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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관계, 상대방의 ‘동의’를 구했는가!

비명에 가까운 캠페인 <#그건_강간입니다>⑥



※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진행한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 <#그건_강간입니다> 기획단의 논의와 질문과 제안을 담은 연재 기사입니다. 마지막 필자 잇을님은 한국성폭력상담소 성문화운동팀 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필름 끊긴’ 상태에 대한 법원의 해석

 

2014년, 술에 취해 정신을 잃었다가 새벽에 깨어난 여성이 호텔을 급히 빠져나와 한 남성을 경찰에 신고한 사건이 있었다. 호텔에 있었던 남성은 준강간미수 혐의로 기소됐지만, 이듬해 서울중앙지방법원과 서울고등법원은 무죄를 선고했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재판부는 “당시에는 성관계를 하려 했는데 나중에 이를 기억하지 못하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피해자가 심신상실 상태가 아니라 자신이 한 일이나 상황을 기억하지 못하는 상태일 수 있다고 해석했다. 호텔에 들어갈 때 부축을 받았지만 ‘자기 발로’ 걸었다는 점, 경찰에 신고하기 위해 ‘8층 높이의’ 호텔 계단을 ‘단 1분 만에’ 내려온 것도 ‘항거불능’이 아니라는 근거로 삼았다.

 

유사한 판례는 더 있다. 같은 해 서울고등법원은 또 다른 성폭력 기소건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친구와 술을 마시고 정신을 잃은 여성이 처음 보는 남성과 모텔에서 깨어났고, 이미 동의 없이 성관계를 한 남성이 재차 성관계를 시도해 거부한 후 고소한 사건이다. 준강간과 강간미수 혐의를 인정해 징역 3년을 선고한 1심과 달리, 항소심에선 ‘만취해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주장만으로 (피해자가) 의사 능력이 없었거나 저항이 불가능한 상태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형법상 준강간, 준강제추행은 ‘사람의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상태를 이용하여 간음 또는 추행’(형법 299조)하는 것을 규율한다. 술, 약물에 취하거나 수면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한 성폭력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상태에 놓인 사람은 ‘폭행 또는 협박’이라는 수단(형법 297조 강간)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의식이 흐린 상황을 이용하여 성폭력을 저지를 수 있기 때문에, 그 특수성을 고려하여 별도의 법조항을 마련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준강간, 준강제추행죄는 법적 해결이 쉽지 않은 편이다. 함께 술을 마셨다는 이유만으로 피해자 유발론의 영향을 받는다. 게다가 재판부가 ‘필름이 끊긴’ 상태는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이 아니라는 해석을 내놓으면서, 의식을 잃을 뿐 아니라 몸을 가눌 수 없는 완전한 만취 상태를 ‘심신상실 또는 항거불능’의 내용으로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입증하기란 매우 어렵다.

 

‘피해자 탓’ 하는 사회

 

취한 사람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은 빈번하게 발생해왔다. 단지 ‘성폭력 사건’으로 드러나지 않았을 뿐이다. 2015년 한국성폭력상담소 상담 통계에서 준강간, 준강제추행은 전체 성폭력상담 중 약 11.5%(전체 1천308건 중 146건)로, 결코 적지 않은 숫자다. 이는 술,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을 가볍게 여기고 조장하기까지 하는 사회문화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일부 바/클럽이 도수를 속인 술이나 약물을 판매해 성폭력에 가담하는 동안, 대중매체는 여성을 취하게 하는 것이 성관계로 가는 지름길이라고 속삭인다.


▶  #그건_강간입니다 캠페인으로 일환으로 진행된 <애주가의 밤> 행사.     ⓒ한국성폭력상담소

 

술, 약물에 의해 성폭력 피해를 겪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건_강간입니다 캠페인의 일환으로 진행된 “애주가의 밤” 행사에서, 한 참석자가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맥심>(남성잡지) 같은 경우에 남성들에게 작업주를 가르쳤다는 그런 이야기가 있잖아요. 제가 여성지를 보다가 깜짝 놀랐던 것이 (…) 여자가 일어나보니까 모르는 남자랑 모텔에서 눈을 떴고,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였는데. 그렇다면 그 여자가 기억이 없을 정도로 술에 취했다는 전제가 깔려 있잖아요. 저는 아직도 기억이 나는데 (…) 당황하지 말고 세련된 도시여자인 것 같은 애티튜드를 어떻게 가르쳤냐면, 욕실 거울에 치약이나 립스틱으로 ‘너 좀 서툴더라’ 이렇게 써놓고 가라, 이런 식으로. (…) 여성들이 보는 텍스트나 컨텐츠에서도 그것이 성폭력이라는 것을 가르쳐주는 기회가 없었던 거예요.” (#그건_강간입니다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캠페인 최종발표회 자료집, 한국성폭력상담소, 2015)

 

성폭력 피해의 해결에 정답은 없다. 그러나 대중적인 잡지가 제시하는 조언이란 게 기억나는 척, 별일 아닌 척 “너 (성관계에) 좀 서툴더라” 메시지를 남기라는 것이라면? 전혀 세련되지도, 쿨하지도 않다.

 

“야 봉숙아 

말라고 집에 드갈라고 

꿀발라스 났드나 

나도 함 묵어보자 

아까는 집에 안 간다고 

데낄라 시키돌라케서 

시키났드만 

집에 간다 말이고 

못 드간다 못 간단 말이다 

이 술 우짜고 집에 간단 말이고 

못 드간다 못 간단 말이다 

묵고 가든지 니가 내고 가든지” (봉숙이, 장미여관 곡, 2013)

 

성폭력을 성폭력으로, 강간을 강간으로 말하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술,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의 피해자는 피해를 호소하는 일조차 쉽지 않다. 이러한 성폭력의 특성상 상황을 기억하기 어렵고 이른바 ‘데이트 강간약물’을 사용했다는 것도 증명하기 쉽지 않다.

 

무엇보다도 ‘취한’ 상태에서 성폭력을 당했다는 사실에 대한 비난과 몰이해가 문제 해결을 가로막는다. 피해자의 취한 상태를 이용하거나 유도하여 피해자를 속이고 성폭력에 용이하게 상황을 조성한 가해자의 의도를 보지 않고, 피해자가 ‘얼마나 취했나’ ‘정말 취했는가’ 등 ‘취한 정도’에 집중하면서 성폭력 사건의 핵심도 흐려진다.

 

술에 취했을 때의 양상은 개개인마다 천차만별이다. 신체는 통제할 수 있지만 자신의 행위의 의미를 인지하지 못할 수도 있고, ‘필름 끊김’을 겪는 사람도 상당수다. 술이 개개인에 따라 ‘필름 끊김’, 정확한 의사소통의 어려움, 의식불명이나 잠듦을 야기할 수 있다는 걸,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다. 단순히 스스로 걸을 수 있었다는 단편적 행위만으로 피해자가 만취 상태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을까? 필름이 끊길 정도로 만취해서도 ‘취한 채’ 성관계에 동의를 할 수 있으므로 성폭력이 아니라고 판단한다면 ‘준강간죄’가 보호할 수 있는 피해자는 현실적으로 과연 얼마나 될까.

 

피해자가 원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가해자가 피해자의 의사를 오해할 수 있었다’며 재판부가 가해자의 ‘오해’에 힘을 실어줄 때, 술·약물에 취한 상대를 고려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일방적 행동을 한 가해자의 잘못은 삭제되어버린다. 그리고 책임은 피해자들에게 전가된다. “오해하지 않도록 의사표현하지 않는 (여성들의) 태도가 문제”라고.

 

한국 사회는 ‘밤늦은 음주는 여자에게 위험하다’고 강조하면서도, 그 위험을 정말로 야기하는 이가 누구인지, 위험을 줄이기 위해 누가 책임져야 하는지는 묻지 않는다. 대신 ‘조심성 없이’ 취할 뿐 아니라 ‘예스/노’를 제대로 말하지 않은 피해자의 행실 문제로 성폭력의 책임을 돌려버린다.

 

상대방의 ‘동의’를 확실히 확인했는가!

 

피해자의 행동이 아니라 가해자의 행동으로, ‘상대방이 거부했는가’가 아니라 ‘상대방의 동의를 확실히 확인했는가’를 핵심으로 성폭력을 판단해야 하지 않나? 동의란, 속임수와 압력이 없는 합의를 뜻한다. 그리고 언제든 철회할 수 있어야 한다.


▶ 술과 약물을 이용한 성폭력 방지, #그건_강간입니다 캠페인에 사용한 피켓  ⓒ 한국성폭력상담소

 

‘동의’를 구하라! 그것은 ‘동의’를 명확히 표현할 책임을 여성에게 짊어지우자는 것이 아니다. 성적 의사소통을 하는 데 있어 여성들이 더욱 억압받는 사회에 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동의를 구하는 과정이 중요하다. 일방적으로 성적 행동을 주도하거나 강요해선 안 된다.

 

실제로 많은 성관계가 ‘명시적’ 동의로만 일어나지 않는다고 할 때, 그 이유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상대방의 의사를 물어보면 ‘분위기 깬다’는 생각, 아무 것도 안하면 ‘고자’라고 조롱하는 문화는 성적 의사소통을 막거나 폭력을 옳은 행동으로 둔갑시킬 수도 있다. 중요한 건, 동등하지 않은 위치에 있는 사람 간의 의사소통은 ‘편리’가 아닌 ‘상대에 대한 존중’을 우선해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관계맺음은 상대방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의사소통을 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 ‘폭력’이나 ‘괴롭힘’이 될 수 있다. 또한 누구도 자신의 젠더 정체성을 이유로 자신의 성적 욕구를 이해하고 표현하고 경험하는 것에 대해 비난받거나 함부로 취급되어선 안 된다.

 

4개월간의 #그건_강간입니다 캠페인 활동은 마무리가 되었지만, 앞으로도 할 일이 많다. 사법부가 술·약물을 이용한 성폭력을 제대로 처벌할 수 있도록 사회 인식이 변화해야만 한다. 주류판매업 종사자가 강하게 혼합된 술 제조를 요구받거나 성폭력 위험 상황을 목격했을 때 이를 중단시킬 수 있도록 바/클럽 종사자를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또한 ‘데이트 강간 약물’과 관련, 의료인을 위한 가이드라인을 마련해 약물 사용 여부를 확인하고 피해자가 의료 조치를 취하는 데 있어서 어려움을 줄여야 한다.

 

무엇보다 성폭력에 대한 인식의 전환, 가해 행위를 묵인하지 않는 사회구성원들의 변화가 있어야만 술·약물을 이용한 성폭력을 근절할 수 있다. 성폭력 문화를 폭로하고, 사람들이 성폭력에 대해 잘, 제대로 알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힘이 이를 실현하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이 지면을 빌어, 4개월간 애써온 자원활동가들과 이 캠페인 활동을 시작할 수 있게 후원해주신 147명의 후원자들, 그리고 #그건_강간입니다 캠페인 행사마다 참여하고 자원해 도움을 주신 수많은 분들께 다시 한 번 감사를 전한다.  ▣ 잇을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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