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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앞에 나타난 ‘메갈리아의 딸들’
메르스 갤러리, 열린 판도라의 상자를 보며 

 

※ 필자 김홍미리 님은 여성주의 연구활동가입니다. –편집자 주

 

 

 

메갤에 등장한 메갈리안들

 

누가 알았을까?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이하 메갤)가 여성혐오가 판치는 이 세계에서 ‘김치남’들을 대놓고 놀려먹는 ‘메갈리안’들을 만들어 낼 줄이야.

 

▲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캡쳐 
 

1996년 이갈리아(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은 여성과 남성의 성역할 체계가 완전히 바뀐 ‘이갈리아’라는 가상 공간에서 내용이 전개된다)를 ‘책으로’ 만난 나는 메르스 바이러스를 타고 온라인을 점령한 메갈리안들을 눈앞에 본다는 게 신기하고 신선한데다 매우 통쾌하다.

 

보슬아치, 보징어, 허벌보지, 메가보지 포함 정말 끝도 없이 창조해내는 남자들의 밑도 끝도 없는 보지 타령에, 드디어 ‘보지’들이 들고 일어나 “거봐, 참고 봐줄 때 그만하지” 하는 것 같다. “누가 내보지 갖고 장난쳐?” 하는 것 마냥 보지들의 반격은 인위적이거나 기획된 느낌 없이 그렇게 메갤에 들어찼다. 남자들의 우려와 달리 여자들은 김치남/실잦을 희롱하는 갤에 놀러와 미간을 찌푸리기 보다는 통쾌함을 금할 길 없었다.

 

더군다나 메갤은 출발점이지 종착지가 아닌 걸로 보인다. 판도라의 상자는 이미 열렸다. 판도라는 ‘상자를 열지 말라’는 제우스의 경고가 판도라를 위한 것이 아니란 걸 알아버렸다. 상자를 열어보니 재미진 일이 분초를 다투며 일어났다.

 

자가당착에 빠져버린 제우스가 판도라의 상자 앞에서 우왕좌왕 하는 모습은 지켜보는 이들을 ‘애잔하게’ 만든다. 판도라의 상자는 어쨌든 “판도라의” 것이었다. 신화대로 그 안에서 시기 질투 욕심이 쏟아져 나왔는지, 자유 정의 희망이 쏟아져 나왔는지는 판도라의 말을 들어봐야 할 일인 거다.

 

메갤을 시작으로 김치년들의 거침없는 발화는 멈추지 않을 모양새다. ‘메갤 문학’은 하루가 다르게 감각 돋는다. 짐짓 점잖은 어조로 여전히 견고한 불평등한 성적 계약을 문제 삼는 것 대신 ‘메가보지’ 파워를 각색 없이 보여주는 형국이다. 자칫하면 메갤 ‘발화’를 기점으로 ‘메가보지’는 더 이상 ‘욕’으로의 기능을 상실할지도 모르겠다. 메가보지가 주는 파워풀한 이 느낌도 꽤 괜찮다.

 

‘탈김치’할 수 있는 성장의 기회

 

메갤을 관람하는 남자들은 시시각각 다르게 움직였다. 관람 포인트 중 하나는 다채로운 감정 표현과 시간에 따른 변화다. 초기 메갤에 온 남자들은 당황한다. 여자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사용‘할 수 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한다. 남자들‘만’ 말해야 하는 것들 -예를 들어 무턱대고 하는 욕설, 성기 비하, 성기 환원 등-을 여자들이 떠드는 대다가 심지어 ‘가지고 논다’는 걸 믿기 어렵다.

 

그만큼 그들의 의식 안에 여자들은 단일한 집단이자 고요한 물질로 ‘종특’ 되어있다. 사실 여자들의 ‘종특화’는 예측에서 벗어난 여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걸 (알 수 없는) 두려움으로 경험하는 남자들이 줄곧 써먹어온 공포해소법이기도 하다. “여기 걍 여자인척하는 남자들 득실거리는데구만 ㅋㅋ”이라는 남갤러의 갤질에 주르륵 달린 댓글에서 언니들이 일러주듯이, 이런 여자들이 존재하지 않기를 바라는 남자들의 ‘현실 부정’인 샘이이다.
 

▲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캡쳐 
 

메갤 오픈 열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짜 여자얌?”이라는 의심은 멈추지 않는다. 여자들은 이런 글에 또 한번 데굴데굴 구르며 웃는다. 의도치 않게 골려 먹는 재미가 쏠쏠한 거다. 그렇다고 이런 여자들의 반응에 어리둥절할 필요는 없다. 나를 포함해서 잠재적 김치녀들도 ‘당신’이 ‘우리’를 그렇게 순진하다고 생각할 줄은 미처 몰랐다. 메갤만 나가면 ‘메갤년’들이 없을 거라고 생각할 줄은 정말 몰랐다. 김치녀와 개념녀가 분할 가능하다고 생각할 줄은, 김치녀와 개념녀를 합해야만 한 사람의 인간일 수 있다는 걸 모르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새삼스럽게 서로에게 당황할 필요는 없겠다. 당신과 ‘우리’는 같은 세계에 살고 있는 것 같아도 전혀 다른 문법으로 살아왔다는 걸 알아채기만 한다면야 그것으로 충분하다. (물론 여자들은 생각보다 남자들이 더 여자를 ‘여자’로 종특한다는 것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여자들은 이미 규범의 모순을 알고 있었으니, 남자들은 여자들이 ‘이미 앞서 알고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그런 점에서 볼때 메갤은 OO녀/OO년으로 몰아붙여도 그 말에 길들여지지 않은 김치녀들이 (젠더로 갈리는) 모순적인 잣대를 드러나게 하는 묘수를 발견한 것뿐이다. 서당개는 삼 년 만에 풍월을 읊을 뿐이고 김치년들은 여성혐오 십수 년 만에 김치남/실잦을 읊을 뿐인 거다.

 

- 김치남의 정의가 뭐냐? (2015. 5. 29)

- 메르스랑 김치남 까는 게 대체 뭔 상관이 있는 거냐 김치남이 보균자라는 거 말고 도대체 메르스갤에 여자남자 이야기가 왜 나오는 거냐? (2015. 5. 30)

- 일반화하지 말란 소리를 김치남한테 듣다니 (2015. 5. 30)

 

메갤에서 여자들의 앞뒤 없는 욕설과 비난에 할 말 잃은 남자들은 ‘김치남의 정의’가 무엇인지, 대체 왜 메르스갤에서 ‘여자남자 이야기’가 나오는지를 물어왔다. 남자 전체를 김치남으로 몰거나 일반화하지 말자는 이야기도 빈번히 올라왔다. 말만 달라졌지 줄곧 여자들이 물었던 물음이고, 해왔던 반론들이다.

 

누군가는 이런 과정을 경험하면서 메갤러들의 미러링(거울처럼 상대방의 언행을 똑같이 따라 하여 비추는 것) 의도를 빠르게 눈치채며, 묵인과 방조 속에 몸집을 키워온 여성혐오와 직면하기도 한다. 그 중엔 단 하루 만에 ‘탈김치’한 자도 있었다. 이런 글에는 탈김치 경축 댓글이 줄줄이 달렸다.

 

“여혐들이 여자들 까던 논리 지금 그대로 대입해서 까고 있잖아 ㅋㅋㅋㅋㅋㅋ 평소에 넷상에서 여자 까던 애들은 여기서 할 말 없다 ㅎㅎ 저게 지들이 하던 말인데“ (2015. 5. 30.)

 

거울 앞에 서면 ‘매도 당하고 검열당하며 성기로 환원되는 자’의 느낌이 어떠한지가 추측 가능한 범위 내로 구체화된다. 미러링을 통해 거울과 마주할 때야말로 타인의 삶에 근접할 수 있는 더 없는 기회인 거다. 때문에 이때 취해야 할 감정은 당황이나 분노가 아니라 놀라움과 경이감이어야 한다. 미처 다가가지 못했던 경험과, 만날 것이라는 설렘, 타인과 내가 만날 수 있게 몸의 폭이 한층 넓어지고 살갗은 얇아질 것이라는 기대여야 한다.

 

그러기 위해 넘어야 할 산은 김치년들이 (나보다) 뭔가를 ‘안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은 이들의 불편하고 불안한 마음이다. 상의를 탈의하는 자, Y대 학생증을 올려 학벌베틀을 신청하는 자, ‘실좆인증샷’을 올리는 자, 분노의 표시로 여친 구타 인증샷을 올리는 자 등 여성혐오를 미러링한 여자들의 등장에 남자갤러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반응한다. 그 중 으뜸 자폭은 단연 ‘실좆인증’이다.

 

내가 처음 인증샷을 접한 건 메갤 나흘째 되던 날이다. ‘니들이 까불어도 현실 세계에서 성적 주체는 유일무이 “실좆”뿐’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아는 자들의 십 원짜리 공격이다. 십수 년간 ‘보지’ 소리를 들어도 보지 사진을 올리는 김치년들이 없는 것, 메갤 탄생 불과 며칠 만에 발기한 성기 사진을 욕설과 함께 올리는 김치남들이 흔한 것. 이 둘의 대비는 이제까지 남자들이 인정하지 않았던 불공정한 성적 체계를 보여주는 적절한 예다. 한 장의 사진으로도 자기 홀로 우뚝/우월해질 수 있는 남근 소유자는 그래서 이런 성찰의 기회를 포기하기가 쉬워진다.

 

▲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캡쳐 
 

디시인사이드 운영진의 낯부끄러운 메갤 ‘특별 대우’도 이런 기회의 포기 선언으로 읽힌다. 탄생 5일차 신조어 ‘김치남’의 갤사용을 금지하면서, 거침없이 김치남 혐오글(만) 삭제하면서, 디씨 사상 초유의 [욕설자제요청 공지]를 메갤에 띄우면서 이들이 확인하려 했던 건, 메갤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여기가 디씨에서 욕하지 말라고 공지올라온 그 역사적 현장 맞습니까”(2015. 6. 3.) 라는 댓글을 포함해서 디씨의 [욕설자제요청 공지]에는 이를 비웃는 700여개의 댓글이 달렸다. 지난 십수 년간 ‘김치년’의 한국사회 정착과 확산에 기여한 디씨가 단 며칠 만에 ‘김치남’ 불가를 선언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는 합리적 질의들이 빗발치자 운영진은 곧 김치남 사용을 허용했다.

 

하지만 운영진은 개념글 추천을 로그인 해야만 할 수 있도록 한 메르스 갤러리 추천 로그인 조치(로그인 개추)는 아직도 풀지 않았다. 메갤의 미러링에 스스로를 비추지 않고 통제 권한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확인 받으려는 얄팍함. 그 속에서 성찰도 성장의 기회도 지워져 버렸다.

 

‘오빠가 설명해줄게’

 

의심, 당황, 계몽, 욕설, 비난의 단계를 지나면서 거울보기를 거부한 남자들은 메갤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메겔은 ‘창의성 부재’와 ‘논리의 부재’라는 문제를 가진 것으로 분석됐다(디시위키: 메르스 갤러리). 사실 기승전-김치년/보지로 수렴되는 여성혐오의 단조로움에서 애초에 창의성과 논리는 존재하지 않았었다. 미러링이라고 미리부터 말한 여자들의 메갤 놀이를 창의성과 논리를 기준으로 평가하는 건 그래서 넌센스다.

 

기승전-김치남/실잦이라는 반사 놀이를 (창의성과 논리 부재 따위로) 폄하하려는 노력을 보는 일은 그들 식의 표현으로 매우 ‘애잔하다’. “메르스 갤러리의 성장은 전적으로 남성유저들의 화력 지원이 컸”다는 남자 갤러의 비평에서는 더욱 애잔해진다. 창의력도 논리도 없는 메갤이 이만큼 성장한 건 그래, 다 남성유저들의 지원 덕분인 걸로 치자.

 

지난 5월, 맨스플레인(mansplain, man+explain)이라는 신조어를 유행시킨 리베카 솔닛의 <남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창비)가 출간됐다. 서두만 읽고 넣어둔 책을 남성 유저들의 ‘분석질’을 보며 다시 꺼내 들었다.

 

십수 년 넘게 ‘김치년’이나 ‘보지’가 되어본 적 없으면서 메갤에 대한 진단과 분석을 겁 없이 내놓는 저 위풍당당함이 어디에서 연유하는지 새삼 궁금해졌다. 십수 년 넘게 된장녀/김치녀/상폐녀/보슬아치/걸레/창녀/낙태충/성괴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을 경주해온 여자들이 이제 몸 구석구석에 들러붙어있던 그 말들이 ‘별볼 일 없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엄청난 사실을 애써 외면하면서 말이다.

 

‘여자들이 제 입으로 직접 겪는다고 말한 경험을 기각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여기는 점에서’(리베카 솔닛) 남자들은 더 나은 세계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너무 쉽게 잃는다. 메갤을 시작으로 여성들이 여성혐오의 언어들을 비틀기 시작했다는 건, 이제까지 성을 두 개로 분할하고 그 중 한쪽 성을 단 하나의 특질(종특)로 몰아가는 일을 쉼 없이 해대온 한쪽 성/남성의 장난질이 비단 ‘장난질’일 수 없다고 알려주는 뜻있는 가르침이다.

 

공감하는 방법을 상실하고, 타인을 적으로 돌리는 일에 익숙하며, 약자를 밟아야 살아지는 시대에 우리가 무엇을 착각하고 있는지를 일깨우는 드문 기회다.

 

이쯤 해서 역사적으로 혐오는 강자의 필요에 의해 약자에게 향하는 감정이었다는 걸 기억해내야 한다. 유대인은 독일인들을 혐오할 수 없고 흑인은 백인을 혐오할 수 없다. 약자에게 강자는 부러움, 두려움, 복수심의 대상일 수는 있어도 혐오의 대상은 되지 못한다(두려움, 복수심은 혐오와 공존할 수 있는 감정이지만 말이다). 혐오가 대상에 대한 구체적인 통제를 목표로 독려되고 생산되는 감정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워진다.

 

메갈리아의 딸들이 거울 쌍으로 활용하는 ‘김치남, 실잦, 씹치놈, 낙튀충(임신시키고 나몰라라하는 충), 코피노, 소추소심, 실잦, 자들자들, 아됫어’라는 단어는 ‘김치녀/년, 갓치녀, 갈보, 메가보지, 보슬보슬, 낙태충, 아몰랑’이라는 말없이 홀로 돌아다니지 않는다. 후자의 언어들은 여자 몸에 대한 통제와 오래묵은 멸시를 고스란히 담아내지만 전자는 후자의 거울 쌍일 뿐 남자-몸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지 못한다. 적어도 아직까지는 말이다.

 

때문에 메갤은 남성혐오가 아니라 저항의 한 방식이고, 혐오가 판치는 세상을 돌아보게 하는 유용한 장치에 더 가깝다. 혐오가 (재)생산되는 방식과 구조를 들여다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인 거다.

 

▲  디시인사이드 메르스 갤러리에서 캡쳐 
 

‘여자들’은 한번도 ‘그들이’ 생각하는 모습으로 존재한 적이 없었다. 여성들에게 기대하는 고정적인 일련의 모습은 그들의 재현일 뿐 여자들의 실재 삶과는 한참 괴리됐다. 그래서 여자들은 그들이 김치남이나 씹치놈으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미 안다. 그러니 굳이 반박하려 할 필요도, 나는 그런 남자 아니라고 손사래 칠 이유도 없다. 지금 해야하는 건 메갤러들이 열어둔 거울 앞에 서는 일이다.

 

이미 많은 남성들이 메갤러의 글을 보고, 그 글에 득달같이 달려드는 여성혐오성 글을 보고, 디씨 운영진의 낯부끄러운 자가당착을 보고 (여성)혐오가 어떻게 이리 쉽게, 오래, 견고하게 구축되어왔는지를 사유하기 시작했다.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했고, 미처 숙고하지 못해서 사람을 사람으로 마주하지 않는 구조에 기여한 적 있는 자신이 부끄럽다고 고백하기 시작했다.

 

이런 활짝 열어둔 변화의 장을 단지 여자들을 가르치겠다는 심산으로 닫아버리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메갈리아의 딸들을 당신의 발 아래에 여전히 두고 싶다면, 이미 그건 메갈리아 딸들보다(그리고 이미 탈김치한 이들보다) 한참 더 뒤지고 있다는 신호일 뿐이다.

 

거울 앞에 서는 일은 누구나에게 두려운 일이다. 더군다나 이제껏 나보다 못하다고 생각했던 여자들이 세워놓은 거울과 마주하는 일은 누군가에겐 그야말로 발가벗겨지는 기분일 수도 있겠다. 그래도 용기 내어 감행해 본다면 분명 더 가벼워질 거라 믿는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전위로서 메갈리아의 딸들이 더 흔해지기를, 메갈리아의 아들도 더 흔해져서 메갈리안들이 연결감을 되찾는 일에 기여하시기를!  김홍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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