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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백의 발견> 경력단절이 아니라 ‘일의 재구성’ 아닐까?   

경력단절이라는 꼬리표는 왜 여성에게만 붙을까? 여성들은 왜 노동시장으로부터 단절을 겪게 된 것일까? 출산과 양육만이 경력단절의 이유일까? 한국여성민우회 여성노동팀에서 여성들의 공백(경력 단절)의 문제와 현실을 알아내기 위해 ‘일하는 여성’들과 만나, 여성노동의 핵심적인 문제들을 짚어보는 인터뷰를 일다와 공동 연재합니다. www.ildaro.com
 
"이력서를 아무리 넣어도 연락이 안 와요"
 
아이를 키우며 직장에 다니고 있는 45세의 S님. 지금 일하는 곳에 입사한 지 1년 정도 되었다 하니 얼마나 바쁠까. 인터뷰할 시간을 내줄 수 있을지 걱정되는 마음으로 전화를 했다. 야근이 없는 괜찮은 직장에 다닌다고 한다. 저녁시간을 뺏는 것에 대한 부담을 접고, 오후 7시에 S님의 집 근처 카페에서 만났다.
 
S님은 민우회 회원이라 몇 번 뵌 적이 있다. 인상 좋은 건 여전하다. 조용한 분으로만 보았는데, 질문을꺼내놓으니 시원시원하게 자신의 노동 역사를 이야기해주었다. 먼저, 야근이 없다는 지금 직장에서 어떻게 일하게 되었는지 여쭈어보았다.
 
"작년에 자격증 시험을 보고 나서, 취업이 잘 될 거라는 생각은 안 했는데 진짜 안 되더라고요. 정말 아침에 눈뜨면 구인사이트 가서 보고. 이력서를 남발해도 연락이 안 와요. 사회복지사가 필요하다고 하는 데는 일단 다 넣었어요. 면접을 두세 군데 봤나. 그 중에 하나였어요."
 
눈만 뜨면 구인사이트를 확인하게 되는 그 심리. 어제와 같은 오늘이 아닌,다른 내일을 기대하는 구직자의 마음은 똑같은가 보다. 아침에 출근하여 저녁에 퇴근하는 존재가 되고 싶은 열망은 성별을 떠나서, 나이를 떠나서, 그리고 경력 단절 여부를 떠나서 비슷한 것 같다. 

노동시장에서 여성들이 겪는 경력단절을 그린 이수경의 카툰.

퇴사하고 아이에게 소홀했던 게 미안해서…
 
대학교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해야 사회복지사가 될 수 있다고생각했는데, 사회복지사를 위한 교육 과정은 다양한 편이다. 대학뿐 아니라 평생교육원, 사이버대학 등을 통해 배우고 시험을 보고 실습을 하면 큰 어려움 없이 국가자격증을 딸 수 있다. 돌봄(care)을 바탕으로 하는 일이라 다른 분야에 비해 여성들에게 열려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주위에 사회복지사가 되려는 여성들이 많은 것 같다. S님은 어떤 생각으로 사회복지 일에 눈을 돌리게 된 걸까.
 
“독서지도사를 하면서 애들에 대해서 궁금해졌어요. ‘어머, 얘는 이렇게 얘기하고 쟤는 저렇게 얘기하네.’ 얘가 말하는 거랑 쟤가 말하는 거랑 다른 거에요. 한 번 심리상담을 배워볼까, 마침 OO대학교 평생교육원에 심리상담 1학기 코스가 있어서 들어보자 싶었어요."
 
독서지도사로 일하다가 아이들에게 관심이 생겨서 심리상담을 배우고 현재의 사회복지사가 되었다는 얘기였다. 그렇다면 독서지도사는 어떻게 시작한 것일까.
 
“집에 있으니까 너무 심심하더라고요. 그래서 여성인력개발센터에 배울 거 없나 하고 봤어요. 제가 첫째한테 너무 소홀한 게 미안해서 부모교육 같은 걸 배워볼까 하면서 뒤졌죠."
 
18년 동안 일했던 첫 직장은 전일제여서, 친정어머니에게 첫 아이를 맡기고일했다고 한다. 직장을 그만두니 아이는 어느새 초등학생. 회사 다니느라 못했던 책 읽어주기 같은 돌봄을 해주려고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이어지게 된 일이 독서지도사였다.
 
“강의를 듣고 되게 재미있었어요. 아, 이 동화책에 그런 내용이 있다는 걸 예전에는 몰랐는데. 그러던 중에 강사 분이 아는 협회가 있는데 ‘독서지도’ 이런 게 있다고 그래서 그럼 해볼까."
 
‘독서지도사’라는 이름의 방문판매 일
 
그렇게 무겁지 않은 마음으로, S님은 첫 직장을 그만두고 거의 바로 독서지도사 일을 시작했다고 한다. 공부하고 독서지도사 일을 하면서 둘째를 낳았다. 이제 돌봐야 할 아이가 둘. 다시 친정어머니에게 도움을 받았지만, 하나만 있었을 때보다 돌봄의 시간이 배 이상 들었으리라.
 
독서지도사 일이 다행이었던 건, 자율적으로 시간을 짤 수 있고 예전 직장처럼 하루 전체를 잡아먹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일도 해야 하고 아이 양육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여성노동자. 워킹맘으로서 S님은 3년 간 독서지도사라는 이름으로 월급이 아닌 교재 판매비를 받는 프리랜서(방문 판매)일을 했다.
 
“협회에 가입하고 교재를 받아서 그걸 가지고 제가 방문을 하는 거에요."
 
학습지 교사처럼 특수고용노동자였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협회에서 한 사람당 얼마 지정해주는 게 있어요. 2대 8로. 2가 교재비이고 8이 제 걸로 가죠. 학생들을 처음에는 연결해주는데 다음부터는 제 능력으로 해야 하죠. 쉽지 않더라고요. 이거 해가지고 수입 이렇게 생각하면 안 되겠더라고."
 
팀 별로 일주일에 한 번 2시간씩 가르치는 일이었는데, 많이 굴렸을 때는 5팀까지 했단다. 회사에 교재비를 떼주고 손에 들어오는 수입은 월 1백만원 정도. 액수도 적었지만, 독서지도사를 하면서 힘들었던 점은 가르치는 아이들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엄마들 간의 관계였다고 한다. 엄마들끼리 사이가 좋으면 계속 팀이 유지되지만, 한 명이라도 틀어지면 아이들에게도 영향이 미쳐서 힘들었다고 한다. 영업도 직접 뛰면서 ‘고객’을 관리하는 건 오롯이 S님의 몫이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이라는 점, 전일제가 아니라서 양육과 병행할 수 있었던점 외에는 장점이 보이지 않았다. 양육을 병행하기 위해 ‘부모 노동자’에게 시간제 일자리가 필요한 시기가 있지만 그 시기 이후에는? 경력단절 여성에게 필요한 건, 시간제 일자리만이 아니라 더 다양한 조건을 고려한 정책이 아닐까. 일하고자 하는 여성들의 욕구와 이들이 처한 조건은 단일하지 않다.
 
"그땐 회사에 올인했어요. 철이 없었죠"
 
마지막 하나 남은 팀이 ‘쫑’나고 시작한 일이 바로 지금하고 있는 사회복지사 일이다. 첫 직장에서는 회계 관련법을 다루는 일을 했고, 그 다음 독서지도사, 그리고 사회복지사가 된 것이다. 아이들에 대한 관심에서 이어진 심리공부에 연결되어 하게 된 일이다. 독서지도사와 사회복지사는 공통 키워드로‘아이들’이 있다.
 
그렇다면 아이들로 묶이지 않는 첫 번째 일, 18년이나 근무했던 첫 직장은 왜 그만두게 되었을까. S님은 상고를 졸업하고 준 공공기관에 취업해서,본점에 있다가 지점으로 옮기고 다시 본점에 와서 과장 직급까지 달았다고 한다. 18년 동안 일한 것에 비하면 승진이 많이 더뎠다. 이유는 ‘직군제’ 차등 때문이다.
 
“여직원 같은 경우에는 처음에는 ‘여 몇 급’ 이런 거 있잖아요. 여자남자 차별하듯이 직급이 아예 달랐죠. 여자는 딱 두 등급밖에 없었어요. 여 5급, 여 6급. 중간에 차별이라 해가지고, 남녀 구분 없이 직급이 합쳐졌어요. 그래서 저하고 같이 들어갔던 동기들은 차장까지도 올라가고 그랬어요."
 
‘성차별 직급제’는 S님이 다녔던 회사뿐만 아니었다. 남자보다 낮은 직급으로 시작해서, 해당 직급의 정해진 정년 나이가 될 때까지 상위 직급으로 승진하지 못하면 반드시 퇴직을 하도록 만든 ‘직급정년제’가 2002년부터 사회적으로 이슈화되었다. 법정으로 간 ‘정영임 40세 조기 직급정년 사건’은 민우회가 함께 대응했고, 2006년 대법원에서 승소 판결을 받았다.
 
“친정 엄마가 첫째를 거의 다 키워주셨죠.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철이 없었구나 생각이 드는 게, 그때 회사에 올인을 했어요. 직급이 합쳐지고 난 다음에 승진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서, 거의 90% 이상을 회사에 올인했어요. 그때는 잘 몰랐는데, 승진 차별이 없어지고 난 다음에는 욕심이 생겨서 이왕이면 더 많이 올라가보자 하고."
 
승진하고 싶다는 욕구로 회사에 올인했던 S님. 그런데 어쩌다 희망퇴직을 ‘희망’하게 된 걸까?
 
“너무 힘들다는 생각을 했었어요. 그런데 딱 마침, 그게 희망퇴직 신청을 하더라고요. 같은 일을 같은 조직 안에서 반복적으로 하고, 발전하는 것보다 퇴보되는 느낌을 받았어요. 올인해도 내 손에 잡히는 건 없는 것 같고. 회사가 남자 위주로 돌아가더라고요. 여자도 승진이 되긴 했지만 중요한 결정은 위에 있는 남자들이 하는 거죠. 여직원들은 올라가봤자 과장이었어요. 과장은 결정권도 없었고. 여기서 죽을 때까지 정년 퇴직해야 한다 생각하니 부담스러웠고. 지금도 회사 사람들 만나면 일 얘기밖에 안 해요. 바깥 세상은 다사다난한데. 일상이 회사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느낌이죠. 너무 답답했어요."

민우회는 노동시간 단축과 배우자 유급 출산휴가제를 요구하고 있다.

18년간 올인 했던 첫 직장에서의 일은 답답증을 유발했다. ‘갑’인 회사는 ‘을’인 노동자에게 끊임없이 ‘이윤 창출을 위한 비전’을 내놓으라 하지만, 반대로 갑은 을에게 ‘삶의 비전’을 제시해주지도 않고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특히 ‘남성 생계부양자’가 노동자의 모델로서 여전히 굳건한 노동시장 현실에서, 갑은 여성노동자에게 더 차별적이다.
 
유리천장을 깨지도 못했는데, 요즘엔 심지어 유리벽장 속에서 일해야 하는 게 여성의 현실 아닌가. 일을 통해 만족을 얻거나 열의를 가지기엔 상당히 어려웠을 것이다. 노동이 고역이 되어 답답증을 겪었던 S님. 그러나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것에 대한 주변의 반응은 아깝다는 여론이 다수였단다. 어머니는 물론 남편의 친구들에게까지도 그녀의 퇴직은 이해 받기 어려웠던 모양이다.
 
“처음 회사를 그만두고 나서 다들 주위에서 난리였어요. 그 좋은 회사를 왜 그만 두냐. 거의 신의 직장에 가까운데. 아무리 일을 개판 쳐놔도 자르지 않죠. 친정엄마도 아깝다며, 그만큼 했는데 그만 두냐고. 엄마도 그렇고 주위 친구들도 그렇고 남편 친구들까지."
 
직장 그만두고 여태 뭐했냐? 묻는 순간
 
아무튼 S님은 이제 사회복지사로서, 답답증을 유발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 첫 직장 동료들은 S님에게 ‘회사 다니던 시절에 사람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 하더니 그런 일을 하고 있구나’ 라고 한단다. 좋아하는 일, 맞는 일을 하면서 더 내공을 쌓고 싶은 건 당연지사. 얼마 전 사회복지대학원을 지원했다. 일하면서 공부하는 건 정말 힘든 일인데, 주경야독을 결심한 S님이 참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S님은 이내 높은 톤의 목소리로 당황스러웠던 경험을 풀어놓았다.
 
“이력서에는 국가자격증만 쓰게 되고. 저는 계속 뭔가를 했다고 생각하는데, 겉으로 드러나는 건 사회복지사 1급 딴 거밖에 없어요. 다른 건 다 설명하겠는데 교수님이 첫 직장 그만두고 여태까지 뭐했냐, 이런 걸 묻는 거에요. 도대체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막막한 거에요. 딱 말문이막혔어요. 이게 딱 경력단절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아니, 그러면 뭔가를 하고 있는 사람만 원서를 낼 수 있는 건가. 집에서 놀던 사람들은 절대로 들어오면 안 되는 건가. 그래서 좀 황당한 마음으로 면접 봤어요. 공부해서 자격증 딴 얘기를 하긴 했지만 머리가 뭔가 비는 느낌. 지금 생각해도 기분 안 좋죠."
 
면접실에 같이 들어간 다른 두 명의 지원자는 사회복지 일의 경력이 10년, 15년 된 분들이었다. 첫 직장을 퇴직한 이후 거의 빈틈 없이 공부하고, 일하고, 아이를 양육하며 나름 알차게 보낸 7년여의 시간이 쏙 베어지는 느낌이었을까.
 
사실 계속 일을 해왔는데 경력 단절이 아니지 않냐고 볼멘소리를 냈더니, S님이 새로운 제안을 했다.
 
"경력 단절이 아니라 재구성되는 거 아닐까요?"
 
아! 경력 단절로 인한 ‘공백’을 끊어진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노동(일)이 재구성되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냐는 것이다. 십분 동의한다. 바쁘게 올인하며 돌아보지 못했던 일상의 균형을 맞추고, 하고 싶은 일을 찾으려 했던 S님. 대학원에 꼭 붙어서 사회복지 일의 경력을 더 쌓아갈 수 있으면 좋겠다.
 
재구성되는 수많은 ‘을’들 특히, 여성의 노동 흐름을 어떻게 반영하고 뒷받침하면 좋을지 고려한 노동 정책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끼게 된 만남이었다. 경력 단절로 인한 공백은 노동이 재구성되는 과정의 일부이다. 사회가 이러한 연장선에서 여성노동자의 경력 단절을 이해해야, 보다 많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보이게 되지 않을까. (강선미 /한국여성민우회 노동팀)
 
[이 기사는 한국여성민우회 블로그 womenlink1987.tistory.com 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유쾌한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실험!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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