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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성을 의심하라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9. 젠더 흔들기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아들은 특히 젠더의 위계를 알아야 한다

 

아들들은 특히 젠더(gender: 생물학적인 성별 대신 사회적인 성별을 나타내는 용어) 위계를 알아야 한다고 말하면 “무슨 소리야. 얘가 무슨 힘이 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나부터도 힘없는 소시민인데, 이 녀석이 아들이어봤자지.” 라는 말도 많이 한다. 젠더 위계라고 하면 꼭 어느 개개인의 사회적 지위나 권력 여부만으로 협소화하려는 경향이 크다.

 

이 사회는 임노동 문제를 보나, 권력의 재편 구조 및 영향력을 보나, 남성성을 견지한 자들이 훨씬 안정적인 위치를 담보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아들이 딸보다 젠더 위계에서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곳에 자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두들 자신의 아들은 ‘안정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사실은 젠더가 안정적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회적 조건들이 열악할 뿐인데 말이다. 물론 젠더는 모든 사회적 조건들과 교차하며 작용하므로, 완전 일리가 없는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 그런지 전혀 반대의 이해들도 있다. 안정적 위치에 대해 마치 그것을 차지해야 한다거나, 유지하거나, 제대로 누리거나, 그 자리에서 선의를 가지고 동정을 베풀 수 있어야 한다는 식으로 오해하는 것이다. 개인의 ‘위치성’이라는 것은 차지할 수 있는 성질의 것도 아니겠거니와, 지난 칼럼에 말했듯이 이는 어서어서 권력을 획득하라는 인식과 괘를 같이 한다.

 

만약 아들에게 젠더 위계와 남성성의 안정적 위치에 대해 가르친다면, 그것은 이를 ‘거부’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 지지하는 것이라고 본다. 우스개 소리로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하면 “그래서 아들에게 치마라도 입히라는 거야?” 하면서 헛소리 취급하는 사람이 꼭 있다.

 

“여자애한테 맞고 울면 사내가 아니라고 놀려”

 

작년 요맘때쯤이었나. 샤워를 하고 나오는 아들 등짝에 연하게 멍이 있는 것을 봤다. 덜컹 가슴부터 내려앉아 어찌된 영문인지 물었다. 아들은 아무렇지도 않게 “어, 멍까지 들었네. 어쩐지 진짜 아프더라. 하마터면 울 뻔했다고.” 이러고 마는 것이다. 참고로 우리 아들이 ‘울 뻔했다’고 말하는 건 엄청 이상한 일이다. 왜냐면 이 녀석은 원래 잘 우는 녀석이니까. 그런데 요 녀석이 울음을 참았다? 멍이 들 정도였는데? 네가?

 

자초지종을 들으니 같은 반 여자친구 OO이가 때린 흔적이었다. “아, 엄마 근데 걔 힘 엄청 세더라. 되게 아프더라고.” 근데 반응이 너무 쿨하다. 요 녀석 봐라. 남자친구가 때렸다면 하교와 동시에 나에게 이르고도 남았을 녀석이. (아들은 덩치가 워낙 작다 보니 힘에서 많이 밀리는지라 힘 겨루기에서 지면 엄마에게 이르고, 선생님에게 이르는 것으로 균형을 맞춰놓으려고 수를 쓴다.)

 

아팠을 텐데 왜 아무 말 안 했는지 물었다. 그러자 요 녀석의 대답은 그 흔해 빠진 “아이, 엄마! OO이는 여자잖아!” 이럴 줄 알았다. 너 딱 걸렸어. 아들은 “아, 싸!내!가. 여자애한테 맞고 아프다고 하면 다들 안 놀아 줄 거야.” 한다. 너, 언제부터 사나이를 ‘싸!내’라고 힘줘 발음했냐?

 

“여자애한테 맞으면 친구들이 안 놀아준다고?”

“아니, 맞는 건 어쩔 수 없다 쳐도, 여자애들도 엄청 때려, 엄마! 근데 싸내는 맞고 아프다고 하면 안 되는 거라고.”

“너 남자인 XX가 밀기만 해도 아프다고 말하잖아. 너 XX한테 맞은 게 아퍼, OO이한테 맞은 게 더 아퍼?”

“XX는 남자잖아. 그리고 아프다고 해야 걔가 대장인거지. 근데 여자애한테 맞고 울면 애들이 그런 건 싸내가 아니라고 놀려. 이번 건 좀 아팠지만!”

 

초등 2학년만 되어도 사내가 되지 못한 놈은 친구들과 놀 수 없고, 사내가 되기 위해 맞아도 눈물을 삼킨다. 하물며 대장인 남자아이에게 맞는다면 적당히 아픈 척도 해줘야 대장의 권위에 먹칠을 안 한다는 것도 간파했다니.

 

그래서 ‘네가 생각하기에 사내란 뭔데?’라고 물어봤다. 처음에는 ‘내가 남자니까, 내가 싸내지.’ 라고 말하더니 금세 ‘아닌가? 글쎄. 잘 몰라.’ 하더니 자기도 궁금해졌는지 한참 눈동자를 굴린다. 가만히 기다려봤더니, 혼자서 중얼거리기 시작한다. ‘싸내는 잘 안 운다는데 난 잘 우는데? 싸내는 좀 힘세고 친구 많은 애들이야.’ 하기도 했다가 ‘그것도 아닌데, 절교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인가? 그럼 조폭 같잖아?’ 했다가 ‘아닌데, 싸내는 멋지고 좋은 건데.’ 선뜻 정의를 내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꼴이 웃겨서 한참 배꼽을 잡았다.

 

녀석이 사내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중에 “그럼 사내가 ‘아닌’ 건 뭐야?”라고 물어보니 이건 일각의 고민도 없이 대뜸 “그건 애들이랑 못 노는 거야. XX가 나랑 절교하자고 할 거라고. 그럼 그 날은 애들이 눈치 보느라 나랑 안 놀걸.” 이라고 말했다. (요새 애들은 절교라는 말을 너무 쉽게 한다.)

 

이런 경험은 아들 키우는 엄마라면 한번쯤은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요는 ‘여자아이도 힘이 남자아이만큼 세다’가 아니다. 또한 ‘남자도 여자에게 맞을 수 있다.’ 이런 것도 당연 아니다. ‘역시 사내는 사내다워야지’도 결코 아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사내란 사내가 아닌 것으로 채워진다는 사실 아닐까 싶다. 본인은 몰랐겠지만, 아이들은 감각적으로 알고 있었다. 하물며 자신이 남자로 태어났다 하더라도 그게 사내와 ‘직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감각까지도 있다. 애들은 친구들과 못 놀까 봐, 사내가 ‘아니면’ 놀림 받을까 봐 사내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아이들은 그런 식으로 사내가 아닌 것을 ‘여자애’라고도 하고, ‘기집애’라고도 한다. 요새는 초등학생만 되어도 ‘게이새끼’라고도 한다.

 

남녀, 누가 승자인가의 문제가 아니다

 

젠더 위계. 이 단어를 일상적으로 꺼내기에는 ‘젠더, 위계, 두 단어 다 노잼’이라는 거부의 장벽과 ‘혹시 너 페미?’라는 껄끄러운 시선의 산맥을 넘어야 한다. 개인적 경험이지만 젠더 위계라는 단어를 엄마들에게 꺼내면 크게 두 부류의 반응이 있는 것 같다.

 

첫째는 요즘 같은 시대에 그런 게 어디 있나. “아이고, 그래도 정말 평등해졌지. 똑같이 배우지, 능력 있으면 똑같이 대우받지. 이미 평등해. 나 정말 아들딸 똑같이 키우거든.” 이런 분들은 젠더 위계라고 하면 이를 ‘남존여비’라고 이해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남녀칠세부동석, 여필종부, 칠거지악, 삼종지도와 같은 단어를 떠올릴 때의 느낌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젠더 위계란 굉장히 구시대적이고 무지막지하고 비이성적인 대우라고만 여기며 현재는 작동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두 번째 부류는 전혀 반대로 젠더 위계를 단박에 인정한다. “맞아, 남자애들은 여자애들 정말 따라가기 힘들어. 요샌 수학도 여자애가 더 잘해. 까닥 엄마가 신경 못써주면 딸들한테 다 뺏겨. 아들들 나중에는 결혼하기도 힘들다는데.” 듣다 보면 이들에게 젠더 위계란 똑똑하고 야무진 딸들이 아들들 머리위로 올라온 지 오래라는 이야기다. 역차별, 과도한 남녀평등사상, 여성상위시대, 박탈당하는 남성, 고개 숙인 남자 이런 단어들을 자주 사용한다.

 

모두들 젠더 위계를 여자, 남자의 적대적 대결에서 누가 승자인가의 문제로 여기는 것만 같다. 마치 축구게임이라도 되는 것 마냥 이번 판은 우리가 이겼어, 혹은 무승부니 이쯤에서 만족하자, 뭐 이런 것? 사람들의 반응이 이렇다 보니, 단어의 이미지 왜곡이 심하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일단 젠더라는 단어에 들러붙은 ‘두 개의 쌍’이라는 이미지는 너무 막강하다. 이는 우리의 뿌리 깊은 이성애적 사고방식 때문에 그럴 텐데, 덕분에 ‘젠더’라는 단어에서 단순히 성기 모양에 따른 여자, 남자라는 성별 구분만을 상상하게 한다. 이에 여자=여성=여성성, 역시 남성성=남성=남자라는 심각한 오해의 시작인 이 도식이 덧대어진다. 살다 보면 거의 즉각적인 반응처럼 대입되는 도식이지만, 마찬가지로 살아가다 보면 이 연결들이 얼마나 허술한지 그 빗나가는 경험들을 더 많이 겪기도 하는데 말이다. 이런 이분법적 도식보다는 오히려 남성성과 여성성을 하나의 스펙트럼으로 그려보는 것은 어떨까 싶다.

 

‘남성성’에 갇히지 않도록

 

▲  <불편한 방>     © 정은의 빨강 그림판 
 

아들 키우는 엄마로서, 젠더 위계는 이것이 남성성에 대한 이해를 가능케 하기 때문에 더욱 중요하다. 젠더 위계는 정말 남자와 여자에 대한 것이라기보다 남성성과 그것이 아닌 것에 대한 이야기다. 정점에 ‘이상적 남성성’에 대한 관념과 실천, 태도 등을 정해두고 이에 권위를 부여하고 그것이 아닌 것들을 서열화하는 방식, 힘, 그리고 그것들의 결과 말이다. 이를 기준으로 많은 사람들은 어떤 역할이나 태도, 실천을 요구 받는다. 태어난 성별에 따른 강압을 받는 것은 여자들만의 일이 아니다. 실제 이상적이라고 상상되는 남성성을 완벽하게 구현하는 실체적 인간을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남성성에 대한 출중한 연구를 한 레윈 코넬(Raewyn connell)에 따르면, 젠더 위계의 가장 정점에는 헤게모니적 남성성이 있고 그 하위에 공모적 남성성, 종속적 남성성, 주변화 된 남성성들이 있다고 한다. 물론 이런 남성성은 전반적으로 여러 여성성보다는 높은 위계에 있지만, 어떤 남성성은 어떤 여성성의 하위에 있기도 하다. 각 남성성 사이에서도 대립이 있고, 여성성과 남성성 사이에 상호 공동의 이해관계가 없지도 않다.

 

무엇보다 이런 연구는 주어진 삶의 방식에서 섹스-젠더의 이름으로 선택할 수 있는 길이 생각보다 다양하고 유동적일 수 있다는 희망을 준다. 우리는 늘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이미 해왔고, 의도하지 않아도 비껴갈 수 있다.

 

사내가 되기 위해 울음 한 번 참고, 안 아픈 척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사내가 되라는 강압은 점점 더 커질 것이다. 사내가 된다는 것은 사내가 아닌 것을 놀리고 절교하는, 나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어떤 타인에게 무자비 할 것을 대가로 치러야 한다.

 

사내다움에 대한 강압과 억압의 힘을 거부해도 된다는 것을 알려주는 않는다면, 다른 여러 경로가 가능하다는 걸 조언해 주지 않는다면, ‘남성성’의 안정적 지위에 공모하면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타자화하고, 위태로운 곳으로 내몰라고 할 수밖에 없다. 남성성의 이상향을 달성하고자 고단해 하는 당사자뿐만 아니라 이와 결부되는 타자 모두 젠더 위계 속에 갇히게 하는 일이다.

 

딸에게는 일찍이 여성성을 의심하라고, 젠더로부터 억압당하며 살지 말라며, 전과는 다르게 키워보려는 엄마들이 많다. 그런데 아들에게 남성성을 의심하라는 부모는 흔치 않다. 그만큼 남성성을 거부하거나 ‘다른’ 남성성을 선택한다는 것은 젠더 질서에 대한 저항이다. 그 저항이야말로 젠더 질서를 흔들 수 있고, 그건 공히 젠더를 둘러싼 모든 인간들에게 해방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런 감각을 키워주는 것이 성교육의 일환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젠더 문제란 바로 이 젠더 위계에서부터 시작할 테니 말이다.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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