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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보다 사랑이 강하다!
2014 퀴어문화축제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하고
몸살을 앓았다. 아직도 손목이 아프다. 지난 7일, 제15회 퀴어문화축제(Korea Queer Festival) ‘퀴어 퍼레이드’에서 행렬을 이끄는 무지개 손수레를 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버이연합과 보수 기독교단체로 구성된 동성애-혐오주의자들의 조직적인 반대 움직임에 의해, 퀴어 퍼레이드 행렬은 4시간 가까이 길이 막혔다. 무지개 손수레는 연세대학교 앞 큰 도로에 나오기 전엔 스피커도 틀지 못한 채 살금살금 옮겨졌고, 차도에 도착해서야 1년 중 겨우 하루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퀴어’들처럼 간신히 숨통을 틔울 수 있었다. 나와 손수레를 함께 밀었던 파트너는 순간 눈물을 흘렸다.
▲ 다양성을 상징하는 무지개 매니큐어를 바른 파트너와 나 © 이충열
이 대목에서, 나와 내 파트너를 당연히 동성애 커플로 이해한다면 이 또한 고정관념일 뿐이라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우리 사회에서 매우 ‘여성적’으로 잘(?) 훈련되어 온 ‘여성’이고, 나의 파트너 역시 ‘남성적’으로 학습되어 온 ‘남성’이다.
게다가 나는 30년 가까이 개신교 교회에서 주일학교 교사와 성가대 등의 활동을 했고, 파트너는 태어나면서부터 20년간 독실한 천주교인이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날 동성애를 ‘죄’라고 규정하며 마치 자신이 하나님인 양 심판하려 드는 기독교인들에 맞섰다.
통성기도를 하며 드러눕는 기독교인들 바로 앞에 ‘동성애 혐오에 반대한다’는 손피켓을 들고 서 있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이 아팠다. 그들의 귀가 열려있다면 “당신들의 주장을 위해 수단으로 이용하는 하나님 말씀의 핵심은 ‘혐오’나 ‘응징’이 아니라, ‘구원’과 ‘사랑’이다.” 라고 이야기하고 싶었다.
이날 나는 그 누구에게도 들어본 적 없는 욕설 세례를 받았다. 그들은 또 퀴어 퍼레이드에 참여한 외국인에게 ‘너희 나라로 돌아가라’ 했다. 퀴어 페스티벌이 저지당하자, 안타까운 마음에 그들 사이로 들어가 “No!” 라고 외친 외국인 두 명은 앉아있던 중년여성에게 얻어맞았다.
성경의 일부를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동성애를 ‘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할 일이다. 또, 동성애에 반감을 가질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자신의 마음에 동성애가 들어오는 것을 극복하면 될 일이다. 하지만 동성애 혐오주의자들은 동성애자들과 동성애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을 ‘악마’라 규정했고, 그들의 존재를 부정했고, 폭력을 행사했다.
‘세월호 추모제’를 가장한 동성애 혐오 농성
▲ 오후 2시경 신촌역 앞. "동성애는 사랑이 아니라 끊어버려야 할 죄악입니다" 등의 피켓을 든 사람들. © 이충열
가장 분노스러웠던 것은 이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세월호 추모제’로 가장했다는 것이다.
오후 두시쯤 신촌역부터 연세로에 가득한 퀴어 페스티벌 행사부스들을 인파에 섞여 즐겁게 둘러보았다. 그런데 연세대 방향으로 좀더 걸어가자 경찰들이 보였다. 그 너머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노란 리본과 세월호 관련 현수막이 걸려있어서 ‘추모 문화제인가보다’ 생각했지만, 퍼레이드의 경로를 막고 있는 것이 의아했다. 가까이 가보니 참여한 사람들은 무대에 집중하지도 않았고, 주말마다 볼 수 있었던 ‘세월호 추모제’의 분위가와는 달랐다. 아무도 노란리본을 달지 않았다.
“퀴어 퍼레이드가 5시 반에 있으니 7시까지 이 자리를 지켜서 그들을 막읍시다!” 진행자의 발언을 듣고서야 그들의 정체를 알았다.
서명지도 돌리고 있었는데, ‘세월호 진상규명’에 대한 것이 아니라 ‘동성애 집회 반대 서명’이었다. 어떤 여성분이 서명지를 내밀어서 “저는 안 해요.” 라고 했더니 화를 내며 “해야 한다”고 더 들이밀었다. 그 광기어린 눈빛을 보면서 퀴어 퍼레이드가 쉽지 않겠다는 것을 예감했다.
하지만 이들이 4시간이나 연좌하고 기도하며 누워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특히 세월호 추모제로 둔갑해 있다가, 이들로 인해 길이 막힌 퀴어 퍼레이드가 경로를 바꾸었을 때 본색을 드러낸 것이 정말 무서웠다. 군가를 틀어놓고, 연좌해 앉아서 “대~한민국!”을 외치며 ‘짝짝짝 짝 짝’ 박수를 칠 때는 집단적 광기에 소름이 끼쳤다.
▲ 퀴어 페스티벌 행렬을 막고서, 드러누워 기도하는 동성애 혐오주의자들 © 이충열
연좌의 앞자리에 가장 어린 사람들을 앉힌 것도 놀라웠다. 동성애 혐오주의자들은 대부분 40대 이상의 여성과 60대 이상의 남성들이었는데, 10대 후반에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불러내어 맨 앞에 앉히는 과정을 보았다. 촛불집회에서 경찰들과 대치할 때, 어른들은 학생들을 안전하게 뒤로 오게 하려하고, 오히려 학생들이 맞서겠다며 앞으로 오는 상황과 반대되는 풍경이었다.
손피켓을 들고 서 있는 나에게 계속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이 있었는데, ‘khTV’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동성애 혐오를 조장하는, 후원회원 15명의 유령방송이었다. 퀴어 페스티벌을 취재하는 대부분의 카메라가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태도와 비교되었다.
사랑이 이긴다! Love Conquers Hate
“대~한민국!”을 연호하다가 기도하기를 반복하는 그들을 보고 있는 것이 괴로웠다. 나의 가족 모두 교회에 다니고 있고, 어쩌면 저들 속에 내가 아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는 것도 힘들었다. 그래서 퍼레이드가 진행되기를 기다리며 즐기고 있는, 1년 내내 기대하고 준비한 행사를 방해하는 사람들에게 화도 내지 않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돌아왔다.
▲ 오후 6시경 이대 방면, 동성애 혐오주의자들에게 막힌 퀴어 퍼레이드 행렬 © 이충열
원래는 퍼레이드 후에 가질 예정이었던 무대 공연을 하며 퀴어 페스티벌 참여자들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저녁 9시 40분쯤 드디어 다시 방향을 바꾸어 원래 경로인 연세대 앞쪽으로 퍼레이드를 시작했지만, 5분도 안 되어 멈추었다.
목발 짚은 남성이 무지개 손수레 앞에 누워 퍼레이드를 막고 있었다. 참여자들은 그를 끌어내지도 않고 ‘비켜주세요’라고 요청했다. 보다 못한 기자분이 경찰에게 항의했지만 경찰은 그를 일으키거나 제지하지 않고 ‘기다리라’고만 했다.
이때 한 외국인 남성이 그분 옆에 누워서 ‘사랑해 당신을. 정말로 사랑해~’ 노래를 부르자 사람들이 따라 불렀고, 심각했던 대치 상황은 웃음으로 바뀌었다. 잠시 뒤에 길을 가로막고 있던 동성애 혐오주의자들의 무대 차량이 이동하면서, 무지개 손수레는 움직일 수 있게 되었다.
역대 퀴어 퍼레이드 최장거리라곤 하지만 언제 또 길이 막힐 지 몰라 빨리 이동해서 20여분 만에 끝이 났다. 예전에 퍼레이드에 참여했을 땐 천천히 걷다가 멈춰 춤추며 즐기곤 했는데, 이번에는 양 옆에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계속 걷기만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퀴어 퍼레이드는 진행되었다. ‘사랑은 혐오보다 강하다’(Love Conquers Hate)를 슬로건으로 한 퀴어문화축제답게, 긴 시간 좌절하고 분노했을 퀴어 퍼레이드 참여자들은 혐오주의자들과 싸우지 않았고, 포기하지 않았고, 기다렸고, 결국 해냈다. ‘혐오보다 사랑이 강하다’는 것을 증명해낸 것이다!
‘약자를 사랑하는 것’이 기독교인의 본분 아닌가
▲ '퀴어와 함께하는 그리스도인들'도 퀴어 페스티벌에 참여했다. © 김재상
연세로로 돌아와 퀴어 퍼레이드를 마치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아직도 누워있을 ‘기독교’인들과 이곳에서 함께 억압과 차별에 저항하며 각자의 선택을 지지하고 축복하는 ‘기독교’인들이 대한민국에 공존한다. 그리고 아직도 ‘인권’의 개념이 없고, 개인의 ‘선택’에 대한 존중이 없는 사회에 내가 살고 있다.
나 역시 이성애만 강요받고 살았고, 지금 이성애를 하고 있으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성별을 바꾸기를 원할 수도 있고, 언젠가 내가 사랑하게 될 사람이 동성일 수도 있고, 또 내가 무성애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며, 우리의 정체성은 계속 변화한다. 자신의 정체성을 고정시키면서 다른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배제하고 억압하려는 것은 사실 자존감의 부족과 두려움 때문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억압의 근거로 성경을 ‘이용’하는 것은 기독교가 역사적으로 참회해야 할 일이지, 계속 그렇게 밀어붙일 일이 아니다. 이천년 전 예수는 불평등한 사회의 구조와 율법의 모순에 저항했다. 이천년 전 기록되어 언어와 문화에 따라 번역되고 기득권 세력에 의해 끊임없이 변형된 성경 안에만 ‘하나님’을 가두지 말고, 의식을 일깨워 현존하는 ‘하나님’을 만났으면 좋겠다. 그리고 ‘예수님의 모습’을 닮는 것이 크리스천의 중요한 본분임을 잊지 않으면 좋겠다.
‘약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 사회의 구조와 체제가 만든 기준에 의해 만들어진다. 예수의 뜻을 따라 진정으로 약자를 사랑하려면, 불의하고 불평등한 기준들에 맞서야 할 것이다. ‘바리새인’들처럼 율법을 당위적으로 주장하며 자신들의 편견과 모순을 외면하지 말기를 바란다.
▣ 이충열 www.ildaro.com
<여성주의 저널 일다> 페이스북 페이지 https://www.facebook.com/Media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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