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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미니즘> 모순을 극복할 힘을 얻다  (정보름)

<일다>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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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증의 존재, 아버지

<가족>이라는 시가 있다.

“밖에선 / 그토록 빛나고 아름다운 것 / 집에만 가져가면 / 꽃들이 / 화분이 // 다 죽었다” (진은영,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중)
 
볕도 잘 안 드는 단칸방에 다섯 식구가 따닥따닥 붙어살던 시절, 내 인생의 첫 모순은 아버지였다.
 
재료만 있으면 잡다한 장식품부터 커다란 책장까지 이것저것 뚝딱 만들고, 트로트부터 팝송까지 시원시원 잘 부르는데다 온갖 친구들이 주변에 모여드는 좋은 사람. 책에서 찍어낸 것처럼 멋들어진 손 글씨를 쓰고 모나미볼펜 하나로 섬세한 그림 몇 장을 순식간에 그려내던 사람.
 
큰 딸 손을 꼭 잡고 버스 나들이를 즐기던 손재주 좋은 다정한 아버지. 동시에, 할머니와 시댁 가족들의 지독한 시집살이가 힘겨워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몇 번이나 유산의 고비를 넘긴 어머니를 곁에서 다독이기보다 술, 담배, 여자 좋아하는 왁자지껄한 친구들과 집 밖으로 도는 걸 더 좋아했던 사람. 아버지는 직장에 잘 나가다가도 툭하면 그만두고 들어앉기 일쑤였다.
 
어머니는 만삭이었을 때에도 시댁 식구들에게 머리채를 잡히며 온 동네를 끌려 다닐 정도로 지독한 시집살이에 시달렸다. 시집살이의 상당부분은 무조건 아들을 낳아야 한다는 할머니의 강요 때문이었다. 나와 여섯 살 터울로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자 어머니는 큰 짐을 덜은 듯 편안해 했지만 아버지의 한량 기질과 바람기, 손버릇만큼은 그다지 나아지지 않았다.
 
껄껄 웃는 아버지를 시작으로 온 가족이 즐거운 날들이 오래도록 이어지는가 하면, 어느 날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된 듯 아버지는 엄마를 못살게 굴거나 집안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아버지의 양면성에 대한 분노는 그 뒤를 졸졸 따라다니며 곧잘 웃던 큰딸인 내게 긴 시간 동안 꾹꾹 눌러 담아 터지기 일보 직전인 시한폭탄이 되었다.
 
당시에는 너무 어려서 나중에야 알았지만 둘째를 임신한 어머니를 시댁에 맡겨두고 어느 더운 나라 사막으로 일하러 떠났던 아버지가 돌아왔을 무렵, 살던 집의 부족한 세간이 채워졌다거나 살림살이가 나아진 흔적은 딱히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순서대로 책장에 잘 꽂아놓으면 화려한 문양이 이어지고 하나의 그림이 완성되도록 아버지 스스로 디자인해 끼워 넣은 수백 개의 외국산 카세트테이프 케이스들이 인상 깊게 남았을 뿐이다.

tell me - 정은

어둡고 작고 슬픈 것들에 마음이 이끌리다
 
좋은 점이 많은 평범한 사람, 더구나 가족인 아버지가 자신의 좋은 점을 단숨에 0으로 만들 수밖에 없는 나쁜 점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게 얼마나 주변의 가까운 이들을 힘들고 무력하게 하는지 나는 너무 일찍 깨달았다. 당연히 난 또래보다 조숙할 수밖에 없었다. 늘 밝고 예쁜 화사한 것보다는 어둡고 작고 슬픈 것들에 더 이끌리고 마음이 갔다.
 
아버지는 무조건 좋아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완전히 배제할 수도 없는 애증의 존재였다. 나는 자연스럽게 어머니를 비롯한 모든 여자들, 혹은 성별을 막론하고 남보다 약한 이들의 편에 서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자라났다. 남자들에 대한 적대감도 결코 적지 않았고 어머니 앞에서 결혼 따위는 하고 싶지 않다고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여고 1학년 때였던가, 같은 반 아이를 좋아해서 고백 편지를 보냈다가 거절당한 적이 있었다. 내 눈에는 껄렁껄렁하고 으스대기 좋아하는 한심한 가식덩어리로밖에 안 보이는 다른 반 커트머리한테 안 좋은 일을 당하고 차였다는 소문이 무성하던 아이였다.
 
내가 그 아이한테 강하게 끌렸던 이유를 딱 꼬집어 설명하기는 힘들다. 그 일 이후로 내 성 정체성에 대해 많은 시간을 고민했지만 솔직히 결론을 내리지는 못했다. 친한 친구한테 그간의 일을 털어놓으며 ‘나는 그냥 여자든 남자든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좋은 것 같다’는 말을 하기도 했다.
 
집을 나와 대학에서 만난 ‘신세계’
 
대학을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 나는 망설임 없이 집을 떠나는 쪽을 선택했다.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아버지와 악다구니만 느는 서글픈 어머니. 불안한 두 분의 모습을 그대로 복사한 듯 집안의 어른인 양 잔소리를 해대는 나. 그런 나와 대립 구도를 형성하던 두 동생들이 제각기 다른 곳만 바라보며 삐걱대는 집은 내게 별다른 선택의 여지를 주지 않았다.
 
공부에는 별 관심이 없고 책 읽기를 좋아하던 나는 그럭저럭 대학에 입학할 만한 정도의 수능 성적표를 받고 집에서 멀찌감치 떨어진 어느 지방대학 문예창작과에 들어갔다. 유난히 노을 지는 풍경이 아름다운 한적한 시골 도시에서 맞은 스무 살, 처음으로 술을 배우고 스스로 담배를 피웠다.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방향으로 진행되는 학과 수업은 흥미로운 특정 과목을 빼고는 대부분 딱딱했지만 시 창작 동아리에 들어가면서부터 공부하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무엇보다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이 아주 작은 한 곳에 모여 만들어내는 특별한 소속감은 내게 훌륭한 피난처가 되었다. 또한 혼자서는 그 윤곽조차 정리하기 힘들었던 내 속의 여러 가치판단 기준이 비로소 조금씩 자리 잡을 수 있었던 곳이었다.
 
동아리에서 만난 남자 선배, 동기들은 내가 막연히 알고 실제 보아오던 남자들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좋은’ 남자들에 속했다. 가부장적인 모습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언제 어디서나 벌이는 각종 토론에서는 내가 미처 생각지 못한 방향에서 정치적으로 올바른 대답들을 내놓곤 했다. 아, 이런 남자들도 있구나,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남자 선배들에 대한 호감이 높아지면서 남자라는 존재에 대한 내 오랜 불신도 점차 풀어졌다.
 
믿었던 ‘좋은’ 남자선배들의 이면을 마주하고
 
어느 날, 특히 친하게 지내던 남자 선배 몇몇과 동아리방에 모여 잡담을 나누는데, 같은 동아리 사람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몸매에 자기주장 뚜렷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한 여자 선배였다.
 
남자 선배들 말로는 학과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에 잠시 밖으로 나가는 그 여자 선배를 쳐다보며 다른 남자 동기들이 음담패설을 즐기더라는 것이다. 강해 보여서 다가가기 어려운 이미지임에도 친한 동아리 사람들 앞에서 헛똑똑이처럼 행동하는 빈틈도 더러 있는데다 유독 나른해 보이는 이목구비와 말투 때문에 괜한 구설에 휘말리기 쉬운 면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 내용은 너무 충격적이었다. ‘뭐니 뭐니 해도 저런 강한 캐릭터가 정작 도마 위에 올려놓고 보면 제 맛인 횟감’이라나.
 
불쾌한 나머지 순식간에 붉어진 얼굴로 그런 얘기를 그냥 듣고만 있었느냐고 따졌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평소에 그 여자 선배와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던 남자 선배들이 그 음담패설 무리 옆에서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같이 웃고 말았더라는 사실이었다.
 
그 후로 한참 동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이어지는 내 질문과 그 질문에 변명하는 남자 선배들의 토론이 끝없이 계속되었다. 남자 선배들의 항변은 ‘그 정도의 음담패설은 흔한 편이고 우리는 그 말에 동의한다는 뜻으로 웃었던 게 아니다’였다. 나는 ‘농담으로라도 그런 식으로 여자를 대하는 건 최대한 너그럽게 말해봤자 성희롱일 뿐’이라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점점 토론은 배가 산으로 가는 지리멸렬한 말 반복으로 번졌고, 그나마 다른 동아리 사람들이 동아리방에 나타나 말리는 바람에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
 
그 남자 선배들의 마지막 말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우린 비록 부족하지만 다른 남자들보다는 페미니즘에 더 근접한 편이다. 원래 여자보다 남자가 변화하는 속도가 느리니 여자들은 어쩔 수 없이 좀 더 참을성 있게 남자들의 변화를 기다릴 수밖에 없다. 지금 세상이 예전에 비해 얼마나 좋아졌느냐. 과거로 쉽사리 돌아가지 않을 만큼 달라진 남자들도 많다.>
 
좋아하는 이들에 대한 다소 맹목적인 믿음이 (당연하게도) 한순간에 무너지는 순간의 허탈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한심하고 꽉 막혔으며 말이 통하지 않는다고 여겨지는 일련의 마초들과 그 남자 선배들을 같은 선상에 놓고 ‘똑같은 놈들’이라 분류하기는 힘들다. 과하게 포장하거나 부풀린 남성성을 으스대는 방법으로 스스로의 한계를 숨기기보다는 오히려 한계를 인정하고 다른 방도를 찾으려고 하는 솔직한 종류의 남자들이었으니까.
 
그날 이후로 ‘~보다는’이라는 말이 가지는 수많은 의미에 대해 많은 시간 생각했다. 여자를 바라보는 태도나 여자와 남자의 사회적 역할, 불평등에 대한 남녀 간의 대화는 어느 정도 기대하는 지점 이상을 넘기기 힘든 게 사실이었다. 서로 다른 방향의 견해를 가진 사람들이 원만하게 잘 지내기 위해서 서로 건드리지 말아야 하는 것들을 택일하며 타협하는 모습이 수두룩한 게 바로 사회였다. 세상에 끝까지 변하지 않는 말이나 법은 없었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갑작스런 아버지의 죽음은 내 인생에 또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뒤늦게나마 아버지도 보탬이 되긴 했지만 어머니 혼자 벌다시피 해서 꾸려가던 집안 사정이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결국 휴학을 결정하고 집에 돌아와 아르바이트를 하던 나는 이미 틀어질 대로 틀어진 아버지와 데면데면 거의 대화가 없는 상태로 지냈다.
 
낚시를 좋아하던 아버지를 시체도 수습할 수 없게 집어삼킨 건 깊고 새파란 남해 바닷물이었다.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틈만 나면 같이 낚시 가자던 아버지의 부탁을 늘 무시한 내 차가운 모습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회한이라는 것도 남겨진 이의 몫일 뿐 죽은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모든 일에는 다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핍박받는 어머니의 삶은 내게 우울한 시기를 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내 삶의 모든 일들 속에서 부당함을 알아보고 끊임없이 주시하려는 두 눈을 주었다.
 
모순으로 가득한 아버지의 삶은 내 안의 모순을 극복하려는, 또한 정치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늘 고민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했다. 내 안의 모순과 적당히 타협할 수도 있는 거지, 하고 흔들릴 때마다 나를 다잡은 원동력이었다. 생각과 행동에 제약이 되는 강박이 아닌, 제대로 걷고 나아가기 위해 스스로 정해 둔 최소한의 지침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내가 이성적으로 그렇게 정리한 것처럼 내 행동이 같은 방향으로 실천되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나와 동생들도 모두가 상처받았던 지난날들을 제대로 정리하거나 이미 틀어진 관계라도 기회가 있을 때 바꾸기 위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결국 과거의 아버지와 나는 완전히 다른 모습이 아니었다.
 
그렇게 아버지가 세상을 뜨고 나서야 나는 아버지를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정할 수 있었다. 당신의 삶이 만든 모순으로 가장 고단한 건 어쩌면 당신 스스로였기에 진심으로 그 마음이 가벼워졌기를 바랐다. 그러한 내 마음까지 확인하고 나자 수많은 원망과 그간의 응어리까지 남김없이 털어버릴 수 있었다.
 
투명하기 그지없는 물방울들이 모였는데도 멀리서는 그저 뿌옇게 보이는 저 안개처럼, 어느 것 하나 앞뒤가 명쾌하게 와 닿지 않던 내 유년의 풍경. 그 속의 것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도 못하면서 꾹 다문 입만 연신 삐죽거리던 불만투성이 내 자신은,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어쩜 지금의 나와 서로에게 필요한 인연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해 못할 일도, 이해 못할 사람도 없다
 
이런 저런 일들을 겪으며 나는 점점 더 ‘이면’의 또 다른 진실과 사람들 간의 ‘다름’에 대해 골몰했다. 이해하지 못할 일도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없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동성 친구를 진지하게 좋아했던 일이 계기가 되어 일반과 이반, 모든 성 정체성과 여러 형태의 다양한 삶에 대해 인정하고 지지하는 운동을 스스로 시작했다. 내가 한 남자와 결혼해 가정을 꾸린 것은 성 정체성에 대한 고민의 결론을 정확히 내렸기 때문은 아니다. 누구를 위한 규정인지 알 수도 없었고 억지로 규정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아마 앞으로도 한 가지 결론에 도달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 끝날지 모를 휴학이 계속되던 와중에, 다니던 대학에서 국어국문, 문예창작 전공을 전혀 상관없는 다른 학과 과정에 편입시키며 사실상 없애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짓을 저질렀다. ‘취업에 도움이 안 되고 시대 흐름을 따라야 한다’는 이유였다.
 
이 일로, 졸업은 해야지 하는 막연한 고정관념까지 사라지자 미련 없이 학교를 떠났다. 같은 일로 거리에 나가 부당함을 소리치던 다른 대학의 학생들 소식이 남 일 같지 않았다. 자신의 삶에서 맞부딪힌 부당함을 호소하기 위해 거리로 나가는 수많은 이들에 대한 관심도 자연스레 높아졌다.
 
직접 경험만이 모든 가치관의 진정성을 뒷받침한다는 생각에는 반대하지만, 내 모든 경험이 내 가치관 형성의 중요한 열쇠가 된 건 사실이다. 그리고 페미니즘은 그 단어를 알지도 못하던 어린 내가 어머니의 삶을 통해 난생 처음으로 가까이 다가간 사회운동이었다.
 
내가 항상 질문하고 고민하는 것이 대부분 자존과 공존에 대한 문제이기 때문인지, 부당함을 알리고 더 좋은 세상을 위한 실천에서 비롯되기 마련인 사회운동이 지금보다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이론서를 찾아 읽거나 좀 더 파고들기 위한 노력이 이제껏 없었다는 게 좀 아쉽긴 해도 이 글을 쓰기 위해 지난 일들을 돌아보면서 오랜만에 진지하게 떠올린 페미니즘에 대한 내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달라지지 않았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으로 살아갈 것인가.’
‘어떤 사람으로 살아가며, 다른 이들과 어떻게 함께할 것인가.’  (정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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