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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집에 대한 사유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뿌리를 내리는 일은 아마도 인간의 영혼에서 가장 중요하지만 가장 적게 인식되는 욕망이다.” -시몬느 베이유 <뿌리에의 욕망>
▶ 안방.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백년이 넘은 낡은 집이다. © 김혜련
집이 무엇일까
집이라는 언어가 불러오는 몸과 마음의 울림을 표현할 능력은 내게 없다. 우리말의 자음과 모음이 어울려서 나는 한없이 따뜻하고 긴 여운의 깊이를, 그 언어 속에 축적된 인간의 오랜 역사와 정서를, 그것이 다시 내 삶에 쌓이고 새롭게 창조된 경험의 두께를 표현할 방법이 내겐 없다. 다만 말로는 다 안 되어서 감탄사와도 같은 긴 호흡으로, 수화를 하듯 온 몸으로 건너가기를 바라는 집에 대한 절실함이 있다. 집이 지닌 한없는 울림을 나는 더듬거리면서라도 말하고 싶다.
울림, 울린다는 것은 퍼져나가는 것이다. 성덕대왕 신종의 종소리가 퍼져나가듯 짙은 밀도로 온 몸과 영혼에 퍼져나가는 울림. 집이 주는 기쁜 내적 출렁임에 대해 말하고 싶다. 나의 울림뿐만 아니라 타(他)의 울림들을 만나고 싶다. 그 울림들이 모여 이루어 낼 중층적이고도 집단적 울림으로서의 집에 대한 사유와 체험이 강물처럼 흘렀으면 한다.
집
겨울 밤 작은 건넌방 아랫목에
고단한 몸을 뉘이면
집이 날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양피 못 청둥오리가 알을 품듯
정성스레 감겨오는 따뜻한 몸
천년 묵은 땅,
백년 넘는 집이 내는 고요한,
오랜 숨소리를 듣게 된다.
엄마 배에 엎드려
엄마의 따뜻한 숨결 따라 움직이는
배의 고요한 출렁임을 믿고,
아주 믿고,
수 만 년 전의 잠을 자는
갓난아기처럼
의심 없는 천진한 잠을 잔다.
"엄마, 안녕!"
이 빠진 헌 밥그릇같이
낡고 시린 몸에서
어여쁜 아기가 걸어 나와
집과 함께 아장아장 논다.
나지막이 울리는 집의 숨소리
집은 날 품고
부화(孵化) 중이다.
나에게 집은 단순한 거주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평생 그리워했으나 부재했던 따스함, 버려지거나 내쳐지는 것이 아닌 받아들여짐의 상징으로서의 공간, 세상으로부터 나를 온전히 지켜주고 품어주어 숨어들 수 있는 장소다. 갓 태어난 아기같이 천진한 잠을 잘 수 있는 깊고 원초적인 공간이다. 집은 부재했던 모성이며 나의 몸 자체이기도 하다. 새로운 시간을 창조하는 우주이며, 끝없이 다시 태어나게 하는 재생의 공간이다.
▶ 남산이 바라보이는 뒤뜰, 자귀꽃이 한창이다. © 김혜련
돌아온 탕자와도 같이
집이 내게 이런 공간이라는 것을 나는 어떻게 알았을까?
집에 대한 사유는 어이없게도 오십 평생을 집 없이 떠돈 뒤에 왔다. 집 없이 떠돌면서도 그 사실을 까맣게 모른 채 아무 생각 없이 이집 저집을 전전한, 오랜 뒤에 왔다. 집으로부터 멀리 떠나 떠돌이의 자유와 ‘자아실현’이라는 근대인에게 주어진 위대한 과업을 마음껏 추구하고, 동시에 그 배면의 쓰디 쓴 맛 또한 톡톡히 본 뒤에 왔다. 마치 돌아온 탕자와도 같이 떠났던 그 자리에 돌아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며 그동안 내가 했던 짓이 무엇이었을까, 불면의 밤을 홀로 자기와 대면하여 독백하는 이의 물음 같은 것.
너무도 당연하여 캐묻지 않았던 것들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는 것은 그만큼 삶이 위태롭다는 것이리라. 어리석게도 나는 무언가를 이루겠다고 허공 위를 질주하다가 어찌 해볼 수 없는 삶의 공허에 부딪히고 또 부딪히면서 깨닫고 있는 것이다. 내가 내팽개친 것이 삶을 받쳐주는 가장 근원적인 것이었음을. 너무도 당연해서 물음조차 던지지 않았던 근원의 영역, 그것은 집이며 밥이고, 몸이며 땅이고 생명이다.
나카자와 신이치의 <대칭성 인류학>(카이에 소바주 시리즈 5권)에서는 특별한 지혜에 다가가는 인디언 남자들의 비밀결사와 그 ‘비밀지’(秘密智)에 아예 차단된 여성들의 이야기가 나온다. 한 인류학자가 그 불평등에 대해 지적하자 마을의 여성이 웃으며 하는 말이다. “가엾게도 남자들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혜에 다가갈 수가 없는 거예요. 하지만 여자는 그냥 자연스럽게 그것을 알죠.”
나는 이 인디언 남자와도 같다.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고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죽음과 재생의 의식을 치르고’ 완전히 변화된 인간이 된 양 귀환한다. 하지만 거기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일상을 통해서 도달하게 되는 ‘자연지’(自然智)인 것이다.
삶은 원래 이런 게 아니었을까
▶ 밭으로 나가는 뒷문 아래 하늘이가 누워 잔다. © 김혜련
오십 여 년의 긴 여정 끝에 나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을 가꾸면서, 집을 가꾸는 오래되고 진부한 일상적 행위가 나의 몸과 정신을 벼리고 가꾸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하는 일이 곧 나 자신이다’를 집을 통해 안다. 집을 청소하는 일이 나를 맑히는 일이고, 집의 고요가 나의 고요이며, 집을 아름답게 하는 일이 나를 아름답게 하는 일임을 경험으로 체득한다.
내가 살고 있는 집은 백년이 넘은 낡은 집이다. 이 집은 삶의 원형 같다. 어떤 과장이나 왜곡 없이 단순하고 평화로운. 삶은 원래 그런 게 아니었을까. 마당의 ‘하늘이’(6년 동안 같이 살아온 늙은 개의 이름)가 가장 평화로운 곳을 찾아 따뜻하게 제 생명을 향유하는 것처럼 삶은 그렇게 단순하고도 아름다운, 절실한 그 무엇이었을 게다. 그 절실한 고갱이를 회복하고 온 몸 깊이 새겨 가는 과정, 앞으로 남은 내 삶이다. ▣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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