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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의 삶이 예술이 되는 시간

<노년여성의 경험을 잇다> 더불어樂 ‘청춘자서전학교’



※ 노년여성들이 살아온 생의 이야기와 다양한 경험이 역사 속에 그냥 묻히지 않고 사회와 소통하며 다음 세대와 교류할 수 있도록, 노년여성을 만나 인터뷰해 온 여성들의 기록을 연재합니다. 이 기획은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기억과 예술의 만남, ‘청춘자서전학교’의 시작

 

이직을 한지 한 달 정도 되었을 무렵이다. 광주문화재단에서 진행하고 있는 ‘창의예술학교’ 공모사업에 참여하기 위한 컨소시엄 모임에 참여하라는 업무 지시가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일이라, 깊이 생각하지 못한 채 회의에 참석한 탓에 멍한 머릿속이 쉽게 채워지지 않았다. 그래도 막연히 어르신들과 한번쯤은 꼭 해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아이템들을 조심스레 꺼내 놓았다.

 

내가 일하고 있는 광산구 더불어樂 노인복지관에서는 예전에 광주비엔날레에 어르신들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출품해 전시회를 연 적이 있다. 그 이야기를 듣고 큰 감동을 받았었다. 전시회에서는 첫아이의 배냇저고리, 평생을 사용했던 재봉틀, 남편의 첫 월급봉투 등 할머니들의 삶에서 가장 소중한 물건이 출품되어 추억의 이야기를 전했다.

 

▶ 노인들의 삶을 문화예술을 매개로 표현하여 자서전을 만드는 <청춘자서전학교>  ⓒ더불어樂 노인복지관

 

이 사례를 접하며 난 노인들의 삶, 그 자체가 예술이고 역사라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늘 가슴 한 켠에 어떠한 방법으로든 이분들의 삶을 세상과 잇고, 젊은 세대와 잇는 통로를 만들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해왔다. 그래서 이번 기회에 어르신들이 자신의 소중한 물건을 보고 거기에서 떠오르는 기억을 글로 옮겨본다든지 그림, 사진, 음악으로 표현한다든지 문화예술과 접목해보는 것이 어떨까라는 의견을 제안했다.

그 순간, 반대편에서 나와 비슷한 표정으로 열심히 무언가 골몰하고 있는 선생님 두 분을 보았다. 왠지 동질감이 생겼다. 두 분은 문화기획사를 만들어 지역에서 문화예술 사업을 하고 있는 30대의 여성디렉터들이었다. 주로 아이들 대상으로 마을과 연계한 문화예술 활동을 펴왔는데, 최근 시골에서 어르신들을 대상으로 ‘자서전 쓰기’ 프로그램을 진행했다고 한다. 저 두 분이라면 내가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들을 함께 실현할 수 있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은 더불어樂 노인복지관에 들러서 우리가 하는 사업과 문화를 보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회의가 끝나자 곧장 우리 복지관에 와서 아이템들을 찾기 시작했다. 그런 그녀들을 보니 처음 이 사업을 마주했을 때의 막막함은 점점 사라지고 기대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한 팀이 되어, 어르신들의 삶을 문화예술을 매개로 표현하여 1인 1자서전을 만드는 ‘청춘자서전학교’를 만들어 보기로 했다!

 

그림으로 노래로 사진으로 표현한 내 인생


▶ 기억을 더듬어 자신의 역사를 찾아가다. ⓒ더불어樂 노인복지관


청춘자서전학교의 첫 번째 만남은 ‘나의 살던 고향은…’이라는 주제로 흑미, 수수, 콩 등 곡물과 알록달록한 색모래로 캔버스 위에 그림을 그리는 것이었다.


참여자들은 처음에는 캔버스 위에 연필로 선 긋는 것조차 조심스러워 하셨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지나자 “그때 그랬었지. 우리 집 앞에 물가가 있어서 여름이면 친구들이랑 물고기를 잡으러 다녔지”, “맞어! 우리 집 앞마당에 작은 우물이 있었어”, “어릴 적 동네에 큰 아름드리 나무가 있었는데 그곳에 다 같이 모여 공부를 했었지”, “전쟁 때문에 불에 타버렸던 초가지붕과 울타리, 집 위의 감나무에 주렁주렁 매달린 탐스러운 감들”, 그리고 담벼락 옆에 피어있던 해바라기…

 

세월의 무게와 흔적을 버리고 마치 그 시절 어린아이가 된 것처럼 천진난만한 모습을 잊을 수가 없다. 이렇게 잊고 있던 기억을 더듬어 보는 것은 내 역사를 찾는 첫 단추가 되었다.

 

두 번째는 ‘멜로디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자신의 삶에서 기억에 남는 일을 라디오 사연으로 적고 그 사연에 맞는 음악을 신청하면, 마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것처럼 글과 노래를 들려드리는 시간을 가졌다. 토독 토독 내리는 빗소리와 어우러져 분위기는 이미 그때 그 시절 음악다방!!

 

비가 오니 첫사랑이 생각난다는 분, 어린 시절 가창시간에 너무 긴장하는 바람에 제대로 노래를 못해서 속상했던 기억, 할머니와의 추억을 떠올리며 할머니의 주름지고 고소한 숭늉 맛이 생각나는 노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자식을 위해 고생하시다 여생을 마치신 어머니가 생각나는 곡, 친구들과 소풍 갔다가 해가 뉘엿뉘엿 서산에 걸려 있을 때 삼삼오오 손을 잡고 돌아오며 불렀던 노래 등. 모든 노래에는 긴 삶의 희로애락이 묻어났다. 그때 그 시절 이야기가 더욱 궁금해졌다.

 

세 번째는 ‘일상의 기억’이라는 주제로 자신이 살아가는 모습을 일회용카메라로 찍어보고, 그중 의미 있는 사진을 선택해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사실 사진으로 내면을 표현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어르신들은 예술가였다.

 

한 분은 집에 가는 길 재활용 분리수거함 앞에 쓸 만한 의자가 버려져 있는 모습을 보고 “아직 썽썽하고만 저렇게 버려져 있는 모습을 보니 마음이 좋지 않아 한번 찍어 봤어요. 꼭 내 모습 같기도 하고… 아직 썽썽한대…” 라며 덤덤하게 이야기하셨다. 순간 여기저기서 “아~” 하며 탄성이 나왔다. 사진 속 버려진 의자는 세상이 노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노인이 된 스스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함께 담겨져 있는 것 같았다.

 

▶ 캘리그라피(Calligraphy, 손으로 그린 문자) 수업  ⓒ더불어樂 노인복지관

 

네 번째는 캘리그라피(Calligraphy; 손으로 그린 문자) 수업이었다. 자신의 이름과 자기 삶을 대표할 수 있는 한 문장을 캘리그라피로 적어보았는데, 처음 해보는 것임에도 금세 집중해서 한자 한자 적어나가는 모습에 진지함이 묻어났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자서전 제목이 되었다.

 

‘바퀴자국’, ‘꽃은 울지 않았다’, ‘어머님의 딸입니다’, ‘진흙 속에 핀 연꽃 한 송이.’

 

한국의 근현대사, 암울한 시대를 살아오면서도 자신만의 삶을 개척하고 한 사람으로, 여성으로, 그리고 어머니로 살아온 삶이 그대로 나타난 제목들이다.

 

‘구슬은 빠져나가고 빈손만 남은 줄 알았는데…’

 

자, 이제 드디어 자서전을 발간하는 날이 왔다! 

 

그 동안 어르신들은 밤잠을 설치며 원고를 보고 또 보고, 고치고 또 고치고를 반복해왔다. 도대체 그런 초인적인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오는지, 자서전에 대한 애정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청춘자서전학교의 마지막 출판기념회, 열네 번의 만남 속에서 함께 했던 시간들이 추억으로 되살아나 내내 가슴이 먹먹했다. 특히, 할머니들이 두 손에 자서전을 품고 떨리는 목소리로 이 자서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말씀하실 때는 그 깊고 감동스러운 마음이 전해져 출판기념회장이 눈물바다가 되었다.

 

▶ 자서전을 품에 안고 이 자서전이 갖는 의미에 대해 말씀하시는 참가자 분. ⓒ더불어樂 노인복지관

 

나는 청춘자서전학교를 단순히 우리 복지관에서 진행하는 프로그램의 하나로만 생각할 수가 없다. 그렇다고 하기엔 여기 참여한 노인들의 삶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그리고 나에게도 많은 것을 남겼다.

 

김○자 씨는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 표현하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이러한 활동을 혼자서도 하기 위해 컴퓨터 교육과 서예라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하셨다. 양○자 씨는 남편과 사별하고 공황장애를 겪었지만, 사별의 아픔을 차츰 정리하고 심리장애가 호전되어 가고 있다.

 

이○순 씨는 천진하고 아름다웠던 어린 시절과 꿈 많았던 학창 시절을 회상해보고, 잊었던 친구들과 선생님을 떠올리며 다시금 행복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 청춘자서전학교가 아니었다면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을 일이라며 ‘내 생에 정말로 값진 시간이었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옥 씨는 자신의 변화된 삶을 시로 표현하셨다. 

 

안개 낀 날씨처럼 

허무한 내 인생에 

 

손에 쥔 구슬이 다 빠져 나간 것처럼 

빈손만 남은 것 같았는데 

 

학교에 나와 보니 

밝은 햇살이 보여 

 

그 구슬이 눈에 비쳐 

하나 둘 주워 담아 손이 가득하니 

 

그 구슬을 엮어서 목걸이나 완성해 보려고 합니다.

 

▶ 청춘자서전학교 졸업식에서.   ⓒ더불어樂 노인복지관

 

할머니들의 삶과 우리의 연결고리

 

이분들은 6.25 전쟁, 보릿고개, 독재정권 등의 수많은 역사적 난관 속에서 딸로 이 땅에 태어나, 능동적인 삶을 살아가기 어려운 환경 속에서 살아낸 여성들이다. 그러나 아무리 시대가 엄혹했어도 자신만이 만들어간 삶의 모습들이 있었다. 할머니들의 자서전은 후대에 남기는 인생 선배들의 일기장과 같았다.

 

또한 그녀들의 현재가 곧 나의 미래이기도 하기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더욱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 시간이기도 했다.

 

청춘자서전학교는 할머니들이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학교가 아니라, 존엄한 노후를 준비하는 학교이다. 앞으로 우리 할머니들은 어떤 삶을 준비하고, 살아갈까? 그녀들의 내일이 기대된다.  (이민영)  여성주의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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