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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를 그만두고 서울을 떠난 이유

<여자가 쓰는 집과 밥 이야기> 집에 이르기까지①



※ <학교종이 땡땡땡>,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을 집필한 김혜련 작가의 새 연재가 시작됩니다. 여자가 쓰는 일상의 이야기, 삶의 근원적 의미를 찾는 여정과 깨달음, 즐거움에 대한 칼럼입니다. -편집자 주

 

남편이 있던가, 직업이 있던가

 

“도대체 왜? 뭘 믿고 이러는 거야? 여자가 세상에 살아남으려면 최소한 둘 중 하나는 있어야지, 남편이 있던가, 직업이 있던가.”

 

내가 이십여 년 된 직장을 그만두려고 할 때 날 아끼던 동료가 거의 외치듯 한 말이었다. 이혼을 했으니 남편도 없고, 아들은 아직 고등학생이니 앞으로 한참 돈 들어가야 하고, 직장을 그만 두면 세상에 적을 둘 곳이 아무데도 없는데 뭘 믿고 직장을 버리고 나오려 하는 건가. 게다가 좀 좋은 직장인가. 서울 명문 인문계 사립학교에다가 나이도 마흔 중반을 넘었으니 학교에서 누가 뭐라고 할 사람도 없고, 하루에 두세 시간만 수업하면 꼬박꼬박 매달 수백만 원의 월급이 나오는데, 이 좋은 직업을 왜 그만둔다는 말인가.

 

내가 학교를 그만두려고 할 때 대부분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그들의 말이 충분히 일리가 있기에 대답할 말이 궁색했다. 우물쭈물 대충 말하거나 “트럭 몰고 다니면서 사과장사하지 뭐, 사과 사세요! 사과~ 남편 한 방에 보내는 독사과~ 그렇게 외치고 다니면 무지 잘 팔리지 않을까, 아줌마들이 떼로 몰려들 거야.” 그렇게 눙치거나 했다.


▶ 학교. 마지막 수업.    ⓒ김혜련

 

하지만 나로서는 몇 년 동안 깊이 고민하고 내린 결정이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아이들을 만나는 일이 아주 버거워졌다. 마흔이 넘으면 인생을 보는 눈도 깊어지고, 따라서 좀 더 성숙하고 좋은 교사가 되리라고 믿었다. 믿음은 현실 속에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언젠가부터 나는 교실에서 투명인간이 되어버렸다. 어떤 말을 해도, 아무리 말을 해도 아이들이 내 말을 듣지 않는 이상한 세계에 내가 있었다.

 

나는 엉뚱한 곳에서 삶의 함정을 만난 사람처럼 허둥대고 불행했다. 내가 불행하다고 외치기 시작하자 여기저기서 마치 전쟁을 방불케 하는 모험담들이 터져 나왔다. <학교 종이 땡땡땡>으로 엮어 나온 교실 이야기는 그 불행을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 여성신문에 연재했던 글이었다. 나는 아이들을 만나는 게 점점 벅찼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는 사실에 매 시간 교단에서 식은땀이 났다. 밤이면 하루 종일 흠씬 두들겨 맞은 것 같이 몸과 마음이 아팠다.

 

다른 이유도 있었다. 나는 가끔씩 자신에게 물었다. “너, 일 년 후에 죽는다면, 그래도 지금의 삶을 살 거니?” 그 질문 앞에 거세게 도리질을 쳤다. 실제로 죽는 것도 아닌데 격렬한 감정이 가슴을 쓸고 지나갔다. 사실 내겐 평생 나를 지배하는 삶의 과제가 있었다. ‘영혼의 허기’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는 어떤 허기를 해결해야만 했다.

 

페미니즘과의 만남: ‘없는 나’에서 ‘있는 나’로

 

젊은 시절 나는 어떤 정체성도 없이 뿌리 뽑힌 나무처럼, 안개에 가린 듯 모호하게 세상을 살아왔다. 직업에도 아내, 주부로서의 역할에도, 엄마라는 자리에도, 그 어느 것에서도 나답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 알고 싶어, 삶이 막막해서 종교를 기웃거렸다. 어떤 종교는 “나는 없소, 나를 내려놓으시오!” 라고 가르쳤고 어떤 종교에서는 가슴을 치며 “내 탓이요, 내 탓이요” 했다. 나는 내 가슴을 치며 울었다. 내가 있어야 내 탓을 하지, 내가 있어야 나를 내려놓지, “제발 내려놓을 내가 누구인지 알려주세요. 어디에도 나는 없어요~”

 

‘없는 나’에서 ‘있는 나’로 정체성의 변화는 여성학을 만나고서였다. 페미니즘을 처음 만났을 때의 나는 거의 ‘사람’이 아니었다. 이혼을 하고 어린 자식과 헤어지고(몇 년 후 다시 만나 키우게 되었다), 가족의 어떤 정서적 지지도 받을 수 없었다는 이유뿐만이 아니었다. 이혼까지 오게 된 내 삶의 과정이 그러했다. 환영받지 못한 생명들이 갖는 공통된 정서인 세상에 대한 과장된 경계와 공포, 지독히 낮은 자기 개념, 그리고 내 안에서 항상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현실의 나’와 내가 되고자 하는 ‘이상적 나’ 사이의 터무니없는 간격이 이혼을 계기로 와르르 낡은 담벼락 무너지듯 눈앞에 그저 드러났다.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그 생생한 충격은 사람이 되리라는, 그러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는 절박함이었다. 나는 정말 ‘죽을힘을 다 해’ 공부했던 것 같다. 그래서 그 공부는 내게 학문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는 자궁이었다. ‘미친 년’ ‘바보’를 치유하는 병원이었고, 없는 가족이 생겨난 장이었다. 나는 학문을 한 게 아니라 날 구원한 것이었다. 드디어 나는 ‘사람’이 되었다.


▶ 여성학과에 다니던 시절. 고정희 시인 추모제 때 동기들과 함께. (위에서 가운데가 필자)  ⓒ김혜련

 

‘사람’이 되어서 무었을 했나? 물론 열심히 살았다. ‘없는 나’, ‘미미한 존재로서의 나’가 아니라 분명하고 확실한 자기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다. 교사로서의 정체성도 비로소 갖게 되었다. 전교조 결성을 함께 하고 교육부에 성교육 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한국여성민우회에서 이혼여성들과 자조 모임을 꾸렸다. ‘또 하나의 문화’에서 소모임 활동을 하고, 여기저기서 청탁하는 글들을 썼다.

 

더 이상 나는 ‘피해자’, ‘약자’가 아니라 내 경험이 오히려 자원이 되는 자리에 서 있었다. 당당하게 세상 속에 나를 세웠고 불합리한 세상 구조에 맞섰다. <남자의 결혼, 여자의 이혼>, <학교 종이 땡땡땡>같은 책들은 시대적 필요와 맞물려, 여성학이나 교육 쪽에서 나의 위치를 세워준 일종의 ‘자아실현’적 텍스트들이었다. 그 텍스트들에 의해 나는 내 말에 힘이 실리는 경험을 했다. 난 그토록 경원해마지 않던 확실한 나, ‘잘난 나’가 되어 있었다.

 

‘두려움이나 결핍 없는 자아’를 찾고 싶은 갈망

 

그러나 인간은 그리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었다. 사회적 정체성은 찾았을지언정 내적으로는 여전히 세상이 공허하고 두려운 ‘버려진 아이’에 불과했다. ‘이대로 늙는다면, 죽을 때까지 이 공허함을 안고 간다면…’ 그 가정은 두려웠다. 내적인 공허가 클수록 ‘스스로 온전한 자’가 되고 싶은 갈망도 클 수밖에 없었다.

 

노년에 대한 관심으로 읽게 된, 노년에 관한 책들은 나의 두려움을 더욱 자극했다. 보바르의 <노년>에는 다양한 노년의 이야기들이 있다. 노년은 어려운 시간이다. 특히 유년기가 불우했던 사람의 노년은 힘겹다. 에너지나 관심이 외적인 것으로 향하는 젊은 시절과는 달리 노년은 내면의 시간, 자신과 직면하게 되는 시간이다. 그 때 자기 내면에 있는 것들이 거미줄투성이 지하실의 어둠과 피 묻은 담요 같은 거라면 어쩔 것인가. ‘내면의 아이’를 성장시키지 못한 노년의 예는 주변에도 수두룩했다. 육십 먹은 다섯 살짜리, 칠십 먹은 세 살짜리 노년들….

 

그러고 보니 내 삶의 기본 동기는 늘 두려움이었다. 깊은 차원에서 삶의 동기는 둘 중 하나다. ‘사랑’ 아니면 ‘두려움’. 두려움이 나타나는 형태는 다양하다. 게으름이나 분주함, 무관심, 지나친 욕망, 공허감, 중독…. 내가 무엇을 하고 안하고, 어떤 것을 보고 안보고…. 내 모든 행위의 근거는 두려움이었다. 비참했다. 죽을 때까지 그러할까 또 두려웠다.


▶ 모래로 만든 만다라. 완성하기까지 일 년 정도 걸리는 섬세한 작업인데 완성되면 흩어버린다. 무상~ ⓒ김혜련

 

두려움에 대한 성찰은 나의 행불행이 언제나 외부의 그 무엇에 놓여 있다는 것 또한 보게 했다. 외부의 무엇에 의해 행불행이 결정된다면 내 삶에 자유나 평화는 없을 것이었다. 무엇이 있어서 좋고 무엇이 없어서 나쁘고, 무엇만 있으면 무엇만 없으면…. 난 내 삶의 내적 동기가 사랑이 되기를, 사랑 때문에 무엇인가를 하고 안하기를, 외적인 무엇에 의해서 행불행이 좌우되지 않는 사람이 되기를 바랐다.

 

몇 년 동안 영성에 관련된 서적을 읽었고, 영성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모임을 꾸렸다. 인도로 떠나고, 명상을 시작했다. 위파사나, 아바타, 예술 치료, 요가, 동사섭(同事攝) 등의 다양한 영성 수련에 참가했다. 이제 내 관심의 영역은 현실의 행동하는 세계이기보다는 내적인 자유와 평화, 존재의 근원을 찾는 쪽으로 강력하게 방향 전환을 한 거였다. 융이 말하는 중년기의 ‘개성화 과정’(개인의 무의식에 내재된 요소들을 의식과 통합하여 전인적인 자아를 찾는 과정)을 심각하게 겪고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두려움이나 결핍 없는 ‘스스로 충만한 자’가 되는 것은 내 내적 여행의 목적이자 완성 점이었다. 나는 마른 번데기처럼 쪼그라든 ‘내면의 아이’를 살려내어 이생에서 내 생명의 꽃을 활짝 피우고 싶었다. 그 길을 가고 싶은 갈망으로 다른 것이 보이지 않았다. 다만 이런 갈증과 열망을 이해받기 어려웠기에 ‘왜 학교를 그만 두느냐’는 질문에 어정쩡한 대답을 하며, 주변 사람들에게도 거의 알리지 않고 학교를 접고, 서울을 떠났다. ▣ 김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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