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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노동 스트레스, 소비자도 ‘이해한다’
진상 고객 vs. 피해 노동자 대립 구도를 넘어서 
 

 

“사랑합니다. 고객님!” 하는 콜센터 직원의 인사나, 또는 무릎을 꿇고 주문을 받는 음식점 서빙 직원의 친절함에 고객으로서 당황한 적이 있을 것이다. 소비자들은 서비스 노동자의 과도한 친절이나 감정노동에 불편함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그런데 최근 ‘갑질’하는 소비자가 언론에 집중 보도되면서 감정노동자와 소비자의 관계가 ‘진상 고객 vs. 피해를 입는 노동자’ 대립 구도로만 비춰지고 있다.

 

서비스 산업에 종사하는 감정노동자가 최소 7백만 명으로 추산되고 있는 현실에서, 감정노동자와 이들이 응대하는 소비자 간의 문제는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가 되고 있다.

 

입주민의 폭언에 스트레스를 받은 아파트 경비원, 콜센터에서 텔레마케터로 일하는 노동자, 민원인 응대를 맡고 있는 사회복지 공무원들이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고 있는 현실. 어디에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할까?

 

감정노동자와 소비자의 생각 크게 다르지 않아

 

지난 1월 17일과 18일 이틀에 걸쳐 일과 건강, 노동환경건강연구소가 주관한 <2015 노동자 건강권 포럼>이 열렸다. 이 중 “감정노동자, 이제 보호의 품 안으로” 포럼에서는 감정노동자와 소비자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감정노동 문제 해결을 위한 전국네트워크’(이하 감정노동네트워크)와 녹색소비자연대가 공동으로 실시한 이번 설문조사는 판매직, 콜센터노동자, 공무원 등의 감정노동자 692명과 소비자 1천 명을 대상으로 했다.

 

조사 결과, 감정노동을 하는 노동자들의 83%가 고객으로부터 ‘불쾌함’(인격무시, 욕설, 폭력, 성희롱, 무리한 요구 등)을 겪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중 22.9%는 자주 이러한 경험을 하고 있었다.

 

           ▲  민우회에서 진행한 시민실천 캠페인 ‘존중’이 오가는 백화점 만들기    ©출처: 한국여성민우회 

 

한편, 소비자에게 ‘백화점이나 마트, 구청이나 주민센터, 식당, 기업의 상담전화 등에서 직/간접적으로 만나는 직원들로부터 서비스를 제공받으면서 불쾌함을 겪은 적이 있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67%의 소비자가 ‘있다’고 응답했다.

 

주목할 만 한 점은 감정노동자가 고객 응대 업무를 하면서 가장 큰 스트레스를 받는 요인에 대해 감정노동자와 소비자, 양측이 유사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감정노동자들이 업무를 하면서 겪는 가장 큰 스트레스는 무엇일까’ 묻는 질문에 감정노동자와 소비자 모두 ‘무시(반말)’, ‘부당한 요구’를 우선으로 꼽았다.

 

설문조사 결과를 발표한 한임인 노동환경건강연구소 연구원은 “노동자의 생각과 소비자의 생각이 평행선을 달리는 게 아니라 서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는 의미”라고 분석했다.

 

‘직무훈련은 별로 안하고 과도한 친절 강요’

 

한임인 연구원은 최근 ‘진상’ 고객들의 행태가 언론에서 다뤄지면서 “소비자들이 갑자기 소비권을 가진 주체에서 가해자 집단으로 폄하되고 있다”면서, “진상으로 불리는 안하무인 형 일부 소비자도 있지만 다수 소비자의 항의에는 이유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말했다.

 

‘서비스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 묻는 질문에, 소비자들은 ‘내가 필요한 정보를 제대로 주지 않아서’가 26.7%, ‘내가 필요로 하는 서비스 내용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아서’가 20.6%인 것으로 드러났다. 또한 ‘(노동자)본인이 해결하지 않고 서비스를 다른 사람한테 돌려서’가 19.2%였다.

 

반면 ‘고객 응대를 하면서 웃지 않아서’라는 답변은 9.5%, ‘일어서서 고객을 응대하지 않아서’는 5.7%에 불과했다.

 

이는 사업주가 감정노동자에게 강요하는 친절한 웃음이나 서서 응대하는 것 등은 소비자들이 원하는 핵심적인 요구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결과다.

 

오히려 소비자들의 67%는 자신을 응대하는 노동자가 ‘과도하게 친절해서’ 불편했던 경험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기업에서 진행하고 있는 서비스 교육이 소비자의 욕구를 해결하는데 실질적인 도움이 되기보다는 표면적인 고객 응대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뜻이다.
 

              ▲  감정노동네트워크와 녹색소비자연대가 진행한 <감정노동자, 소비자 의식실태조사 결과>   

 

감정노동자들 또한 현재 진행되는 서비스 교육의 문제점에 대해서 33.8%가 ‘주기적인 직무훈련(상품이나 서비스에 대한 정확한 정보 제공)이 필요하다’, 21.7%가 ‘현재의 고객만족 교육으로는 소비자 욕구를 만족시키는 데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답했다.

 

한인임 연구원은 “기업에서 직무훈련은 별로 안하고 고객 만족을 위한 교육만 한다. 알맹이 없는 친절 서비스 교육이 오히려 소비자의 의식을 왜곡시킬 우려도 있다”고 말했다.

 

소비자의 요구 들어줄 수 없는 열악한 노동환경

 

이날 포럼에서 이성종 감정노동네트워크 집행위원장은 “감정노동은 고객을 응대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감정’의 문제도 있지만, 감정노동자가 일하는 불안정한 환경과도 관련돼 있다”고 밝혔다. 소비자들의 항의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이면에는 감정노동자가 소비자의 요구를 들어줄 수 없는 물리적 환경이 있다는 얘기다.

 

설문조사에서 감정노동자들은 서비스를 제대로 못하는 이유에 대해 45%가 ‘일손이 모자라 바빠서’, 33.6%가 ‘낮은 근로 조건과 고용 불안 때문에 잘 해야 한다는 생각이 안 들어서’라고 대답했다.

 

한인임 연구원은 “이유 있는 불만을 가진 소비자와 이에 제대로 응대하지 못해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겪는 노동자는 양쪽 다 피해자”라고 말했다.

 

한 연구원은 이 피해의 제공자는 바로 기업이라면서, “과도한 영업 목표, 부족한 노동자 직무 훈련, 불충분한 휴식 등 열악한 노동환경, 악성고객 관리 시스템 부재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업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성종 집행위원장은 “제조업 노동자에게 폭발물 붕괴 등 위험한 사고가 예상될 때 작업을 중단할 수 있는 ‘작업중지권’이 보장돼 있듯이, 감정노동자들도 욕설을 퍼붓거나 성희롱하는 고객을 피할 권리를 보장받아야 한다”고 요구했다.

 

더불어 “노동 관련 법안에 감정노동의 정의를 명시하고, 감정노동자가 업무 과정에서 발생하는 스트레스에 대해 산업재해로 인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1월 13일, 대통령 업무 보고에서 감정노동자의 업무상 질병 인정 기준을 하반기에 마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 나랑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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