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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 내 괴롭힘’ 겪어보았나요?
인격모독, 정신적 학대, 따돌림 등으로 노동권 침해 

 

 

 

▲  논란을 일으킨 '루미네' 광고 영상 중에서. 
 

<출근길에 만난 남자직원과 여자직원 요시노. 남자는 요시노에게 “피곤해 보이는데 잔업했나?” 묻는다. 요시노가 평소처럼 잘 잤다고 하자 남자는 “잤는데도 그래? 하하” 하며 놀린다.

 

두 사람은 회사 로비에서 ‘여성스러운’ 복장을 한 다른 여직원과 마주쳐 인사한다. 남자는 “역시 귀여워”라고 칭찬을 하고, 요시노에게 “괜찮아. 쟤는 너하고는 수요가 다르니까” 라고 말한다.

 

‘수요’(여직원에게 요구되는 것)라는 단어가 화면 가득하다. 요시노는 거울을 보며 “최근에 게을렀나” 혼잣말을 한다. 동시에 ‘변해야 한다’는 자막이 뜬다.>

 

올해 3월 일본의 쇼핑몰 운영회사인 ‘루미네’가 만든 자사 홍보용 광고 영상의 내용이다. 이 광고는 인터넷에 공개되었다가 네티즌들의 항의를 받고 이틀 만에 삭제되었다.

 

일본 노동정책연구 연수기구 나이토 시노 연구원은 여성노동자에 대한 괴롭힘(하라스먼트: Harassment) 실태를 설명하며 루미네 광고를 예로 들었다. 여자직원의 얼굴과 몸매에 대한 남자직원의 발언은 “하라스먼트적인 언동”이라는 것이다.

 

게다가 해당 광고는 여자직원이 남자직원의 ‘수요’에 응하여 자신도 ‘직장의 꽃’이 되고자 다짐하는 내용이라 더욱 문제가 심각하다. 이 광고가 공개된 이후 ‘여성차별이다’, ‘왜 여성이 남자의 수요, 요구(needs)에 응해야만 하나’, ‘루미네 상품은 사지 않겠다’ 등 여성들의 항의가 쏟아졌다고 한다.

 

지난 1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2015년 한·일 여성노동 포럼은 일본과 한국의 ‘직장 내 괴롭힘과 젠더’ 문제를 다루었다.

 

이날 나이토 연구원은 루미네 광고 사건은 일본의 기업문화가 얼마나 남성중심적인지를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여성노동자를 대등하게 일하는 동료로 보지 않고, 젊다, 귀엽다, 예쁘다 등 여성에 대한 고정적인 성역할을 강요하는 문제를 대기업에서조차 (외부의) 지적을 받기 전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것.

 

굵은 다리, 할멈, 돼지…소리 들으며 일하는 여성들

 

사실 루미네 광고에서 남자직원이 요시노에게 한 말들은 ‘직장 내 괴롭힘’이라고 보기엔 그다지 심각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직장에서 여성직원에 대해 외모를 지적하거나 다른 여성직원과 비교하는 일이 일상적으로 일어난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일본의 노동국에 접수된 ‘따돌림, 괴롭힘’ 관련 사례들을 보면, 여성들은 직장에서 상사나 동료로부터 ‘뭐야, 이 굵은 다리는’, ‘돼지는 자른다’, ‘네가 치마를 입다니 믿을 수 없다’ 등의 외모 비하 발언을 듣는 경우가 많다.

 

한편, ‘사귀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소문이 있는데 그 사람과 결혼할 건가?’ 등의 사적인 질문을 받거나, 이름이나 직위가 아닌 ‘아줌마’, ‘할멈’ 등으로 불리는 등 남성보다는 여성들이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많이 호소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과 달리, 일본에서는 하라스먼트(직장 내 괴롭힘) 개념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나고야대학의 와다 하지메 교수는 ‘장시간 노동이 만연하고, 법과 정책을 제대로 준수하지 않으며, 여성을 멸시하는 전통적인 풍토가 여전한 가운데, 직원들 간의 경쟁이 심화되고, 비정규직이 급증하며, 타인에 대한 무관심과 직장 내 소통의 부족 등과 같이 고용환경이 크게 바뀌었다는 점’에서 그 이유를 찾았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노동환경의 문제를 수면 위로 드러내는 노동자들의 권리의식이 향상된 것도 ‘직장 내 괴롭힘’ 개념이 확산되는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다양한 양상의 ‘직장 내 괴롭힘’ 어떻게 방지할까

 

일본에서는 ‘하라스먼트’ 개념이 직장 내 성희롱(sexual harassment), 권력형 괴롭힘(power harassment), 임산부 차별(maternity harassment), 정신적 학대(moral harassment), 대학이나 연구기관에서 일어나는 ‘상아탑 집단 괴롭힘’(academic harassment) 등 다양하게 쓰인다. 

 

▲  5월 12일 국회의원회관에서 열린 <2015년 한·일 여성노동 포럼>   © 강선미 
 

일본 노동국에 접수된 사례 중에서 따돌림, 괴롭힘 사건은 2002년에는 약 8%를 차지했지만 10년 만에 세 배나 증가하여 최근에는 24%에 달하고 있다.

 

그런데 이중에서 법제화된 것은 직장 내 성희롱과 임산부 차별을 규제하는 것뿐이다. 와다 교수는 “기타 괴롭힘의 문제에 대해서는 법률 규정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다양하게 발생하고 있는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방지할 방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와다 교수는 “괴롭힘의 가장 큰 특징은 문제가 발생하면 직장 내 업무 환경이 악화되고, 피해노동자도 정신적, 육체적으로 회복이 힘들 정도의 엄청난 타격을 받을 수 있다”고 설명하면서, 특히 “오늘날의 고용현장에서 가장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바로 권력형 괴롭힘”이라고 꼽았다.

 

한편, 나이토 연구원은 ‘직장 내 성희롱과 임산부 차별과 관련된 문제는 법이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실효성이 부족하다’는 점을 짚었다. “법은 성희롱 방지대책을 강구하도록 사업주에 조언할 뿐, 개별 사안에 대해 행정지도 등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또 회사가 노동자에게 해고와 같은 직접적인 불이익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임신, 출산 등에 관련하여 노동자를 괴롭히는 ‘언동’에 대해서는 규제하지 않는다.”

 

나이토 연구원은 “직장에서는 다양한 사유로 인해 괴롭힘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라며, EU법에 비추어보았을 때 ‘성희롱이나 성차별, 성적 지향, 장애와 인종, 종교 및 신념 등을 이유로 한 ‘괴롭힘’을 금지하는 법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여성노동자가 겪는 복합 차별의 상황을 고려한 입법 방향도 언급하였다.

 

국내서도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인식 환기되어야

 

이번 포럼에서 한국측 토론자들은 다양한 ‘직장 내 괴롭힘’ 문제를 각각의 입법을 통해 해결하기보다는, 있는 법의 적용을 더 강화하고 사회적 인식을 환기시키는 것이 우선이라는 입장을 내었다.

 

한국여성민우회 이소희 여성노동팀장은 “한국에도 남녀고용평등과 일-가정 양립지원에 관한 법이 마련되어 있지만, 문제는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는 데에 있다. 그렇다고 해서 새로운 법을 또 만들어서 제재하려는 것은 실효성 차원에서 역시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이소희 팀장은 지난 해 공론화되었던 르노삼성자동차 직장 내 성희롱 사건을 예로 설명했다.

 

“르노삼성자동차 사건은 성희롱뿐 아니라 이후에 피해자와 피해자를 도와준 노동자가 왕따, 격리 등 각종 불이익 조치를 당했다. 이를 ‘직장 내 괴롭힘’ 측면에서 봐야 할 지, ‘직장 내 성희롱’의 연속선상의 문제로 봐야 할 지 고민이 될 수는 있지만 ‘맥락’ 속에서 이해해야 한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말하기 이전에 이미 개념이 정리되어 있는 ‘직장 내 성희롱 불이익 조치’나 ‘고용 상 성차별’의 차원에서 사건을 명확히 하고, 그 가운데서 해결방안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는 르노삼성자동차 사건 외에도 명예퇴직을 거부한 노동자들에게 인력퇴출 프로그램을 운용한 KT사건, 노조 탈퇴를 하지 않는 노동자들을 업무적으로 괴롭힌 발레오만도 사건, 조합장의 주도로 동료들의 따돌림과 부당한 업무 배치를 받은 직지농협 사건 등 ‘직장 내 괴롭힘’ 문제가 상당히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한림대학교 사회학과 신경아 교수는 “KT의 직장 내 괴롭힘 관련 조사 결과가 발표되었는데 충분한 주목을 받지 못했고, 이 문제를 사용자와 노동자간의 갈등 정도로 치부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말했다. 신경아 교수는 “직장 내 괴롭힘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주의가 확산되고 충분한 토론을 거쳐 법제도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토론자들은 ‘직장 내 괴롭힘’이라는 개념에 대한 사회적 관심과 감수성을 높이고, 이 문제를 ‘노동권 침해’의 문제로 볼 수 있게끔 사회적 인식을 환기시켜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강선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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