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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인과 예술
<여라의 와이너리 시즌2> 보르도 와인과 이우환
작년 가을, 영국 와인 월간지 디켄터(Decanter) 기사를 통해 프랑스 보르도 와이너리 ‘샤토 무통 로칠드’가 2013년산 와인 라벨에 이우환 현대미술가의 그림을 담았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 현대미술가 이우환의 작품이 담긴 <샤토 무통 로칠드> 2013년산 와인 라벨 ⓒchateau-mouton-rothschild.com
무통 로칠드에서는 1924년 장 까를뤼(Jean Carlu) 라벨을 선보인 적이 있고, 1945년 이후로는 피카소, 샤갈, 달리, 미로, 칸딘스키, 키이스 해링, 앤디 워홀 등 이름난 화가들의 작품을 매년 와인 라벨에 담았다. 올해는 누가 무통 로칠드의 라벨 그림을 그릴지, 어떤 그림인지 매년 이야기 거리다.
근래 들어 비서양권 작가를 더러 선정하기는 했지만 한국 사람은 이번이 처음이다. 무통 로칠드 측은 2014년 베르사이유궁 초대전에서 선보인 이우환의 작품들이 인상 깊었다고 설명했다.
얼마 전 2013년산 와인 라벨과 원화 공개행사로 로칠드 가문 공동 대표이며 라벨 화가 선정 책임자인 줄리앙(Julien de Beaumarchais de Rothschild)과 함께 이우환 작가가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국내 미술계는 오로지 이우환 그림의 위작 논란에만 관심 있는 듯해서 씁쓸했다.
예술가로서 이우환의 기본 발상은 -그의 말을 그대로 빌리자면- “작품 활동을 통해 되도록 다양한 남들과 대화해야 하고, 남들과 어울려야 하며, 그 타자를 불러들인 표현의 장을 마련해야 된다.” 깜짝 놀랐다. 마치 좋은 와인을 설명한 것 같은, 딱 맞아 떨어지는 개념이라니! 표현을 되도록이면 적게함으로써 사물 혹은 사물의 본질을 그대로 드러낸다는 모노파(物派) 예술가 이우환은 최소한의 표현으로 공간, 여유, 틈새를 만들어 내고 거기서 대화가 이루어질 수 있도록 숨을 불어넣는 것 같은 이미지를 만드는 것 같다. (예술에 문외한인 나의 느낌적인 느낌.)
가난한 젊은 시절이나 지금이나 와인을 좋아한다는 이우환은, 물질과 지혜가 합쳐져 다른 차원의 세계를 창조한다는 점에서 와인과 예술은 만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이번 그의 와인라벨은 그 둘을 연결 짓는 지점인 셈이랄까.
보르도 와인과 영국-프랑스 왕실의 역사
무통 로칠드는 보르도 지방 메독(Médoc)에 있다. 보르도의 명성은 영국이 만들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이 지역은 오랫동안 영국과 영토 다툼이 있었다. 프랑스 루이 7세의 왕비 엘레오노르(Eléonore d’Aquitaine)는 보르도 출신이었는데, 이혼 뒤 훗날 영국 헨리 2세가 되는 앙리 플랑타즈네(Henri Plantagenet)와 1152년에 재혼하였다. 그래서 보르도 땅도 영국의 것이 되었고, 보르도 와인은 영국 왕실의 와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영국 사람들은 보르도 와인을 사랑하게 되었다.
대략 김부식이 고려 인종의 뜻으로 <삼국사기>를 내고 무신들이 난을 일으킨 시절부터, 보르도 와인은 지금 우리에게도 이름이 익숙한 그 ‘보르도 와인'이었다. 그 당시에는 거래 가격에 따라 무역상 사이에서 등급이 매겨져있었다. 그러다 1855년 파리에서 세계박람회가 열렸는데, 그때 거래되는 와인의 품질과 가격에 공정한 근거를 제시하기 위하여 여러 사람의 가격표를 토대로 상공회의소가 와인 등급을 공식화했다.
드넓은 보르도 지역 안에서도 와인 등급이 공식화된 레드와인은 거의 메독 지역 와인이었다. 그래서 이후 다른 지역 와인도 등급을 공식화하는 작업이 뒤따랐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커다란 행사를 앞두고 일단 정해본 와인 등급(‘1855 보르도 와인 분류’)은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오늘까지 별 변화가 없다. (그래서 와인 쫌 안다는 이들은 무슨 수학공식처럼 보르도 어느 지역 어느 와이너리가 몇 등급이라고 외워댄다.) 거의 유일한 변화는 1973년 원래 4개뿐이었던 1등급 와인에 샤토 무통 로칠드가 2등급에서 1등급으로 올라간 것이다.
와인과 문화
▶ 육명심 사진 작가가 찍은 이우환 현대미술가의 모습을 갤러리에서 만나다. ⓒ여라
문화를 어떤 지역(공간)이나 시간에 잘라 맞춰 생각하기는 어렵겠지만, 문화는 어떻게 움직이고 교류(대화)하는 걸까.
우리의 백제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가 꽃을 피웠다고 해서 그곳의 문화를 우리 것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프랑스 보르도 와인의 이름을 알리는 데에는 영국의 영향이 결정적이었지만, 좋은 와인을 만들고 놀라운 브랜딩과 마케팅까지 한 것은 남들이 아니라 무통 로칠드처럼 보르도 와이너리들이다. 무통 로칠드가 한국인 예술가의 작품을 담은 것과 우리가 무통 로칠드 와인을 즐기는 것은 진행 방향도 반대이고 전혀 다른 이야기인데, 무엇이 이 양방향 움직임을 가능하게 했을까.
되돌이표에 자꾸 돌아오는 수수께끼 같기는 한데,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와인은 문화를 담는 그릇일까, 문화가 와인을 담는 그릇일까. 와인이라는 그릇에 문화가 담기나. 아님 문화라는 그릇이 와인을 담고 있나. 질문이 많이 생기는 이른 봄날, 와인이나 한 잔 마셔야겠다.
사족. 이달 말 무통 로칠드는 서울에서 2013년 라벨 기념 와인디너를 연다. 단돈 40만원. 이우환 화가 그림이 찍혀있는 2013 무통 로칠드 소매가 한 병에 369달러라고 하니, 와 디너 싸다. ㅠㅠ ▣ 여라/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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