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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그러나 마주해야만 하는
언니모자의 <평범한 폭력>展
2000년대 초반 페미니스트 아티스트 그룹 ‘입김’의 <아방궁: 종묘 점거 프로젝트>를 끝으로 한국현대미술사에서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활동은 뜸했다. 인기 좋고 유명한 작가가 되어 작품을 많이 팔거나 한국문화예술위원회나 각 지역이나 기업의 문화재단 지원을 받지 않고서는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지속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니 페미니즘을 포함해 사회성 짙은 발언을 담는 행동주의 예술을 지향하는 미술인들에게 창작 활동이란 생존의 차원이라고 보아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더불어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침체된 페미니즘 내부 분위기 등의 이유로 한동안 한국 미술계에서 페미니즘 작가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그런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작년 한해 페미니즘이 싫어서 IS에 자원했다는 김군 사태와, 메갈리안의 등장, 여성혐오 범죄와 발언들이 연달아 이슈가 되면서 상황이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예술학교에서 페미니즘 모임들이 조직되기 시작했고, 드문드문 페미니즘 미술가들의 활동 소식이 들려왔다. 그 와중에 여성주의 시각예술공동체 ‘언니모자’의 전시 소식을 듣고 찾아갔다.
액티비즘을 지향하는 페미니즘 미술
벽에 걸린 명화. 흔히 미술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들이 ‘미술’이라는 단어를 접할 때 떠올리는 이미지일 것이다. 반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작품이나 해바라기를 그린 정물화, 모네가 그린 프랑스의 도시 풍경은 우리가 사랑하는 명화들이다. 미술은 통상 작가가 본인의 의도를 특정한 매체를 이용해 표현하거나 구현해 완성한 작품을 말한다. 또 표현의 결과물로 만들어진 작품은 시각적, 미적 쾌락을 충족시키는 것이어야 한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더 이상 벽에 걸린 명화를 지향하지 않는다.
오늘날의 많은 미술 작가들은 사회 문제들을 들추어내 이슈화하는 등 사회에 적극적으로 개입하고자 한다. 이들에게 예술이란 액티비즘의 한 방편이자 수단이다. 이런 의도를 담고 있는, 이러한 의도에서 제작된 작품들은 그렇기 때문에 미적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기보다는 대면하기 쉽지 않은, 불편한 감정을 유발한다. 현대미술의 이러한 경향을 대표하는 하나의 갈래가 페미니즘 미술일 것이다.
▶ 임이혜 <Untitled> 종이에 펜 14.85X10.5cm 2016 ⓒ언니 모자 <평범한 폭력>展 전시작
여성주의 시각예술공동체라고 스스로를 정체화하며 활동을 시작한 언니모자의 작품들에서도 이러한 측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액티비스트로서 여성들에게 불합리한, 해결이 시급한 여성문제들을 작품으로 구현하고 이슈화해 대중들의 경각심을 유발하며 문제 해결을 촉구한다. 2015년 미아리 텍사스에서 성노동자들의 인권을 거론했던 언니모자는 올해 4월 14일부터 성북예술창작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 <평범한 폭력>에서는 ‘성폭력’이라는 주제를 택했다.
반갑다, 언니모자
남성이 여성에게 입히는 피해 중 가장 직접적이고 폭력적인 것이 바로 성폭력일 것이다. 성폭력은 피해자에게 육체적 상처와 함께 정신적 상처도 깊게 남긴다. 게다가 여성의 성적 순결을 중시하는 사회 분위기는 성폭력 피해자에게 오히려 낙인을 찍어, 회복하기 어려운 정신적 고통을 주거나 피해자들로 하여금 피해 사실을 숨기거나 축소하도록 유도한다. 또 피해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성폭력 피해를 입증해야 하는 법과 제도, 조사 과정에 참여하는 인력들의 성폭력에 대한 무지함이 야기하는 2차, 3차 피해는 꾸준히 심각한 문제로 지적되어 왔다.
언니모자는 이번 전시에서 성폭력 피해자가 아닌 가해자의 이미지를 전면에 내세워 기존의 “성폭력 언술의 방향”을 바꾸어 보려했다고 한다. 더불어 성폭력 사건의 대부분이 아는 관계에서 발생한다는 사실(전체 성폭력 사건 중 70-80%가 지인에 의한 범죄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성폭력 가해자는 우리 주변에 있을지도 모르고, 내 주변을 채우고 있는 이들 중 잠재적인 가해자가 있을지 모른다는 사실까지 거론한다.
▶ 이정은 <Untitled> 캔버스 보드에 과슈 30X30cm 2016 ⓒ언니 모자 <평범한 폭력>展 전시작
언니모자는 성폭력 피해 당사자들과 직접적인 소통을 하고, 성폭력상담소와 간담회를 가지는 등의 과정을 통해 작품을 완성해 나갔다고 한다. 전시장 한쪽 벽면을 채운 성폭력 피해 당사자들의 다큐먼트, 이 다큐먼트들을 기반으로 재구성한 가해자들의 이미지가 전시장을 채우고 있다.
다섯 작가의 연작 중 임이혜의 <Untitled> 연작은 쉽게 잊히지 않는다. 얼굴인 듯, 사람의 모습인 듯, 신체의 일부분인 듯 언뜻 분간하기 힘든 형상들이 얽히거나 파편화되어 있다. 그 위로 거칠게 흩뿌려진 검은 자국들은 잊어버리려고 해도 잊히지 않고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끔찍하고 괴로운 기억과 공포로 가득한 누군가의 불안정한 감정을 묘사하는 듯하다. 사건의 현장과 피해자, 피해자를 따라다니며 괴롭히는 시선과 사회적 낙인 등 많은 이야기를 함축적으로 담고 있는 이정은의 <Untitled> 연작 역시 가벼운 마음으로 감상할 수 없었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은 그 지인과 피해자와의 관계에 존재하는 ‘젠더 위계’로부터 발생한다. 보통 남성들이 이 위계화된 관계에서 권력을 쥐고 있으며 여성들은 그렇지 못하다. 이러한 관계에서 벌어진 성폭력은 장기간 은폐되는 경우가 많다. 가해자들이 관계의 중요성 혹은 사회적 시선을 빌미로 피해자들의 심리를 컨트롤해, 강제적으로 혹은 ‘자발’적으로 폭력을 은폐하도록 유도하기 때문이다.
쥬나 리의 작품에 등장하는 기생식물은 피해자의 마음에 기생하면서 그 관계와 상황을 조정하는 가해자의 모습을 하고 있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젊은 남성이 숨기고 있을 지도 모를 폭력성을 시각화한 권순영의 작품과, 피해자가 방어할 수 없는 순간을 노려 폭력을 저지르는 가해자의 모습을 촉수를 쏘는 연체동물에 비유한 맥주의 작품에서는 막연한 공포와 그로인한 피로감에 노출된 여성들의 모습이 보인다.
작가들이 성폭력 피해자의 기억을 통해 느낀 막연한 공포는 여성이라면 누구나 겪어보았을 법한 감정일 것이고, 필자 역시 이 감정이 낯설지 않다. 반면 남성들에게는 이런 감정이 익숙하지 않을 것이고, 불편할 것이다. 암묵적으로 남성을 가해자의 범주에 포함시켜버렸기 때문이다. 성폭력은 근본적으로 개인이 아니라 사회 구조적 문제에 기인한다고 생각하지만 구조의 문제는 개인들의 변화에 의해서도 해결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니 불편하겠지만 언니모자의 작품들을 보고 공감하고 느끼고 이해해주기를 부탁한다.
‘낯선 시선’ 제시하는 페미니즘 미술의 정치학
▶쥬나 리 Lathrea Clandestina (Purple Toothwort) 종이에 연필 29.7×21cm 2016 ⓒ언니 모자 <평범한 폭력>展 전시작
여성의 권리, 여성과 남성의 평등 혹은 젠더의 평등을 외치는 페미니즘과 거리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페미니즘 미술은 불편할 것이다.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들이 공적인 공간에서 부딪히는 보이지 않는 진입벽인 ‘유리천장’, 남성보다 낮은 여성의 임금, 공평하게 배분되지 않는 가사노동, 여성에게만 강요하는 성적 순결, 여성에게만 제시되는 획일적 미의 기준 등 사회 제도와 문화에서부터 내밀한 일상까지 광범위한 차원의 문제들을 ‘문제’라고 지적한다.
페미니즘 미술은 여성과 사회적 약자들이 직면한 문제를 시각적으로 표현해 대중에게 제시하는 예술 장르다. 여성에게 불합리한 법적 사회적 제도를 개선하도록 요구하고, 가부장제와 그것을 체현하고 있는 남성(성)을 비판하고, 획일적인 아름다움을 지양하고,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말하며, 대안적인 외모 가꾸기 방식을 제안하기도 한다.
페미니즘 미술은 우리에게 낯선 시선을 제시한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것들, 보지 못했던 것들, 말하지 못했던 것들, 행동하지 못했던 것들을 직접 느끼고 경험할 수 있도록 작품으로 구현해 제시한다. 이것이 페미니즘 미술의 미학이자 정치학이다. 한동안 뜸했던 페미니즘 미술이 이 어수선한 여성혐오의 시대를 계기로 부활하기를 바란다. 그런 의미에서 반갑다, 언니모자. ▣ 오경미.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평범한 폭력>展
-2016년 4월 11일~4월 28일(오전 10시~오후 6시)
-성북예술창작센터 2층 갤러리 맺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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