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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예비 이성애부부’ 양성기관인가
교육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바라보며
교육부가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마련하면서 ‘동성애에 대한 지도를 허용하지 않는다’고 지시한 사실이 알려져 논란이 일었다. 그러자 교육부는 동성애 관련해서는 ‘인권’ 측면에서 지도하고 있지만, ‘성가치관’ 측면에서 일반적인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성교육 표준안’에 포함하지 않는 것이라는 입장을 각 교육청에 하달했다. 학교 성교육 표준안의 문제점에 대한 여성주의 연구활동가 김홍미리 님의 기고 [일다]
힘없는 말이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그 사람이 시간이 남아돌아서 일다에서 쓰는 칼럼 같은 걸 보겠습니까. 아무리 시간 들여서 글을 적어도 당신은 아무 영향력 없는 소규모 언론인이고 그 사람은(황우여는)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거물 정치인이죠. 당신이 하란다고 해줄 사람도 아니고 당신이 뭐라고 해도 당신의 말에는 그런 힘이 없습니다.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죠.”(ID: rudf****, 2015년 4월 14일)
이 글은 황우여 교육부장관 집무실에 걸린 ‘교육부직원 미혼자 현황표’를 비판한 지난 기사에 달린 네티즌의 댓글이다.
이 분은 왜 굳이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라는 조언을 남겼을까. 이 글을 본 날이 공교롭게도 ‘어린이집 CCTV 의무화’ 조항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날이었다. 나는 어린이집 CCTV가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기는커녕 사회에 대한 불신을 키운다는 기사를 기고한 바 있다. 그렇지 않아도 어린이집 CCTV 설치가 의무화되어 심란한데 이런 댓글까지 읽고 나니 ‘이런 힘없는 글 따위 써서 뭐 하나’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난달 교육부가 발표한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 나를 다시금 컴퓨터 앞에 앉게 만들었다. ‘표준’이라고 우기는 ‘성교육 표준안’은 성을 교육한다는 명목으로 성적 지향에 대한 차별과 가족 구성권에 대한 차별, 청소년의 자기결정권에 대한 차별까지 공식화하고 있다. 20년은 거꾸로 거슬러간 교육안을 보니 ‘힘없고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더라도 할 말은 해야지 싶다.
편협하고 분열적인 ‘학교 성교육 표준안’
교육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은 교육부가 생각하는 ‘표준’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들의 ‘표준’은 편협하고 또한 분열적이기까지 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학생의 개인차를 존중하고, 성에 대해 교사의 일방적인 가치를 주입하기보다는 ‘다가치’(多價値)안에서 자율적으로 선택하도록 한다. 그런데 동성애에 대한 지도는 허용하지 않는다.
동성애는 그들의 ‘표준’에서 볼 때 다양한 성적 가치의 범주에 포함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때문에 동성애와 성적 지향이라는 용어는 ‘성교육에서 사용이 불가능’하다고 못박고, 성소수자에 대한 내용은 ‘인권 측면과 성적 가치 측면을 분리해서 지도하라’고 요구할 수 있게 됐다. 성소수자의 ‘인권은 중요하지만 더 침묵하게 하라’는 모순적인 인식과 요구는 ‘그들의 표준’ 속에서는 전혀 이상한 게 아닌 것이다.
교안을 통해 ‘성교육은 교사의 성적 가치를 전수하는 것이 아님’을 재차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교육부는 그들이 옳다고 믿는 성적 가치만을 교안에 담았다. 양성평등 가치는 취하고 양쪽 성(여자 아니면 남자)이 아닌 것은 제거했다. 이성 결합은 취하고 그 외의 결합은 제거했다. ‘결혼에 의한 가족’은 허락하고 그 외의 다양한 가족은 배제했다. 1인 가족과 독신 가족에 대한 이해는 아이들에게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으로 독려됐다.
철저하게 성은 생식을 위한 성으로 몰았다. 생식이 아닌 성은 위험하거나 오염된 것들로 간단하게 정리했다. 종족 번식을 하기에는 시간도, 돈도, 사회적 지지망도 없는 청소년들은 어른들의 관리 대상으로 설득된다. 간단하게 십대들이 성적 존재라는 사실을 삭제하면서, 무성적인 존재로서 어른들이 허용하는 생식의 성 안에서 금욕을 요구한다.
스스로를 ‘표준’이라고 이름 붙인 <학교 성교육 표준안>은 교안 안에서도 중립임을 자처하고 있다. 청소년, 양성 이외의 성을 가진 이들, 사랑하는 마음이 이성에게로 향하지 않는 이들,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거나 결혼하지 않는 이들의 경험을 다 삭제해버리면서도 용케 ‘중립’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오랫동안 철학자들은 ‘중립이란 가능한가’에 대해 질문을 던져왔다. 특히, 페미니즘은 여성이 배제된 역사 속에서도 꾸준히 ‘객관성’을 유지하는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물어왔다. 그리고 비로소 객관성이란 일군의 거추장스러운 집단의 목소리를 제거할 때에 확보되곤 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말할 수 없거나, 말해도 들리지 않거나, 거부당한 사람들의 목소리는 ‘객관’의 외곽에서 주관적이거나, 혹은 중립적이지 않은 영역에 배당되는 것이다.
페미니즘은 이렇게 식별과 제거를 통해서 확보된, 가치중립적이라고 말해지는 객관성을 ‘취약한 객관성’이라고 부른다. 주체가 자신의 역사에서 구성된 자신의 특수한 위치를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중립’이라고 우길 때, 그 기준과 다른 경험들은 탈각되어버리며 특수한 경험만이 남아있는 곳에서 객관성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된 것이라고 본다.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은 객관성을 훼손하면서 객관성을 확보했다고 주장하고, 편파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중립이라고 칭하는 오류의 전형적인 예다. 이것은 이번 교육부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을 고유명사 그대로 <표준안>이라고 부를 수 없는 이유다.
20년은 후퇴한 성교육 교안, 대체 왜?
▲ 모두에게 안전한 학교를 위한 유네스코가이드북(2013.10) ©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교육부 성교육 교안에는 이런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양성평등, 금욕이 필요한 이유, 바람직한 이성교제, 부모 되기의 준비, 결혼과 배우자 선택, 음란물의 위험성’.
누군가는 이런 문구를 마주하고도 아무 문제 의식 없이 지나칠 수 있다. 교육부의 성인식과 유사한 입장에 선 경우에는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인간의 성이 두 개뿐이라는 것에 동의하지 않거나, 십대의 유쾌한 섹슈얼리티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랑의 방향이 이성이 아니거나 아닐 수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 결혼을 성과 연결 짓지 않는 사람들, 성적 쾌락이 위험이 아니라 에너지일 수 있음을 아는 이들에게 이런 문구들은 숨 막히고 편협하고 고리타분하다.
무엇보다 성교육의 목적과 의미가 무엇인지를 다시 질문하게 된다. 이렇게 일방적이고 편협한 성인식을 주입하는 것이 지금의 한국 사회에 요구되는 성교육인가?
성을 섹스(sex)로만 표기할 수 없듯이, 성교육을 하는 이유도 안전한 결혼과 종족의 번식을 위한 것이 아니다. 성을 교육한다는 건, 성이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를 알아채고 내가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지를 알아가기 위해서 필요한 일이다. 딱 맞는 ‘이성’을 만나더라도 ‘스무 살’이 될 때까지는 ‘금욕’을 하고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잘 사는 것이 성교육의 목표가 아니라는 얘기다.
오히려 딱 맞는 상대는 왜 꼭 이성인지, 사랑의 대상은 어떻게 정해지는지, 왜 스무 살 이전의 섹스는 승인이 어려운지, 하고 나면 많이들 ‘비추’하는 결혼은 왜 그렇게 권장되는지, 결혼하기와 아이 낳기의 순서는 왜 그렇게 정해지는지를 묻고, 그 밖의 지향과 실천들이 왜 멸시되는지를 물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성교육의 목표이다.
성을 둘러싸고 멸시와 혐오의 감정들이 생긴 것은 무엇 때문인지, 나에게 성은 왜 부끄럽고 우울한, 때로는 더러운 느낌과도 결합하곤 하는지, 성에 대한 불안함은 무엇을 배경으로 하는지, 성이 뭐길래 이런 통제와 감정의 반응이 일어나는지를 알아가는 것이기도 하다.
<십대 섹슈얼리티 인권모임>은 지난달 21일 성명서를 통해, 교육부의 성교육안이 “무성적이고 이성애자인 국민을 길러내는데 교육의 목표를 두는 것은 아닌가?”라고 물었다. 그런 의도라면 교육부의 성교육안은 매우 잘 짜인 교안일 것이다.
하지만 교육부는 1년전으로 돌아가봐야 한다. 성교육 표준안 초안을 발표할 때까지만 해도 교육부는 다양한 성적 지향과 성에 대한 인식의 변화, 성소수자의 권익, 다양한 가족들에 대한 논의를 교재에 포함했다. 성을 벽장 속에 가두지 않았고, 자의적인 기준에 따라 ‘정상과 예외’로 나누지 않았다. 중립이라는 이름으로 통제와 침묵을 강요하지 않았다. 그런데 1년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가.
불과 1년 사이에 최소 20년 전으로 후진한 교육부 성교육안의 문제는 다시금 작년 8월 취임한 황우여 교육부장관의 볼품없는 성인식과 만난다. 장관실에 교육부직원 미혼자 현황판을 걸어둘 만큼 ‘결혼’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황장관에게 학교 성교육은 결혼의 준비과정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나영 활동가는 이런 황우여 장관이 2013년 8월 개신교를 중심으로 꾸려진 ‘한국교계교과서.동성애동성혼 특별대책위원회’의 공동대표였음을 알렸다.(<인권오름> 제437호) “대부분의 국민이 비정상적으로 생각하는 동성애를 조장하는 교과서와 서울시 인권조례를 즉각 수정해야 한다”는 긴급 성명을 발표한 이 단체의 수장이 교육부의 수장이 된 것이다.
그가 장관으로 임명된 후, 한국의 <학교 성교육 표준안>이 혐오와 차별을 승인하면서 ‘예비 이성애 부부 양성교육’이 되어버린 것은 (당연할 수 없고 당연해서는 안되지만) 당연한 수순이었다.
혐오와 차별을 방관하지 않는 힘, ‘움직임’
이쯤 되면 나의 글쓰기를 무력화하려던 네티즌의 말을 수긍해야 할 것도 같다. 황 장관은 사회 전체에 영향을 끼치는 거물 정치인이 맞다. 불과 1년만에 한국의 성교육을 망치고 청소년 성소수자의 앞날을 더욱 불안하고 어둡게 했다. 성은 유쾌하고 즐거운 것이 아니라 통제해야 하고 위험한 이분법의 어떤 것으로 아이들에게 전해질 위기에 놓였다. 이대로라면 결혼 상태에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불편하고 난감한 시선은 줄어들지 않을 거다.
황우여는 참 대단하다. (어차피 이 글을 볼 리 없다는 네티즌의 말을 과감히 수용하면서 황우여의 이름에서 장관이라는 존칭을 생략해본다. 그가 다름아닌 교육부의 장관이라는 사실이 심히 유감인 ‘힘없는’ 기자의 사소한 저항이다.)
그러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대로 저 ‘표준 아닌 표준안’을 두고 볼 것인가. 계속되는 성소수자 혐오 세력들의 조직적이고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면서도, 당신과 나는 한낱 계란일 뿐이고 저들은 단단한 바위라는 말에 넘어갈 것인가. 그래 봤자 ‘공허한 메아리’일 뿐이라는 방관자들의 목소리를 수용하고 무력감의 덫에 걸어 들어갈 것인가.
영화 <변호인>에서 진우는 “바위는 죽는 것이지만 계란은 살아서 바위를 넘는다”라는 말을 했다. 울림 있고 희망을 주는 말이었지만, 무력감이 흔해진 시대에 휩쓸려버린 나는 멋진 대사일 뿐이라고 외면했다. 그런데 며칠 전, 태안 마애삼존석불 옆 바위 틈을 뚫고 높이 자란 나무를 직접 보고서야 ‘살아있음’의 힘을 붙잡고 싶어졌다.
한국 사회는 정치적 폐악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 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다. 교육부의 성교육 표준안은 그런 나날들 중에 한 점을 찍었다. 저항이 통하지 않는 것 같은 시간이 길어진다. 무수한 계란들이 깨지지만, 마주하는 것들은 권력을 가진 자들의 무지와 혐오, 거기에 발맞춘 나의 절망과 무력감이라고 느껴진다.
희망을 갖자는, 유치하게 들릴 법한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아 움직이는 것들만이 만들 수 있는 것을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박노해 시인은 겨울 속에 햇봄이 들어차 있고 절망을 느낄 때 희망이 이미 와있다고 했다. 내가 움직이고 내 옆에 있는 이가 움직이는 한, 겨울이든 어둠이든 절망덩어리든 그것은 중요치 않다. ‘이미’ 우리는 함께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길을 내고 있으며, 내가 지칠 때에 더 힘을 내주는 사람들을 만났으니까. ▣ 김홍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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