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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가 야동을 본 것 같아요, 어떡하죠?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12. 당연한 것과 의심해야 할 것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참으로 부자연스러운 ‘자연스럽다’는 말

 

“아이가 자위를 해요, 야동을 본 것 같아요. 어떻게 하죠?”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마시고, 아이를 너무 꾸짖지 마세요. 자연스런 성에 대해 대화를 시작하세요”, “혼내거나 질책하지 마세요. 자연스러운 성장 과정의 하나입니다.”

 

흔한 질문과 익숙히 들어온 대답이다. 그래, 성을 금기시하거나 아이의 호기심을 질책함으로써 괜한 오해를 만들지 말자. 자연스럽게 해야지. 그래야지! 이리 다짐해본 엄마들이 얼마나 많던가. 그러면서도 동시에 수심 깊은 얼굴이 되어 “아휴, 어려워” 한다. 바로 그 ‘자연스럽다’는 말의 한없이 가벼운 무게감에 짓눌리는 것 같다. 성은 자연스러운 거라니 더 물어보면 민폐려나? 너무 당연한 것을 물어보면 바보취급 당하듯이, 대답을 듣고도 의문과 기대가 번갈아가는 눈동자들을 굴렸지만 쉬이 더 질문하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이럴 때 ‘자연스럽다’는 말은 어쩜 그리도 부자연스러운지. 다들 제각각의 이해로 마감한다.

 

“맞아, 별거 없어. 우리도 그런 것 몰랐는데도 다 애 낳고 잘 살잖아. 자연스럽게.” 이런 사람들을 보면 자연스럽다는 말이 무지해도 된다는 말인가 싶고, “자연스러운 건데 뭐, 때 되면 지가 안보고 안하겠지. 그냥 내버려두면 돼.” 이런 말을 들으면 자연스럽다는 것은 방관에 대한 변명인가 싶기도 하다.

 

사실 ‘어떻게 하죠?’라며 잔뜩 걱정을 품은 질문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아이의 행동을 ‘자연스럽게’ 바라볼 수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그러니 자연스럽게 대하라는 진짜 의미는 누구를 향해야 할까.

 

아이는 이미 자연스럽다. 너무도 자연스레, 자기 몸을 궁금해 했고, 만져봤고, 그 반응을 느끼는 중이었고, 아무도 알려주지 않으니 야동도 찾아봤다. 혹은 우연히 봤는지도 모르지, 자연스럽게. 그 자연스러운 순간이 부자연스럽게 된 것은 부모인 내가 그 장면을 목도한 그 순간부터일 것이다. 그러니 ‘그건 자연스러운 일이야, 괜찮다’라는 말을 아이에게 한다는 것은 참으로 어불성설이다. ‘앗, 나는 자연스레 성을 누리는 네가 안 자연스럽지만 성은 자연스럽다고 하니 그래, 나는 아니, 너는 괜찮다.’ 뭐, 이런 비몽사몽의 느낌?

 

인간은 그 무엇보다도 몸을 통해 살아가고, 자신의 정체성을 형성해 간다는 점에서 아이의 행동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충실한 모습이기도 하다. 자, 그럼 난 왜 자연스러운 성활동을 보고도 당황하는가.

 

애초에 이 질문은 아이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자 훨씬 편해졌다. 나를 둘러싼 ‘자연스러움’이라는 단어를 한 겹 까보는 시간을 갖는 것으로 방향을 바꿔봤다.

 

남자아이의 성욕은 ‘당연해’, 그럼 여자아이는?

 

가장 어려운 일은 자연스럽다는 말과 당연하다는 말을 구분해야 하는 일이었다.

 

세상은 젠더, 성,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만큼은 무지막지할 정도로 ‘당연’한 인식들의 포화를 쏘아댄다. 그 공세에 눌려 자연스러움과 당연함이 동일한 것처럼 여겨지는 순간이 너무 많다. 자위하는 아이를 보고 당황하는 이유는 ‘당연히’ 아이들은 성적 주체가 아닌 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운 성이란 남녀노소, 계급과 인종 등을 불문하고 모든 인간은 성적 주체임을 ‘그저’ 인정하라는 차원에서 하는 조언이다.

 

여기까지 오면 그나마 ‘맞아요, 우리가 제대로 배워보지 못해 나 스스로도 성을 자연스럽게 대면하지 못해서 잠시 놀랐던 것 같아요. 그러니 더욱 우리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성을 대하면 좋겠네요’ 라며 마무리된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난 이 말을 곧이들을 수가 없다. 왜냐하면 정말 모든 아이들에게 ‘공평’하게 그 자연스러움을 ‘그저’ 기대하는 경우는 거의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즉, 자연스러운 성을 인정받고 성적 주체로서 용납되는 아이들은 한정적이다.

 

‘아이가 자위를 해요, 야동을 봐요’라고 질문하는 경우 대부분 아들 둔 경우다. 딸아이라면 성별을 감추고 질문하거나, 쉬이 상담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걱정이 차고 넘쳐서일 수도 있고, 완벽히 없던 일로 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당연히’ 성적 호기심은 남자아이의 것이라고 여긴다. 반면 여자아이들은 흔히 성적 욕망이 없는 것처럼 대한다.

 

우리는 아이들의 성적 호기심에 대해서마저도 엄청나게 불공평한 잣대들을 들이댄다. 여자아이와 남자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 적극적인 아이와 내성적인 아이, 비장애인 아이와 장애인 아이, 정상가족에서 자라는 아이와 그렇지 않은 아이. 아이들의 삶의 조건과 상황은 어른들의 그것만큼이나 다양하고 복잡하다. 아이들이 무성적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는 것도 어렵지만, 인정한다하더라도 그때 겨우 상상되는 것은 ‘정상’인 남자아이의 경우가 가장 흔하다.

 

그렇다 보니 ‘자연스러운 성’이란 고작해야 ‘그래, 사내들이 성적 욕망 생기는 거 당연하지. 크리넥스 좋은 거 사주고. 들어가기 전에 꼭 노크 해야겠어’ 라는 수준의 해결로 끝난다. ‘그래, 그 나이 여자애들 얼마나 궁금해 하겠어. 손 세정제도 좋은 것 좀 사주고, 방에 함부로 들어가지 말아야겠어’ 하는 부모, 거의 본 적이 없다.

 

이제 갓 처음 한두 번 자위를 해봤을 뿐인 아이에게도, 남아의 성적 욕망이란 본능이므로 이에 무력해도 된다는 허용이, 여아의 성적 욕망이란 부인되거나 무시되어야 한다는 압박이 전해진다. 정말 우리는 아이들 모두에게, 똑같은 기준에서 ‘인간에게 성적 호기심과 욕망은 자연스러운 일이야’ 라고 말하고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적어도 누군가는 성적 주체로 인정하지만 누군가는 아니라고 말하는 셈이다.

 

아이에게 자연스런 성을 알려주라는 말, 기존에 당연시 되는 것들을 전수하라는 말이 아니다. 아이를 성적 주체로 인정함과 동시에 그러기 위해서라도 당연한 것들을 끊임없이 의심할 때가 왔다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 이미 규율화 된 나의 규범들, 가치들을 의심하지 않으면 나는 ‘당연하게’ 그런 것들을 일상 속에서 체현할 것이고, 아이는 보고 배우겠지.

 

▲  아이들이 순수해 보인다면 사회적 규율에 덜 포섭되었기 때문일 거다. ©unsplash.com By Sebastian Pichler 
 

내가 아이보다 ‘후지다’고 느끼는 순간들

 

작년에 아이 책가방이 찢어져서 새로운 가방을 사야했다. 인터넷으로 적당한 가방을 골라 아이에게 맘에 드는지 물으며 화면을 보여줬다. 나는 당연히 아들 녀석이 짙은 파랑을 고를 것이라 생각하고 “너 이 색 살 거지? 주문할게”하며 버튼을 누르려 했다. 그 순간, “무슨 소리야. 그거 완전 칙칙해. 나 이거 살 거야”하며 형광 노랑을 고르는 것 아닌가.

 

며칠 전에는 아들의 사생활을 캐 볼 요량으로 “요새 좋아하는 애는 누구야?”하고 물었다. 아들은 매일 우리 집에 놀러 와서 출근도장을 찍는 같은 반 남자아이 이름을 댄다. “아니, 좋아하는 애 없냐고, 작년에는 OO 좋아했잖아”하고 나는 여자아이 이름을 댔다. 아들은 잠시 갸웃하더니 “작년엔 그랬는데 요새는 XX랑 제일 친한데? 왜? 안 돼? 꼭 여자애 이름 말해야 돼?” 한다. 아, 항상 내가 아이보다 후지다. 이렇게 후질 수가 없다.

 

아들이 야동을 보는 장면을 직접 목도한다면 난 분명 당황할 것 같다. 어찌 그러지 않을까. 사생활이잖아. 그래서 그런 날이 오기 전에 미리 물어본 적이 있다. 녀석이 “야동? 야구동영상? 아니면 거시기한 거?”하고 키득키득 대며 대답하는 것을 보니 보긴 봤구나. “어때? 무슨 내용이야?” 물어보니, 아들의 대답. “그게... 내용이... 있는 건가?” 아, 나의 멍청한 질문이라니. 도덕적 잔소리를 잔뜩 생각해 놨었는데, 그날은 나의 멍청함 때문에 포인트를 살리지 못하고 피식 웃고 넘어갔다.

 

언젠가는 드라마를 보다 “나중에 며느리 보면 저런 시어머니 되지 말아야지” 하니 아들이 “나 결혼 안 할 건데” 한다. 부지불식간에 나는 또 너무도 당연하게 녀석이 결혼할 것이라 생각하고, 하물며 시어머니(세상에!)가 될 상상까지 해버린 뻔한 엄마다.

 

아이들이 순수해 보인다면, 사회적 규율에 덜 포섭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 나는 이미 이 사회의 억압과 금기를 몸소 체현하고 있다. 머리로 생각하고 책을 읽어봐도 쉽게 변하지 않는다. 아이의 순수함에 쉬이 선과 악을 대입하기도 어렵다. 그런 것이야말로 기준, 규칙, 금기, 억압이라는 단어들을 통과한 후에 가능한 것들이니 말이다.

 

아이들의 호기심, 말과 행동은 항상 예측불허하고 그래서 당혹스럽다. 그때가 바로 내가 체현하고 있는 규범들을 재확인하는 순간이다. 그냥 당연하게 그러려니 하면서 살아오다 앗!하고 원치 않게 마주하는 순간.

 

서로의 구식 사고방식을 놀려대고 저항하며

 

아이를 규율시키는 일은 필요하다. 다만 규범을 반복하는 찐한 계몽적 시도여야 할지, 같이 규범을 의심해보자는 가벼운 제스쳐여야 하는지 매번 갈등한다. 전자는 상대적으로 안정적이고,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후자는 막막하고, 나 스스로도 매번 땅굴을 파는 심정이 된다. 그 기준을 어디에 둬야 하는지 좌충우돌이다.

 

대단한 해법은 아니지만 난 그냥 그런 좌충우돌을 보여주기로 했다. 내가 의심하는 것 같이 의심하고, 녀석이 덜 규율되었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는 혜안에 감탄해주고, 나의 멍청한 말과 행동에 뒤늦더라도 솔직해지고, 아직은 기껏 그런 것. 초딩과의 대화라는 것이 단발적이고, 우왕좌왕에 참으로 포스트모던 한 형상을 하기에 이 녀석과 내가 뭔 짓 하는 건가 할 때가 태반이다. 그래도 ‘엄마아빠도 늘 고민한다, 혹은 정답은 없는가 보다, 적어도 성은 대화의 주제일 수 있다’라는 태도는 가 닿는 것 같다.

 

사실 녀석은 초딩 입학과 함께 충분히 급속도로 사회화되어 가고 있기 때문에 나만큼이나 후진 모습이 많다. 숏커트인 내 머리가 맘에 안 든다면서 긴 생머리를 하라는 둥, 사내가 태권도를 더 잘할 수밖에 없다는 둥, 여자들은 원래 의리가 없다는 둥, 이미 친구들과 사회로부터 구식의 사고방식을 충분히 흡수하고 있는 후진 녀석, 그래서 우린 서로 후진 꼴을 열심히도 놀려댄다. 서로 작고 큰 상흔을 내면서 사회적 편견에 소심한 저항을 하고 있다고 위안을 삼는다. 녀석이 가장 최근에 나에게 남긴 상흔은 잊히지 않는다.

 

하도 힘센 녀석 한명을 두려워하고 그 녀석 말에 넙죽 엎드리길래 “너는 그 녀석 말이라면 맨날 네, 네 하기 바쁘지? 네 생각을 당당히 말하고 싫은 건 싫다고, 하지 마”하며 심기를 좀 건드렸더니 거대한 반격이 들어왔다. “엄마는 할아버지한테는 네, 네, 네만 하고 맨날 할머니랑 부엌에만 있으면서...” 이토록 잔인한 녀석이라니.

 

당황은, 진정 자연스럽지 않은 그것은 늘 더 규범에 충실한 사람의 몫이다.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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