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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공백의 발견> 미술을 전공한 성교육 강사 A님


경력단절이라는 꼬리표는 왜 여성에게만 붙을까? 여성들은 왜 노동시장으로부터 단절을 겪게 된 것일까? 출산과 양육만이 경력단절의 이유일까?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에서 여성들의 공백(경력 단절)의 문제와 현실을 알아내기 위해 ‘일하는 여성’들과 만나, 여성노동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짚어보는 인터뷰를 일다와 공동 연재합니다. www.ildaro.com

“육아요?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경력 단절된 거죠” 

통계청이 매달 발표하는 <2013년 6월 고용동향>에 따르면, 청년실업이 악화되고 고학력 백수가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여러 기사들에서 ‘잠재력 높은 고급 인력인 고학력자들의 실업으로 사회적 낭비가 심각하다’고 하면서, 주요 원인으로 30~40대 고학력 여성의 육아 문제를 들고 있었다. 고학력 비경제활동 인구의 74%가 여성이기 때문이다.
 
왜 이 여성들이 이른바 백수가 되었을까, 정말로 다들 육아문제 때문에 경력이 단절되었을까, 육아만 해결되었더라면 괜찮았을까, 그 이후에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리고 경력 단절 이후 현재의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살고 있을까? 내 안에서 질문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경력이 단절된 여성들의 생생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며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A님은 “딱 내 얘기네요, 내 얘기!” 하며 반색하였다. 12살, 7살 두 아이의 엄마이고, 최근 아동.청소년 성교육 및 미디어교육 강사로 활동을 시작한 A님. 작년 민우회에서 실시한 성폭력 전문상담원 교육을 비롯해, 수년간 여러 기관들의 아동, 청소년 관련 전문강좌들을 두루 수강하였다. 강좌도 열심히 듣고, 세미나에도 적극 참여하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다. 결혼 전에는 무슨 일을 하셨을까?
 
대학 강단에 “여자는 필요 없다”
 
“대학에서 4년 정도 미술 강사를 했어요.”  

▲ "교수님이 대놓고 ‘여자는 필요 없다’고 하셨죠. 예술계에서는 심각한 문제에요."    © 일다 
 
동양화 전공이라니, 평소에 왠지 모르게 차분하고 단아한 분위기가 느껴지던 A님과 잘 어울리는 전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에서 강의를 할 정도면 꽤 오랫동안 공부를 했을 것이다.
 
“강사를 하기 위해 대학 때부터 계속 스펙을 쌓아야 했어요. 일단 석사 학위가 있어야 하구요. 미술전에 입상해서 최소한 12점을 따야해요. 한 대회가 1년에 한두 번인데, 대회당 1점이고, 입상만 하면 안되고 두번 이상 특선(3점)이 포함되어야 해요. 전국 단위이면 가산점이 있고요. 1년에 한 번씩은 개인전을 해야 하죠. 대학원 다니고 실업자 상태에서 결혼을 했어요.”
 
듣고 있자니 입이 떡 벌어진다. 그런데 대학원에 다니고 각종 대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이 길고 고단한 과정을 A님은 “실업자 상태”라고 표현했다. 대학 강사직에 필요한 어마어마한 스펙을 다 갖추고 나서도 만만치 않은 현실이 있었다. 학계의 특성 상 대학원생은 지도교수에게 자신의 진로와 미래를 완전히 의존해야 하는 절대 ‘을’일 수밖에 없다.
 
“교수님이 대놓고 ‘여자는 필요 없다’고 하셨죠. 예술계에서는 심각한 문제에요. 이쪽 일이라는 게 교수님이 자기 강의를 떼어서 제자들에게 나눠주는 식이거든요. 여성들이 많이 선택하는 전공이지만, 위에서 기득권을 가진 남자교수들이 남자만 키우는 거예요. ‘결혼하고 육아를 해야 하는 여자가 교수까지는 힘들다, 하다못해 자기 전시회에 작품을 걸어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면서. 제가 결혼한 걸 못마땅해하셨죠. 작품은 하고 있냐고 계속 체크하시고. 그래도 일을 주셔서 정말 감사한 마음이었어요.”
 
첫 아이를 낳고 나서 드디어 2년 계약직으로 첫 강사 채용이 됐지만, 1년 만에 곧 둘째가 들어섰다. 어렵게 일을 받았는데 교수님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왜 일하는 여성은 결혼하고 임신하는 것을 미안해해야 하는 걸까!
 
최근 한 취업포털사이트의 설문조사 결과가 떠올랐다. 대다수 직장인들이 우리 사회에서 결혼은 ‘남성에게는 더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원동력이고, 여성에게는 걸림돌’이라고 대답했다. 아직도 학교에서든 기업에서든 어딜 가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공공연한 차별에 부딪히는 현실이다.
 
그 와중에도 둘째 모유수유를 18개월 했단다. “저 미쳤죠?” 라며 허허허 웃으셨지만, 아이들을 맡기고 젖 먹이느라 불은 가슴을 안고 지방을 오가던 한 시간 강사의 고군분투가 눈앞에 그려졌다. 안쓰럽기도 하지만, 생애 처음으로 좋아하는 일을 시작하게 되어 신이 났으리라.
 
2년 계약만료 전, 시간강사 무더기 해고 사태
 
그렇게 두 아이의 엄마로, 열혈 강사로 활동하던 중에 2007년 비정규직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기간제법’이 제정되었다. 2년 이상 채용할 경우 정규직화해야 한다는 법조항이 생기자, 현장에서는 오히려 가장 열악한 노동 지위에 있는 시간강사들이 무더기 해고되는 사태가 속출했다. 

▲ 기간제법으로 2년 이상 채용시 정규직화해야 하는 법조항이 생기자, 대학들은 2년 계약 만료 전에 강사들을 무더기 해고했다.  ©'대학강사 교원지위 회복과 대학교육 정상화 투쟁본부' 제공 
 
정규직화를 요구하는 강사들의 집회가 전국적으로 이어졌다. A님도 그 시기와 맞물리면서, 2년의 계약기간 중에서 1년 6개월을 일한 뒤 한 학기를 남기고 해고되었다. 6개월만 더 일하면 학교에서 정규직으로 전환해주어야 하니까, 계약기간이 만료되기도 전에 해고한 것이다. 명백한 부당해고다.
 
“경력단절이 육아 때문이라고들 하지만… 허허허, 저는 정말 비정규직이기 때문에 단절된 거예요.”
 
주위의 여자 선후배들이 꿈을 좇으며 강사로, 교수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았다면 달랐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실력이 뛰어나도, 교수에게 절대 충성하면서 오랜 세월을 보내고 나서도, 결국은 남자들에 밀려 탈락하고 꿈을 접고 마는 모습들을 지켜보며, A님도 어쩔 수 없이 그 길을 포기해야 했단다.
 
“그러고 나니까 회의가 들죠. 아이들 가르치는 게 내 소명일까, 그냥 그림 그리는 게 좋아서 시작한 일인데 전업 작가로 전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고. 일이 들어왔으면 계속 했겠지만 일도 더 이상 들어오지 않아서 너무 힘들었어요. 계속 박사 학위도 따고 하려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야 버티는데, 저는 그것도 아니고 애매했죠.”
 
공백을 겪고 나니 ‘적성, 경력은 의미없어져’
 
“일을 쉬다가, 나이 들어서도 계속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했어요. 신문을 보면서 유망직종이라고 하는 직업들을 찾기 시작했어요. 보이는 것들이 온통 사회복지, 노인복지, 요양보호사 이런 것들. 그런데 공백 기간을 겪고 나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지금 당장 직업이 없더라도 준비를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죠. 티비에 수공예 같은 것만 많이 나오고. 그냥 신문에서 많이 보이는 직업을 알아본 거죠. 내 적성이나 경력 이런 것은 상관없었어요.”
 
XX여성인력개발센터, 00여성발전센터, YY여성능력개발원, OO여성새로일하기 지원센터, ZZ여성비전센터…. 발음하기도 어렵고 이름이 비슷비슷해서 뭐가 뭔지 구별도 잘 안가는 기관들이 지역마다 분포되어 있다. 여성고용정책의 거의 대부분 예산이 여기에 투여된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 경력단절 여성의 취업을 돕고, 취업정보와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전국에 설립한 기관들이다. 그런데 A님은 한 번도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A님 뿐 아니라 인터뷰를 통해 만난 여성들 대부분 이러한 정보나 도움을 받지 못했다고 말하고 있다. 정부 정책이 실제 취업을 원하는 여성들에게 제대로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 이유가 도대체 무엇일까?
 
“정부에서 이런 일자리에 대한 계획이 있다면, 사람들이 쉽게 볼 수 있고 알 수 있도록 공익광고 같은 걸 했으면 좋겠어요. ‘이런 사이트가 있고 어디 기관이 있으니 오세요’라든지. 주부들이 ‘이런 일을 하려면 무슨 교육을 듣고 이런 경로를 따라 가면 되겠구나’알 수 있게 구체적인 가이드맵이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지식이 되고, 발전할 수 있는 일을 찾았어요’
 
예전에 해온 일과는 완전히 다른 분야인데, 성교육 강사 일은 어떻게 알아보고 시작하게 된 걸까?
 
“지인 중에 시민단체에서 일하던 분이 있었어요. 이런 교육이 있으니 들어봐라 권유를 했는데, 들어보니 너무 좋고, 또 나에게 필요한 게 뭐가 있을까 찾던 중에 딱 맞아 떨어졌죠. 나한테 도움이 되는, 교양이나 지식으로 쌓일 수 있는 걸 찾고 있었어요. 제일 좋은 것은 우리 아이한테도 적용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이전에는 인권이나 사회 문제에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이 일을 준비하고 교육을 들으면서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 느꼈다. 왜 이것이 성폭력인지, 이 영상이 보여주는 의미는 무엇인지, 그 사건의 숨은 배경이 무엇인지. 사회의 흐름을 읽는 눈도 키워야 하고 스스로 많이 변화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A님은 경쟁력 있는 아동청소년 교육 강사로 발전하기 위해 갖춰야 할 조건으로, 좋은 강의안과 함께 ‘인권의식’을 중요하게 꼽았다.
 
일주일에 두세 강의정도, 강의료는 한 회에 5~7만원, 원고료까지 받으면 많게는 15만원까지 받는다. 그렇게 해서 한 달에 주어지는 소득은 생계에 턱없이 부족할 듯하다. 일은 어떤 식으로 들어올까? 그리고 더 많은 일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처음엔 지인 소개로 강의를 나갔고요. 민우회나 가족상담소로 강의가 들어오면 배분 받는다든지 해요. 그리고 운이 좋으면 그 다음 해에도 불러주시는 거고. 또 매년 받아야 하는 의무교육이기 때문에 해당 학교에서 다른 학교에 소개해주기도 하구요. 어떤 선생님은 찾아뵙고 연락드리고 적극적으로 (홍보)하시는 분도 계세요. 열정적이어야 이 일을 하잖아요.”
 
고용노동부가 발간한 <주부재취업 도전직업 60>에는 성교육 강사가 당당하게 유망 직종으로 소개되어 있다. “수입 면에서 크게 기대를 하지 않는 것이 좋아요.” 라는 조언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어느 정도 꾸준하고 안정적인 수입을 원하는 사람이라면 참 막막할 것 같다. 한동안 공백을 경험한 후 처음으로 성교육 강사 일을 시작하게 되었을 때, 가장 어려웠던 점은 무엇이었는지 여쭤보았다.
 
“마음 같아서는 열심히 활동하고 싶죠. 강의안도 잘 만들고 싶고, 교육모임도 활발하게 나가고 싶지만, 항상 아이들이 걸리는 거예요. 처음엔 시간 조절하는 것이 너무 힘들었어요. 일 들어오는 건데 시간을 제가 된다, 안 된다 할 수 없잖아요. 우선은 가족에게 이해해달라 설득하고 설명했어요. 지금은 미리 교육을 배분받을 때 요령껏 조정할 수 있어요. 아직은 활동할 수 있는 게 너무 제한적이라 적당하게 유지라도 하고, 이렇게 꾸준히하다보면 십년쯤 뒤엔 그래도 많이 달라져 있지 않을까요?”
 
인생 이모작 시대, 그녀의 힘찬 걸음을 응원하며
 
마지막 질문으로 미술에 대한 미련이 있는지 조심스럽게 물어보자, A님은 “완전 있죠!” 라며 아쉬움을 내비쳤다. 만약 대한민국 미술계가 여성이 살아남기 힘든 지금과 같은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A님은 계속해서 쭉 미술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지 않을까?
 
“하고 있을 것 같아요. 고등학교 때부터 내내 꿈꿔왔던 일이니까요. 정교수까지는 안 되더라도 정말 저의 일이 되었겠죠. 일주일에 두세 번 강의 나가서 50만 원 정도 버는 건, 지금 성교육 강사 일의 조건하고 똑같잖아요. 지금은 새로운 걸 배우고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면서 보람을 느끼지만, 대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은 또 성인과 성인 간에 있어 일방적이지 않은 어떤 교류라는 게 있으니까요. 하지만 지금 와서 다시 하라면 못할 것 같아요. 너무 오랫동안 그림을 놓았기 때문에 실력도 그렇고. 처음에 교수님이 키워주고 강의를 줘야 하고, 그것을 발판으로 몇 년 동안 개인적으로 이력을 쌓아야 하고…. 너무 먼 것 같아요.”
 
기대수명 100세 시대, 인생 이모작이라는 말이 유행이 된 지금, 이제는 누구나 일생동안 몇몇 개의 직업을 거치게 될 것이다. 다양한 일자리에 대한 정보가 충분히 제공되고, 성별에 따라 차별 받지 않으며, 각자의 적성과 경력이 존중되는 노동시장을 원한다. 다시 시작된 A님의 노동 이야기는 앞으로 더 신명나고 기운차게 펼쳐질 것이라 믿는다. ▣ 김나현

※ 이 기사는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womenlink1987.tistory.com)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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