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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의 맛을 아는 아이들
<초딩아들, 영어보다 성교육> 8. 권력과 폭력 

 

‘아들 키우는 엄마’가 쓰는 초등학생 성교육 이야기가 연재됩니다. 필자 김서화 씨는 초딩아들의 정신세계와 생태를 관찰, 탐구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편집자 주]

 

 

권력과 폭력에 대해 아들과 자주 대화를 하려는 편이다. 대화라고 해 봤자 별난 것도 없지만, 우리집 초딩 아들이 그저 ‘힘’, ‘권력’ 이 두 단어만 등장하면 습관적으로 “헐, 짱인데!”를 연발하기 때문이다. 요새 애니메이션은 악당들이 나름의 사연을 가지고, 멋스런 외모를 한 채 그럴 듯한 힘을 활용하기에, 녀석에겐 ‘악당’이 히어로일 정도다.

 

아들 둔 엄마들은 사내 녀석들의 이런 ‘취향’ 때문에 서로 고민상담도 종종 한다. “이거 그냥 나둬야 해, 맨날 지적하면서 잔소리라도 해야 해?” 이러면서 말이다. 아들 녀석의 일거수일투족에 강박적일 필요야 없지만, 힘의 속성이나 관계 혹은 권력이라는 단어를 폭력이라는 단어와 늘 함께 엮어주려고 한다.

 

성교육 문제는 더욱 그렇다. 나는 성교육에서 남녀 해부학이나 생물학, 그리고 성적 행위에 대한 설명보다 비중을 두고 중요시해야 하는 것은 권력에 대한 가르침이라고 믿는다. 남녀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 그 신체를 벌거벗기고 이를 들여다보며 탐구하기보다는 차라리 남녀라는 두 음절을 둘러싼 권력의 베일을 벌거벗기는 게 훨씬 더 유익할 거라고 생각한다.

 

성폭력 사건에서 권력을 지우고 나면…

 

뉴스에서는 성폭력 사건을 오로지 여자와 남자의 성별 문제로 치환해서 다룬다. 폭력적이고 잔인한 방식의, 종국에는 이성애 남녀의 성적 행위로만 그린다는 말이다. 폭력 행위의 맥락은 점점 지워지고, 누가 누구의, 어디를 어떻게 얼마나 만지고 부벼댔는지 따위만 전면으로 등장한다. 이것이야말로 포르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노골적인 기사들이 얼마나 많은지 열거하는 것도 일이다.

 

성폭력에서 권력을 지우면 그저 누군가 다른 누구에게 성기 삽입했다는 사실 밖에 남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 법체계는 삽입이 없다면 아무리 폭력적인 성적 차별과 희롱을 해도 ‘폭력’으로 쉬이 인정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법으로 처리하지 않아도 되는 행위까지 법체계 안으로 끌어들여 고정화시키기도 한다. 정말이지 이럴 때 ‘섹스, 그게 대체 뭐라고?’ 묻고 싶다.

 

보수적인 성교육 담론들은 성문제를 권력과 함께 가르치지 않는다. 고작 인성론 운운하면서 이를 성교육으로 대체하려 한다. 설혹 성폭력을 권력과 연관 짓는다 해도 직장 내 상하 관계와 같은 매우 명백한 권력 관계만을 설명하고 젠더 위계는 설명하지 않는다. 돈 많고 성공한 유명인의 향락적 취향이 불러일으키는 부도덕한 행위 정도만 설명한다는 말이다.

 

처음에 아들을 위해 여러 성교육 서적들을 긁어 모으다가 일부 성교육 담론들이 기존의 성적 가치관과 편견을 유지, 재생산하기 위해 작용하기도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이는 지배 계급의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재생산하는 교육의 속성만 이해해도 알 수 있는 것이었는데 ‘성’교육은 좀 다를 줄 알았던 내가 안일했다.

 

아들에게 성교육을 해야 한다면 더욱더 보수적인 방식으로 가르치면 안 된다 싶었다. 성폭력이 단 하나의 사건이기보다는 그런 행위를 가능케 한 문화적인 풍토에서 나온 것이라고 여긴다면 더욱 그렇다. 그리고 딸보다는 아들이 그런 문화의 혜택을 상대적으로 더 누리고 있다면 말이다.

 

즉, 문화와 가치관 자체를 의심하지 않는다면 그저 아들에게 현재의 관습과 가치관을 누리면서 이에 순종하고, 복종하되 좀더 젠틀하라고 말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서, 밥 차려’라고 말하는 남성에서 ‘오늘 저녁은 뭐야?’라고 부드럽게 물어보는 남성으로 변하는 정도를 기대할 거라면, 왜 작정하고 ‘초딩아들’을 붙잡고 이걸 해야 한다고 설파해야 하나.

 

그런 정도의 변화만을 기대하면서, 자신의 아들이 성적 가해를 할 수 있음을 고민하고 가르치려는 경우는 얼마나 될까. 그러니 성교육은 잘해야 피임 문제에서 마무리되고 폭력 문제에 대해서는 유야무야 마무리하다 결국 피해자 단속으로 종결되나 보다. ‘내 아들 일은 아닐 거야’라는 안일한 마음의 시작이며, 실제 아들의 가해사실을 접하게 될 때 ‘그럴 리가 없다’고 부인하게 되는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니 우회길이라고는 했지만 권력-폭력과 같은 단어를 두고 아이와 끊임없이 대화하는 것은 단순 우회길이 아니다.

 

‘권력을 가지면 네 마음대로 할 수 있어!’

  

▲   [어린이 납치구역]  © 일러스트_ 천정연 
 

하지만 요즘은 아이들에게 권력에 대해 이상하게 가르치는 풍토가 만연한 것 같다. 이때에 등장하는 단어는 욕망해야 할 단어이지, 관찰하거나 경계하거나 주의해야 하는 단어가 아니다. 그러니 권력이 폭력이라는 부정적인 단어와 결부되는 경우는 더욱 흔치 않다.

 

요새 육아서들은 초등 시절의 중요성을 다소 과도하게 설파한다. 물론 나도 이런 시대적 흐름에 따라 이 시기를 가장 중요하다고 할 것이지만. 모두들 이 시절이 아이의 인생 전체를 주조하는 기간인 듯 말한다. 이유는 명백하다. 그 시절 다져놓은 기본기가 중고등학교 시절의 공부 습관을 좌우할 것이며, 그 힘으로 유명 대학에 들어가 성공한 인생을 살라는 것이다.

 

왜 좋은 대학에 가야 하냐고 아이들이 물을 때는, 세속적으로는 돈을 많이 번다거나 좋은 직장을 가지기 위해서라고 말한다. 보다 추상적으로는 그래야만 진정 원하는 것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말해준다. 권력을 가질 수 있는 가장 좋은 경로를 택하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이런 부추김으로 아이에게 전하는 바는 ‘권력을 가지면 네 맘대로 할 수 있다, 혹은 해도 된다’이다. 실제 요즘 공부 좀 한다는 녀석들의 또래 친구들에 대한 폭력적 언사들은 내 학창시절의 그런 녀석들의 ‘잘난 짓거리’하고는 상대도 되지 않게 가혹하고, 악랄하고, 악독하기까지 하다. 이런 시대 흐름 속에서 성폭력에 대한 감수성을 길러줄 주장 따위는 낄 틈도 없다.

 

아니라고들 한다. 그저 이 험난한 세상에서 아이의 안전과 위험을 제거해 주려는 것이며 부모 입장에서 자식이 좀 편하게 살길 바라는 마음이라고도 한다. 사람들은 내 자식은 살아남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 가장 좋은 위치에 서야 하며, 지금부터 미치도록 달려야 한다고, 딴 생각 말고 엄마아빠가 시키는 것만 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가끔 ‘노블리스 오블리쥬’(noblesse oblige, 귀한 신분에 따르는 사회적 책임)를 가르친다. 예의 바르고 인성 좋은 권력자로 거듭나 너무하다 싶을 때 큰 선행을 한 번씩 베풀면 된다는 말인가. 그러나 이때 사람들의 진심은 오블리쥬에 따옴표를 두지 않고 노블리스를 향해 있다. 뭔가 뒤틀어진 욕망이 그득그득해 쉬이 육아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쉽지 않고, 육아서를 펼치는 게 두려움이 되기도 한다.

 

아이들이 폭력의 대상을 누구로 선정하는가

 

또래 성폭력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쉽게 이런 문제는 오로지 성적 호기심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 믿어버린다. 그래서 그토록 ‘호기심’이 문제라는 주장들이 나오는 것이다. 성적 호기심을 자극할까 봐 유독 남자아이에게는 성교육을 ‘늦게’하고 싶다는 흔한 주장들도 이에 해당한다. 호기심이 없으면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란 건가? 심하게는 이미 발생한 성적 호기심은 그 따위 방식으로 해결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인가?

 

또래 성폭력의 동기는 호기심을 해결하려는 욕구에 있을 테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호기심을 어떻게 해결하려 했던가에 있다. 그래서 또래 성폭력 사건에서 가해아이가 폭력의 대상을 누구로 선정하는가를 주의해야 한다. 아이들은 정확히 권력적 속성을 활용한다. 너무 전형적이라 놀랄 만큼.

 

왜 고학년 남자아이들이 저학년 여동생이나 그 친구들을 가해할까. 같은 학년이라면 왜 다소 어눌한 친구를 성적으로 괴롭힐까. 왜 지지자(어른이건 또래친구건)가 별로 없는 친구를 괴롭히겠는가. 남자아이들 중에서도 성적 희롱을 당하는 녀석은 그 또래에서 권력의 취약점에 있는 녀석이지, 리더가 당하는 법은 없다. 리더가 당했다면 그 녀석 무리들은 현재 권력 교체기에 있을 것이다.

 

아이들은 ‘누가’ 약한지, 누가 ‘언제’ 약한지, 어떤 조건과 상황이 될 때 내가 강자가 되는지 정말 귀신같이 안다.

 

그러므로 아이들의 성적 호기심에 부모와 같은 주 양육자, 학교 선생님들이 당황하지 말고 이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하는 게 첫째다. 둘째는 자신의 문제를 약자를 대상으로 해결하는 방식의 비도덕성에 대해서도 알려줘야 한다.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문제는 언제든 발생할 수 있다.

 

지난 칼럼에서 말했듯이 많은 어른들은 아이의 성적 호기심에 담담하게 대처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당혹감과 우물쭈물, 붉으락푸르락, 민망함에 윽박지르기, 알려줘야 뜬 구름. 이런 어른들의 태도 앞에서 아이들은 성적 호기심은 드러내면 안 되는구나, 뭔가 조용히 알아내야 하는구나 생각한다. 조용히, 어른들 몰래 해내야 하는 일. 일명 ‘나쁜 짓’은 어떻게 하겠나. 들키지 않을 녀석 붙잡고 하는 거다. 내 행동이 들키지 않으려면 무조건 나보다 약한 놈을 잡아야 한다.

 

아이들은 이미 권력의 맛을 안다. 난 이걸 아는 게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권력의 힘과 권능에 대해서만 알지 그 외의 것을 배울 기회가 너무도 적다는 게 문제다. 사실 초등생에게 딱 적합한 교육은 권력을 가질수록 ‘절대 네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일지도 모른다.  김서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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