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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가 할 수 있는 아들 성교육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15. 성역할의 각본 바꾸기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아내와 아이가 있는 ‘직장인 남성’의 위치

 

씁쓸한 현실 중 하나는, 많은 이들이 성별이 같다는 이유만으로 아들 성교육의 적임자로 아이아빠, 남편을 고려한다는 점이다.

 

“아빠한테만 맡기는 게 제일 나빠요”라고 내가 웃으며 말하면 “그러게요, 아빠들이 가르칠게 뭐 있겠어. 기껏해야 야동 출처나 룸살롱 지식 말고는 공유할 게 없을 거야. 하하하~”라고 맞장구쳐주는 이들이 많다. 다시금 이토록 낮아진 기준을 원망한다. 아빠가 야동 안보고 룸살롱 안 다니면, 그것만으로도 가정에 충실한, 아들에게 귀감이 될 만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우리의 바람은 이토록 낮은 곳에 임하고 계시다.

 

하지만 내가 우려하는 바는 오히려 귀감이 될 만한 아빠들이다. 성실한 남편, 좋은 아빠 말이다. 성매매를 하고 포르노를 보는 아빠들은 차라리 그 악덕으로 인해 명백히 나쁜 일이 무엇인지 본보기라도 될 만하지.(그래도 된다고 받아들인다면 바보입니다. 이런 말을 덧붙이는 내가 한심해보이지만 안할 수도 없어 슬프네요.)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고, 아이가 있고 직장이 있는 중년남성. 이 말은 그가 꽤 안정적인 ‘남성성’을 가진 사람이라는 말로 해석해도 무방하다. 그는 이 사회가 남성의 역할로서 어울린다고 하는 것들을 충실히 완수한 자이다. 남성성이란 것이 별로 의심받지 않고 위협되어 본 적이 거의 없는 한국 사회에서, 그는 성차별적 사회 구조의 방관자 혹은 공모자라는 말로 이해해도 된다.

 

이런 말 뒤에는 반발이 아우성칠 것이다. 안다, 그의 하루하루가 얼마나 고되고 각박했던지 알고 있다. 최근의 한국에서 ‘안정’이라느니 ‘완수’라느니 하는 말들이 그 누구에게도 걸맞기 힘들다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아빠’, ‘남편’이라는 이름을 얻을 수 있다면 그는 성(性)적 구조에 있어서만큼은 어떤 수혜자일 가능성이 굉장히 높다. 그는 결혼이라는 제도의 성별 분업으로 이뤄진 보이지 않는 결과들을 누구보다 먼저 차지한다. 바로 무임금으로 치러진 가사노동의 결과물들 말이다.

 

“설거지는 제가 해요” 가사노동을 둘러싼 치사한 얘기


▲  가사노동의 성별 분업을 다룬 그림책 <돼지책>(앤서니 브라운 글 그림. 허은미 역. 웅진주니어) 중 한 장면.


가사노동? 살림? 이 단어들이 등장하면 이내 치사한 말싸움이 시작된다. ‘주말마다 분리수거도 제가 하고 하물며 설거지는 제가 합니다’, ‘가끔 아침밥을 제가 차려요’, ‘화장실 청소도 하는 걸요’, ‘저는 처가부모 모시고 삽니다’ 등등. 요새 성별 분업 따위가 어디 있느냐며 ‘나도 살림 좀 합니다’류의 주장들이 빗발친다.(어머, 우리 남편은 그만큼이라도 했으면 좋겠어요, 라면서 기대치를 자꾸 낮추지는 말자.)

 

그러면 이에 대해 ‘그게 기껏 도와주는 거지 살림이냐. 나는 네가 상상도 못하는 이것저것을 더 하고 있다’류의 반격들이 시작될 것이다. 가사노동에 대한 싸움은 늘어놓을수록 끝이 없는 이야기가 된다. 하나 받고 둘, 둘 받고 셋 이런 식이다. 가사노동의 성격 자체에서 비롯한 문제 같다.

 

흔히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대단한 일로 알지만, 유에서 무로 변화시키는 게 더 버거운 법이다. 살림은 대개 후자의 성격을 가진다. 밥 먹고도 안 먹은 것처럼, 옷 입고도 다시 새 옷처럼, 자고 일어난 자리 흔적 없이, 돌리고 또 돌리고 무한히 돌려놓는 게 살림이다. 그러니 하고도 뭘 했는지 증명하기 어렵다. 이미 ‘무’로 돌려놓지 않았나. 그렇지만 가사노동에서는 그것이 ‘유’를 이룬 것이다. 가사노동은 할수록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다. 기껏 우리는 그나마 손에 꼽을 수 있을만한 빨래, 설거지, 밥하기 이런 소소한(?) 것들이나 비교하는 것이다. 그러니 싸우자면 서로에게 늘 치사한 방식으로만 하게 된다.

 

그럼에도 한국 사회는 이 싸움에서도 승자가 명백하다. 대단하다. 남성의 가사노동 시간이 OECD 가입국가 꼴찌, 맞벌이 여성은 남성보다 가사노동에 다섯 배나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는 어마어마한 통계 결과들이 증거가 되어 준다. 흥미로운 것은 이런 증거 앞에서도 ‘내가 옆집 남자보다는 나을 걸요. 그나마 난 좀 다른 남자에요’류로 시작하는 치사한 변명들이 또 시작된다는 점이다. 네, 잘하고 계세요. 계속 다른 남자하세요. 꼭.

 

가끔씩 ‘인심 쓰는 아빠’를 보며 아이가 배우는 건?

 

성별 분업, 이를 오래된 옛말처럼 치부하는 이들이 많아졌다. ‘우리 부부는 평등해요. 할 수 있는 사람이 그저 하는 거죠’라고들 말한다. 타협이란 걸 할 수 있는 훌륭한 인격의 파트너를 만나면 될 일처럼 말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데는 남녀가 유별하지도 않다. 하지만 왜 유독 한쪽 성별의 사람들만 ‘할 수 있는 사람’의 범주에 들어가게 되는 걸까. 정확히 그것이 성별 분업이라는 사실을 왜 인정하지 못하는 걸까.

 

인정해야 할 것은 가사노동은 단순히 너와 나, 개개인이 알아서 잘 분담하면 끝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남자’, ‘살림 잘하는 남자’를 만나도 완전히 공평해지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둘이서만 해결 볼 수 없는 거대한 불평등의 구조가 있다. 결혼이라는 제도에 진입하여 양육까지 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이 구조의 자장 한가운데 있게 된다.

 

무임금화된 가사노동에 지독한 성별 굴레를 씌우기 위해서라도, 결혼은 제도가 아니라 사랑이어야 했다. 집은 노동 현장이 아니라 아늑한 쉼터가 되었다. 살림은 문명을 이룩하는 일이 아니라, 잡다하고 거추장스러운 일로 취급된다. 그러나 가사노동이 없다면, 진짜 하나도 없다면, 사랑과 쉼터와 문명은 가능하기나 할까? 이런 결과물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없이, 유독 한쪽 성별에게만 그 역할이 ‘임무’처럼 부과된다. 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기 위해, 이 일을 담당해야 하는 성별이 발견되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핵심은 무임금화 된 가사노동이다. 이 전제가 여성보다 남성이 더 높은 임금을 받게 하고, 여성이 ‘본질적으로’ 가정에 어울린다고 상상하게 만든다. 남성은 이 구조의 수혜자였다. (물론 개별 남성간의 혜택의 차이는 존재한다. 젠더 문제는 젠더 문제 홀로 작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남편들은 살림 좀 하라는 아내들의 성화에 ‘나도 바쁘다, 내가 밖에서 놀고 오느냐, 그래도 이렇게 바쁘게 일하니까 돈 벌어 오는 것 아니냐. 요새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 줄 아느냐’ 주장한다. 현실적으로 별 수 없으니 일단 좀 더 시간적 여유가 있는, 아내인 당신이 더 많이 할 수 밖에 없다.(여기서 아내도 일하는 사람인 경우가 태반인 사실은 함정. 그러나 일단 아닌 척 넘어갑시다.) 더 많이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 사람 좋게 웃으며 사랑한다고도 말하고 어깨도 주물러 줄 것이다. 그날은 인심 써서 대청소도 하고, 저녁은 간만에 아빠가 차린다. 아이들은 화목한 엄마아빠의 모습이라며 바라본다.

 

바로 이 순간. 이 모습. 집집마다 숱하게 반복되는 이런 장면 때문에 아빠는 절대 아들에게 좋은 성교육을 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한다. 사람들은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여기고는 한다. 자상한 아빠, 가사를 도울 줄 아는 아빠라서 아들에게 귀감이 될 것이라고. 그러나 지금 이 자상한 아빠가 전수한 것은 무엇일까. 아들은 아빠가 엄마에게 사랑과 인내를 베풀어 ‘인심 쓰는 모습’을 배웠을 뿐이다. 살림은 아빠의 몫이 아니었다. 그런데 우리 아빠는 자신의 몫도 아닌 것을 도와주려 애쓴다. 이런 상황에서 강조되는 것은 아빠의 ‘자상함’이다.

 

강조되어야 할 곳은 다른 곳이다. 아들이 배운 진짜 개념은 ‘살림은 남자인 내 몫은 아니구나’다. 이렇게 가장 화목해 보이는 순간, 가장 안락한 가족의 모습을 할 때가 정말 무서운 진실을 가린다. 정확하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무임금 노동을 착취한 현실은 완전히 삭제시켜버린다. 내 생각에는 차라리 엄마가 아빠에게 싸움이라도 거는 편이 낫지 싶다. 적어도 아들에겐 아빠가 자기 할 일을 안 해서 사달이 났다는 것은 인지되겠지.

 

스스로 살림하고 타인을 돌보는 아빠

 

사람들은 성교육을 상상할 때 섹슈얼한 행위들을 먼저 생각한다. 그런 행위들의 컨트롤타워는 성(性) 호르몬뿐이라고 믿으면서. 설사 시작은 호르몬이 하더라도 그 이후부터의 컨트롤타워는 성역할에 대한 사회문화적 습속이다. 예를 들어, 데이트 혹은 섹스는 그저 호르몬이나 사랑이라는 감정이 이끄는 대로 결과하는 것들이 아니다. 성역할이라는 모티브 위에서 변주한다. 우리의 연애각본을 생각해보라. 성역할의 각본에 얼마나 충실한가, 혹은 일탈되어 있는가에 따라 그들의 행위는 사회적 인정과 불인정 사이를 오갈 것이다.

 

결혼생활은 그런 것들의 거의 완성형이다. 결혼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그저 삶을 공유하는데서 멈추지 않는다. 결혼은 제도이고, 아무리 평등한 관계를 가장한다 해도 성역할의 수용 없이는 유지될 수 없는 세계다. 그리고 성역할은 가사노동에 있어서 유독 강박적으로 작용한다. 아이들이 배우는 최초의 성역할, 즉 최초의 성교육은 바로 엄마, 아빠의 살림에 대한 상반된 태도이다.

 

그러니 아빠가 전수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바로 성별 분업적인 가정을 완성하고 유지할 수 있는, 이 사회가 요구한 남성성 그 자체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따뜻하고, 행복하고, 웃음이 넘치는 가정일수록 더욱더 그 안락함을 가능케 한 성(性)적 구조의 전형을 이루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 이제는 조금은 다른 방식의 따뜻함과 안락함을 추구해도 될 때가 아닐까.

 

아빠, 남편이 변하지 않으면 절대 불가능하다. 그래서 남편이 가졌으면 하는 자세가 있다면, 우선 성별 분업에 따른 수혜자로서의 위치를 확실히 인지하는 것이다. 거기서부터 무엇을 어찌 바꿀지 진짜 고심해야 한다. 그런 모습에서 아들이 보고 듣고 배울 수 있을 것들이 그나마 생길테다.

 

여성이 여성의 위치를 알고 이를 말하기 시작할 때, 그것은 여성으로 남아있겠다는 의지가 아니다. 지금, 여성의 위치에서 말하고 쓰면서 오히려 그 여성을 넘어서고자 한다. 마찬가지로 남성들도 자신의 위치를 제대로 인식하고 시작할 때, 특히나 수혜자인 만큼 더욱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행동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퇴근한 아내가 청소기를 돌리는 동안 남편이 소파에 앉아 잠깐 발만 들어 올리는 행동이 꼴 보기 싫은 이유는, 그가 몸을 나태하게 두어서만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고자 한 파트너와의 관계를, 그리고 스스로를 성찰하는 일에 나태하기 때문에 그렇다.

 

제발 스스로 살림하고, 더 나아가 남을 돌볼 수 있는 일을 찾아내기 바란다. 무조건 몸으로 직접 실천부터 해야 한다. 자고로 생각은 몸을 움직이는 데서 발전하는 법이니까. 그럼 아들이 보고 배우고 고민할 것이고, 딸의 세상이 바뀔 수 있다. 아빠의 아들 성교육이라면 이것 말고 또 무엇이 더 있을지 아직 모르겠다.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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