에 칼럼을 쓰는 90살 남자가, 박범신의 <은교>에서는 시를 쓰는 70살 남자가 등장한다. 언어와 문화를 아는 사람답게 이들은 자신의 욕망에 대해 할 이야기가 많다. 그 욕망을 어떤 시대정신에, 어떤 문화흐름에 연결시켜야 하는지도 잘 안다. 마르케스나 로스처럼 (각각 콜롬비아와 미국의) 문화혁명의 정치적 성격과 파장, 그리고 그 한 가운데서 소용돌이치는 성적 욕망과 해방적 실천을 뛰어난 통찰력과 문장으로 보여준다 해도 궁극적으로 이런 이야기들은 이기적이다.

 

늙고 소멸해가는 육체와, 시간이 멈춘 곳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젊음 사이에서 진동하는 그들 욕망의 추는 그 빛에 눈이 멀어버렸을 때조차도 자기주장을 멈추지 않는다. 빛나는 육체의 소유자가 성매매여성이든 여학생이든 그들에게 무슨 상관이랴. 남성/성의 자기 이해일 뿐인데, 여성/성에 대한 혹은 인간 일반에 대한 이해이기도 하다고 주장하는 이 이기적 주장은 그래도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구성적 성격을 드러내고 또한 소멸 혹은 필멸과 대면하는 인간 종의 젠더화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에 일정 부분 학습과 성찰의 단초들을 품고 있기도 하다.

 

때론 유머로 때론 자조나 풍자로 때론 그저 바라만 보는 것으로(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때론 거칠고 격렬한 ‘씹하기’로(죽어가는 짐승) 드러나는 이들의 욕망을 두고 어떤 드러냄이 더 정직한가, 더 ‘문화적’인가 질문해보기도 하지만 대부분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들의 ‘앎’은 ‘여성/성을 안다고 참칭하는 남성 주체들’의 앎이고 그들이 소개하는 다른 분야의 앎의 내용들도 궁극적으로 저 원초적 앎으로 되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피로감을 넘어서 특히 언짢고 특히 불쾌한 경우가 있다. 소심한 알리바이와, 인권이나 생명권을 침해하는 무지가 노골적인 <화장>의 경우처럼 말이다. <화장>에서도 주인공의 ‘안다고 가정된 주체’다. 그 앎의 내용이 참으로 수긍하기 힘든 여성비하 내지는 혐오의 행태들로 범벅이 되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 텍스트의 남자 주인공, 즉 여자들의 ‘표면적 정체성’ 즉 ‘피부’를 경유해 ‘내부의 정체성’ 즉 성기 안까지 완벽히 안다고 주장되는 화장품 회사 임원은 늙어가는/늙은 남자의 젊은 여자 육체 탐닉의 서사 전통에 서 있지만, 그러나 정신문화 차원에서는 가장 참아주기 힘든 억지 타령으로 전락하고 있다. 어쩌면 이 전락은 더 이상 이런 서사가 유지되기 힘듦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테리다의 해체주의 어법으로 말하자면, 텍스트의 자기 해체일지도 모른다. (※ 다음 회에서 이어집니다.) (김영옥)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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