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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위와 양육’ 어느 한쪽도 포기하지 않도록
서정원의 미국대학 탐방(4) 연구중심대학의 교육철학
서울대 부모학생조합 <맘인스누> 대표 서정원씨(33세)가 양육과 학업을 병행하는 학생들을 위한 정책을 살펴보기 위해 미국 대학들을 탐방하고 온 이야기를 5회 연재합니다. –편집자 주
맞벌이에 지원되는 출산, 육아정책에서 배제된 대학원생
▲ MIT공과대학의 여학생지원센터를 방문한 서울대 부모학생조합<맘인스누> 대표 서정원씨. © 사진: 이진화
몇 년 전, 나는 한 국공립대학교의 교직원으로 근무한 적이 있다. 거기서 내가 한 일은 제도적으로는 만들어진 신생 전공이 실제로 운영되도록 사업 계획을 세우고 운영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직장에 다니면서 대학원 수업을 간신히 들었고, 아이도 키웠다.
직장에 다니기 전에는 ‘대학원생’ 신분이었기 때문에 맞벌이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맞벌이 부부 가정에게 지원하는 육아정책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큰 아들을 서울 용산구에서 서대문구에 있는 어린이집으로 등원을 시켜야 했다. 우리 동네 어린이집의 대기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취직한 후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도보 10분 거리의 어린이집에서 연락이 왔다. 맞벌이로 인정을 받아서 대기우선순위가 높아진 것이다.
또, 직장에서는 내 월급에 자녀보육수당을 10만원씩 얹어주었다. 연초에는 자녀와 배우자에 대한 복지 포인트가 지급되어, 자녀 보육과 문화행사 등에 사용할 수 있었다. 산전후 휴가와 육아휴직을 쓸 수 있었고, 해당 기간에는 월급의 일정 정도가 급여로 제공되었다. 그땐 그런 혜택을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다가 퇴직을 했다. 둘째를 임신했을 초기에 학생 민원의 폭주로 탈진을 했고, 내가 발제를 하기로 한 수업을 펑크 냈다. 그때, 우선 순위를 정했다. 뱃속의 아이를 잘 키우는 일, 그리고 기백만 원의 학자금 대출을 받아서 다니는 수업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더 시급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러고 나니 매달 꼬박꼬박 입금되던 월급이 당장 아쉬웠다. 하지만 그보다 더 아쉬웠던 것은 ‘근로자’라는 신분을 잃어버린 것이었다.
근로자가 받을 수 있는 어린이집 대기 가산점, 유급의 출산 휴가와 육아 휴직, 각종 수당을 받을 수 없었다. 건강보험도 직장가입자에서 지역가입자로 전환되면서, 내가 부담해야 하는 총액이 증가하였다. 제도권의 근로자에서 근로자가 아닌 대학원생 신분으로의 복귀하면서, 나는 출산, 육아, 보육과 관련된 제도권의 지원을 직장과 함께 버린 꼴이 되었다.
‘산모, 신생아도우미 서비스 이용 불가’ 판정을 받고
▲ 부모학생조합 <맘인스누>가 함께하는 옥상텃밭. ©맘인스누
직장을 그만두고 학업과 육아에만 집중했다. 수업을 들었고, <맘인스누>를 통해서 내가 배운 것을 실천했다. 사람들을 조직화하고, 양육자 되기와 관련한 책모임을 만들고, 엄마대학원생의 처지를 알리는 글을 썼다.
지식을 배우고 실천하는 이 과정도 내겐 ‘일’이었다. 아무도 나에게 월급을 주지 않았지만, 월급 받는 일 못지않게 시간과 에너지를 많이 사용했다. 학교 본부를 찾아가 부모학생을 지원하도록 청원하고, 지역 사회와 정부, 정치인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시민조직, 여성단체와 네트워크를 구축했다. 이것도 ‘일’이었다.
사회복지학을 전공하는 내가 <맘인스누>를 만들어 운영하는 것으로 배운 지식을 익히는 과정을 거치며 ‘일’을 한 것처럼, 이공계의 엄마대학원생은 실험실에서 실험이라는 ‘일’을 한다. 미술을 전공하는 엄마대학원생은 미술작품을 창작하는 ‘일’을 한다. 인문학을 하는 엄마대학원생은 고전을 읽고, 인문적 사유를 함으로써 사회의 지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이런 ‘일’들은 경제적 대가를 받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학비를 지불해야 하는 ‘일’이다.
무엇보다 우리 사회의 모성보호와 일-가정 양립제도, 여성 관련 정책의 그물망에 걸리지 않아 ‘공적 지원에서 소외’를 경험하게 된다.
2013년 겨울, 만삭의 임산부였던 나는 <맘인스누> 조합원들을 만나 부모학생이 경험하는 어려움들을 공감하며, 서로를 위로하는 ‘일’을 했다. 또 남산만한 배를 내밀고 서울대학교 본부를 찾아가 부모학생의 학업-가정 양립 지원을 요청하며 보직교수님들과 면담하였다. 그렇게 해서 임신한 여성에 대한 주차와 도서관 이용에서의 편의를 약속 받았다.
나는 ‘일’을 해왔다. 그런데 얼마 후, 출산에 임박하여 산모, 신생아도우미 서비스를 이용하는 과정에서 나는 ‘근로자’가 아닌 대학원생인 관계로 소득을 증빙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서류를 발급받지 못했다. 결국 서비스를 제공받지 못한다는 판정을 받았다.
직장생활을 하는 동안 꼬박꼬박 세금을 냈고, 사회에 유익이 되고자 내가 배운 지식으로 대가를 바라지 않고도 ‘일’을 하였다. 게다가 나의 삶을 되돌아 보건대, 대학원을 졸업하면 과거보다 더 많은 세금을 내는 삶을 살게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근로자’가 아닌 ‘대학원생’인 나는 ‘산모, 신생아도우미 서비스 이용 불가 판정’을 받은 것이다.
나의 경험이 보여주는 것은 무엇일까. 정부의 모성보호, 보육 지원과 같은 정책에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 중의 하나는 ‘근로자성의 유무’이다. 일반적으로 대학원생이 하는 ‘일’이라는 것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것도 아니고, 고용보험에 가입된 것도 아니며, 사회적으로 ‘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니니, 근로자로 인정받을 수 없고 ‘일’하는 근로자라고 우길 수도 없다.
그러나 여성의 경제 활동이 증가하면서, 노동 정책이 모성보호와 일-가정 양립 정책을 끌어안게 된 것처럼, 교육 정책도 모성보호와 학업-가정 양립을 지원하는 제도를 만들 필요가 있다.
부모학생 지원하는 미국대학들이 밝히는 ‘가치’
▲ MIT공과대학의 여성지원센터 프로그램 ©사진: 이진화
지난 겨울, 미국 대학 답사를 통해 미국의 연구중심대학이 가진 학업-가정 양립 정책을 살펴보고, 그것이 어떻게 시행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대학들은 왜 대학이 부모학생을 지원해야 하는지, 그 철학과 가치를 홈페이지를 통해 밝히고 있다.
“우리는 직원과 학생을 위해 가족친화적인 캠퍼스 환경을 제공할 의무가 있다. 이는 단순히 법적, 정책적 요구만을 뜻하는 것이 아닌, 우리 모두가 공유하는 가치에 의한 것이다. 학생 및 교직원이 그들의 학문적 목표와 가정을 돌보는 책임을 균형 있게 유지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이 커뮤니티로서 우리의 정체성을 나타낸다.” <UC버클리>
“우리는 남녀가 가정을 꾸리는 시기가 대학원에서 학업에 정진하는 시기와 흔히 맞물린다는 것을 인식하여, 부모 대학원생 정책을 통해 학위와 부모 됨이라는 두 가지 중요한 단계를 동시에 경험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여러 갈등과 이슈들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생 가족(배우자, 파트너, 자녀)은 MIT에 다양한 커뮤니티를 구성하는 주요 멤버이다. 대학원생의 49%가 배우자/파트너가 있으며 9%가 한 명 이상의 자녀가 있다고 보고하였다 (2011년 기준). 자녀가 있는 대학원생 가족에게 있어, 부모와 대학원생으로서의 두 가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다. 그 예로 재정 문제, 자녀 양육 문제, 스케줄 관리 문제 등이 있다. 한편, 대학원생 가족들은 MIT 문화를 공유할 수 있는 많은 기회들이 있다. MIT는 가족이 있는 대학원생을 지원할 의무가 있다.” <MIT공과대학>
미국 대학들의 부모학생에 대한 지원 정책은 1)학사 지원 2)재정 지원 3)양육 지원 4)생활 지원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학사 지원은 부모학생이 학문적 성과를 유지하며 임신/육아의 추가적인 책임에 적응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한 목적의 제도이다. 수강 기간을 연장하거나, 출산 및 육아 휴직 등을 제공하는 것이다.
다음, 재정 지원은 부모학생이 자녀 양육비나 교육비 등에 사용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현금 지급 방식이다. 이는 수당, 환급금 형식으로 지원되는데,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우선적으로 제공한다.
양육 지원은 부모학생이 수업이나 세미나, 연구에 참여할 수 있도록 자녀보육을 지원해주는 프로그램이다. 보육센터, 가족지원센터, 긴급보육 프로그램 등이 운영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생활 지원은 가족기숙사와 자녀 건강보험, 수유실, 배우자 프로그램, 부모학생 네트워크 등이 있다.
▲ 미국 5개 대학의 부모학생에 대한 지원 정책. © 서정원
지식정보화 시대, 지식 생산자에 대한 처우는…
미국의 연구중심대학과 비교해 우리나라 대학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임신․출산․육아 대학(원)생에 대한 대학의 모성보호 강화 방안”에 따른 임신, 출산, 육아 ‘휴학’ 허용 규정과 대학 내 직장어린이집 이용 가능 규정 정도이다.
사실, 대학원생의 경우 박사 과정이 되면 강의를 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시간강사로 일을 하지만 대학원생은 여전히 근로자가 아니다. 정부가 제공하는 각종 임신, 출산, 육아와 관련된 혜택에서 소외된다.
미국의 사례처럼 부모인 대학원생을 위한 모성보호, 학업-가정 양립 정책을 만들면 어떨까? 극소수의 대학원생을 위해 이런 정책을 만드는 것이 국가적 낭비일까?
2014년 교육 통계에 따르면, 국내 대학원에 재학 중인 석박사 과정의 학생은 총 33만 872명이고, 이중 첫 출산 연령을 초과한 대학원생은 17만 6천 320명이다. 한편, 서울대에 재학 중인 1만1천 명의 대학원생 중 2천5백 명이 기혼 학생이다.
지식 정보화 사회라고 강조하면서도, 지식의 발전을 위해 ‘일’하는 대학원생들에게 우리 사회는 공정한 대우를 해주는 것 같지 않다. 녹록치 않은 액수의 학비를 내야 하고, ‘일’에 대한 경제적 보상도 없는데다가, 출산과 육아에 따른 지원도 받지 못하다니…. 게다가 학생 신분에 결혼을 하고 자녀를 낳는 것에 대해서도 곱지 않은 눈총을 받아야 한다.
얼마 전 타계한 싱가폴의 리콴유 총리는 공부를 많이 한 여성들이 아이를 많이 낳도록 우생학적인 정책을 실시해 세계를 경악시킨 적이 있다. 나 역시 책에서 그런 내용을 접하고 많이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나는 지금 한국의 엄마대학원생의 처지가 못지 않게 놀랍다. 공부를 한다는 이유로, 아이를 낳고 부모가 될 자격이 없는 취급을 당하며 공적 지원에서 소외되는 이 현실도 만만치 않게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 ▣ 서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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