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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한 세상, 포르노그래피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13. 구글에서 젖소 찾기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인터넷 검색창이 보여준 것

 

“엄마, 나 인터넷 검색 좀 도와줘. 탐구보고서 써야 해.”

 

아이가 숙제를 해야 한단다. 아직 키보드를 능숙하게 사용할 줄 몰라서 검색을 해야 하는 숙제는 엄마찬스를 사용하고는 한다. 이번에는 사진들도 많이 프린트해서 붙여야 하니 프린트도 켜두라 명한다. 아들의 분부대로 프린트 전원도 켜놓고, 구글 검색창에 단어를 넣을 준비까지 마치고 물었다.

 

“뭘 검색할건데?”

“젖소!”

 

▲  초딩아들이 작성한 젖소 탐구일지.   © 김서화 
 

일전에 낙농체험을 하면서 치즈를 만들고, 이를 활용해 피자를 만들어 본 경험이 진하게 남았는지 한동안 젖소 타령이다. 나는 검색창에 단어를 쳤다. 그리고 녀석보다 빠른 눈으로 창을 살피다가 잠시 주춤했다. 관련 검색어가 젖소 탱탱걸, 젖소부인, 디아 젖소방… ‘흠, 이건 생각 못 했네. 진짜 젖소를 찾는 녀석은 없냐’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아이가 상단에 ‘백과사전’이라는 단어를 보고 눌러보라고 요구한다. 위키백과에서 젖소를 설명한 몇 줄 안 되는 글을 옮겨 적더니 다시 되돌아가란다.

 

“엄마, 사진 필요해. 이미지 눌러줘.” “엄마, 저 사진, 이거, 저것도. 우유 담는 그 기계는 없나?” 하면서 이제는 제가 마우스를 뺏어 스크롤을 내린다. 스크롤 두세 번을 내리니 사진의 맥락이 달라진다. 그러자 녀석도 잠지 주춤. “엑, 왜 젖소에 이런 누나들이 나오지?” 녀석이 얼결에 마우스를 놓는다. 나는 조용히 마우스를 가져와 스크롤을 슬그머니 올렸다.

 

“젖소를 다른 의미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그래.”

“무슨 의미?”

“젖소에 다른 의미가 있다기보다는, 정확히는 가슴 큰 여자들에게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사람들이 있는 거지.”

아들은 내 말을 이해하겠다는 표정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어중간한 표정이었다.

“일단 네가 쓸 만큼은 찾았지? 사전이나 더 찾아보자.” 몇 장을 프린트하고는 구글 이미지 창은 닫았다.

 

지난 번 ‘링컨’과 ‘에디슨’을 검색할 때는 이런 일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대비를 하지 않았다. 나는 일반 포털 검색보다는 구글 검색을 활용하는 편이다. 쓸데없는 광고에 현혹되지 않고 보다 적확한 자료들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일로 몇몇 한국어 단어들의 ‘적확함’이 내가 생각하는 것과 다른 것일 때도 많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는 아이엄마한테 이야기했더니 젖소는 양반이란다. ‘여동생’이나 ‘옆집’ 같은 단어는 절대 구글에서 검색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여동생? 괜스레 ‘sister’와 비교 검색까지 해보고 짜증만 잔뜩 났다. 그렇지만 나의 구글 검색에 대한 신뢰는 더 높아졌다. 그 사회에서 어떤 단어를 통해 얻고자하는 정보 혹은 그 단어를 둘러싼 욕망들이 무엇인지를 정밀하고도 진솔하게 포착한달까.

 

스마트폰, 새로운 매체가 두려운 부모의 심정

 

아이의 삶 중 내게 불안감을 일으키는 것이 있다면 나로서는 알 수 없는, 다루기 힘든 매체의 확산과 그 매체를 통해 전해지는 정보들의 예측 불가능함이다. 그야말로 초고속 스마트한 세상이기에.

 

초등학교 고학년만 되어도 스마트폰을 갖게 된 아이들은 카톡과 페이스북, 트위터로 소통한다. 유튜브에 채널을 만들어 자신들의 노는 모습, 게임하는 장면, 먹는 모습 등을 찍어 올리기도 한다. ‘야한 영상’을 보고 싶어서 보는 아이들보다는 페이스북에서 누군가가 누른 ‘좋아요’ 때문에 보게 되는 아이들이 더 많다. 단체 카톡방에서 어떤 녀석 한명이 장난삼아 음란물을 하나 보내기라도 하면, 결국 한반 아이들 거의 다 보게된단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들이 사용하게 될 새로운 매체들과 그 매체들이 전할 ‘음란한 정보’들에 대해 깊은 우려를 가지고 있다. ‘여동생’ 검색만 해도 이 모양이니 우려는 너무도 진심이다. 각자의 방식으로 이를 차단하는 방법들이 즐비하다. 나만해도 컴퓨터는 나와 함께 있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고, 인터넷 보안이 걸린 2g폰을 쥐어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들 녀석은 여기저기서 보고 싶은 것, 안보고 싶은 것, 죄다 보고 듣고 경험할 것이다. 왜 안 그럴 것이며, 또 나는 뭘 어쩌겠나. 기껏 매체를 차단하는 방법은 당장 간편해 보이기는 하지만 확실히 비효율적인 일이다. 그저 내 마음 편하자고 벌이는 일 같다.

 

사람들은 스마트폰과 같은 매체 자체가 음란물과 직결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정보 전달의 속도나 새로운 방식 때문에 성인들도 적응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마치 스마트폰이 없고, 인터넷에 접속하지 않으면, 음란물로부터 안전할 것만 같은 착각 속에서 아이들의 손에서 새로운 매체를 수거해간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이제 스마트폰과 인터넷은 타자를 만나기 위한 필수품이다. 반발이 크다. 매체를 차단하려 할수록 아이의 불만은 커지고, 부모의 의심은 늘어간다.

 

많이들 ‘그래도 우리 때와는 달리 워낙 전파 속도도 빠르고 영상들도 노골적이니까 적당히 관리해야지’라고 말한다. 언제나 이전 세대보다 이후 세대가 더 빠른 매체를 접하지 않았나. 그리고 그 ‘적당히’라는 말 자체가 불안의 씨앗인지도 모른다. 사실 매체는 죄가 없다. 음란물을 전하지 않는 매체, 그런 상황이 가능할까? 어쨌든 핵심은 매체가 아니라 내용, 음란물 혹은 포르노그래피이다.

 

외설스러움은 그 자체만으로 폭력적인가?

 

아이에게 음란물은 “상당히 왜곡된 것들이야. 거짓이지. 그러니 보지 않는 게 좋다. 그건 정말이지 현실과 매우 다르다는 걸 꼭 알고 있어야 해”라고 말하면 좋다고 한다. 물론 나도 그렇게 말해주고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아들이 툭! “아, 안 봐. 그런거. 대체 뭐가 어떻게 다르길래?”하는 순간, 문득 내가 손도 대지 않고 코 풀려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 딴에 성교육이랍시고 자못 그럴싸하게 잔소리만 하고 정작 고민은 오로지 아이 몫으로 넘겨버린 셈이다. 아이는 왜, 무엇 때문에, 누구에게, 언제, 어떤 행위는 현실이고 혹은 왜곡이라는 것인지 결국 각자도생으로 알아내야 한다. 하물며 보지도 않아야 하면서…. 즉, 음란물 탓만 하면서 아이에게 ‘그것 나쁘니까 보지 마!’ 해버리고 나면, 할일 다 한 것만 같은 착각을 하게 된다는 말이다.

 

정신 차리고 보니 ‘그러게, 음란물은 왜 문제가 되는 걸까?’로 시작한 물음들이 이어진다. 모든 잘못된 성인식이나 성폭력의 원인은 바로 이 ‘음란물’ 혹은 ‘포르노그래피’ 혼자서 뒤집어쓰고 있는 것만 같다. 이것만 보지 않으면 정말 끝일까? 그러니 유독 음란물을 ‘쉽게’ 접할 수 있는 새로운 매체들이 더욱 문제시된다.

 

음란물이 다른 유형의 콘텐츠들과 차별점이 있다면 그것의 노출 수위에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성에 대한 편견과 그릇된 행동들은 벌거벗은 몸들을 봤기 때문이 아니라 그런 몸들의 어떤 맥락, 스토리에 있지 않을까? 외설스러움은 과연 그 자체만으로 폭력적인 것인가? 외설스러움은 언제 폭력이 되고 언제 그렇지 않을 수 있을까?

 

일상 속 포르노그래피

 

‘아들에게 포르노를 보여주자’ 따위의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포르노 같이 보면서 하나하나 따져, 알려줄 것도 아니라면(이렇게 하자는 말도 물론 아니다) 그것의 잘못된 부분들은 언제, 어떻게 얘기할 것인가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고 보니 사실 예제들은 널려있었다. 일상이 포르노랄까.

 

여기서 많은 이들이 한 가지 오해를 하는 것이 있다면, ‘노출’에만 포인트를 맞출 때이다. 어린 가수들이 너무 옷을 헐벗고 나온다든지, 드라마에 성관계 장면이 너무 많다든지 하는 식으로 말이다. 노출 자체는 외설적일 순 있어도 그것만이 폭력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듯하다. 오히려 일상 속에서 의심해야 하는 것들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포르노적 ‘관계’다. 젊은 여성이 아무리 짧은 스커트를 입고 TV화면에 나온다 해도 문제는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의 속사정에 있지, 그녀 치마 속에 있지 않다.

 

모든 아름다움이 맥락적이듯 폭력이야말로 하나의 스토리를 가진다. 그리고 둘 다 홀로 그러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다. 유독 관계 속에서 그 의미가 확실해지는 것들이다. 그래서 아무 맥락 없이, 노출된 성기들이 클로즈업 된 포르노는 진정 무의미할 때도 있다. 반면 훨씬 많이 보는 광고, 뮤직비디오, 드라마, 신문, 하물며 교과서(아, 교과서!) 무엇보다 주변인의 말과 삶… 이런 모든 우리 삶을 에워싸고 있는 매체들이야말로 아름다움과 폭력에 대한 ‘스토리’를 직접적으로 전달한다. 그런데 매일 접하는 스토리들 중 성차별적이고 폭력적인 것들이 얼마나 많은가.

 

책 육아가 그토록 유행이라지만 좋다는 그림책, 대단한 문학 작품 안에서도 성차별하고 인종 차별하는 그러나 고혹한 문장, 나 많이 봤다. 숱한 드라마에서 타인의 의견을 깡그리 무시하는 행동들이 관계를 리드하는 것이고 게다가 로맨스로 치장된다. 갑작스레 덤벼들며 억지로 키스하는 것은 열정이지 폭력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없다.

 

수많은 뮤직비디오들은 강간 상황을 성적 관계인 것 마냥 은유하기도 하고, 곁들여 주먹다짐하고 피가 튀는 장면들을 양념처럼 곁들인다. 온 세상 사람들을 패고, 죽이면서까지 사랑하는 한 여자만을 향해 달려가는 뮤직비디오나 드라마 속 지고지순한 남성은 과연 그 여자를 정말 안 때릴까 의심된다.

 

뉴스들은 성폭력 사건 속 피해자들의 신상을 뒤지고, 이를 보며 집안 어른들은 ‘아유, 저렇게 살았으니 저런 일을 당하지. 너도 행동 조심해’ 라며 ‘여동생’에게 추임새를 넣는다. 그리고 그런 여동생 사진을 찍어 올리고 구글에서 검색하는 사회에서의 성인식이란 어느 수준인가.

 

‘궁금하겠지만 그냥 참아!’는 답이 아니다

 

성적 관계의 ‘폭력성’이 단지 ‘삽입’에만 있는 것이 아니듯이 그런 상황에 이르는 단계, 단계의 스토리를 제공하는 것은 단지 성행위만을 묘사한 외설적인 음란물, 포르노그래피 혼자 저지르는 짓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어떤 새로운 (대개는 부모가 잘 모르기 때문에 차단하고자 하는 마음이 더 큰) 매체에 과한 탓을 할 필요가 없다. 내가 잘 다루고, 이미 함께 하고, 너무 많이 접하게 되는 그 매체에서 드러나는 성차별적 인식과 폭력적 관계를 미화하는 상황들을 늘 의심하면 된다.

 

음란물을 보지 말라거나, 그것은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면 적어도 일상 속에서 그 ‘잘못’의 힌트는 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궁금하겠지만 그냥 참아!’라고 하는 것과 같다. 그 궁금증에는 성적 호기심도 있겠지만 더 중요한, 타자에 대한 호기심도 있다. 아이가 음란물을 봤다는 것, 보고 싶어 한다는 것을 우린 너무 저렴하게 취급해왔던 것 같다. 아이들은 그 무엇보다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가장 가깝고 가장 진하게 만날 때는 어떻게 하는지 궁금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도 일상 속에 널린 불평등한 관계나 시선들에 대해 의심하고 있다면 좋을 것이다.

 

타자를 만날 때의 기쁨과 슬픔, 배려와 의무에 대한 사례를 미리 수집하고 있다면 포르노그래피를 본다 해도 아이는 나름의 판단을 할 것이다. 헐벗은 몸들의 충격을 떨쳐낼 수 있는 힘은 그런 몸들에 투여된 시선들을 읽어낼 능력에서 나오지 않을까. ‘창녀처럼 옷 입고 늦게 다니는 애들이 성폭행 당한다’는 말 혹은 ‘남의 말 무시하고 제 욕망만 중시하는 애들이 성폭행한다’는 말을 듣고 자란 아이 둘이 똑같은 포르노를 본다고 같은 생각과 행동을 할 것이라고 여겨지진 않는다.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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