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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페미니즘> ‘꽃을 던지고 싶다’ 저자 너울 (2) 


<일다> 10주년 기획 “나의 페미니즘”. 경험을 통해 여성주의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독자들과 공유하여 대안담론을 만듭니다. 이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기금의 지원을 받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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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숨기고 싶었다 
 

▲ 아동성폭력 생존자의 경험을 기록한 너울의 책 <꽃을 던지고 싶다>(2013, 르네상스)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꽃을 던지고 싶다”라는 제목으로 나의 아동성폭력 경험을 기록하고, 그 기록이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도움을 통해 책으로 나온 지 이제 4개월이 지나간다. 어차피 익명으로 이루어진 작업이니, 책을 내고 나서 ‘자취를 감추면 그만’이라는 쉬운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나를 구성하는 정체성은 여러 개가 있고 성폭력 생존자로서의 정체성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니, 기록이 끝나면 가면을 쓰듯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버리고 살아가겠다고 마음 먹었다. 저널에 칼럼을 연재할 때에도 편집부에 철저하게 신원에 대한 비밀을 지켜달라 당부하고, 조심하면서 작업을 해나갔다.
 
사람들이 성폭력을 겪은 사람에게 갖는 편견을 너무 잘 알기 때문에, 그리고 내가 생존자임을 드러낼 때 나 스스로도 쉽게 무너지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생존자 정체성으로부터 조금은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설령 수치심은 피해자의 몫이 아니란 사실을 깨닫는다 해도, 누가 ‘성폭력 피해자’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가고 싶을 것인가? 나는 그 정체성을 버리고 싶었다.
 
이처럼 경험을 덮어버리고 살고자 하는 나를 붙든 것은 ‘여성이 목소리를 갖는 것은 어려운 일이고, 생존자가 목소리를 갖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다.’ 라는 어느 페미니스트 선배의 말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자가 목소리를 낼 수 있을 때 ‘말을 하는 것’이 의무라고 했다.
 
하지만 성폭력 가해자의 목소리, 남성의 목소리가 가득한 세상에서 누가 우리의 목소리를 들어주기나 할까? 생존자의 목소리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울림을, 그리고 어떤 변화를 가지고 올 수 있을까? 그리고 왜 그 작업을 내가 해야 하는 것일까? 무엇보다, 나는 정말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가? 여러 물음들이 뒤엉켰다.
 
생존자로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되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에 글을 연재하고 그 기록이 책으로 나와 세상과 소통하게 되는 큰 은혜를 받은 나는, 내가 원하지 않아도 ‘생존자로서 목소리를 가진 사람’이 되어있었다.
 
처음엔 책이 출간되어도 인터뷰를 하거나 내 모습을 드러내는 일은 없을 거라 맹세했지만, 여러 번 거절 끝에 ‘생존자의 목소리가 필요하지 않겠냐’의 말에 이끌려 몇 차례 인터뷰를 하게 되었다.
 
한 방송국에서는 성폭력 피해자가 얼마나 불행한지, 그 후유증을 극복할 수 없어 괴로워하는 컨셉트로 촬영하기를 원했다. 수면제며, 상담을 받는 장면을 그려내자 했다. 나는 생존자가 다 불행하지는 않으며, 나도 여성주의를 만나면서 많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했지만, 그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대로 ‘피해자다운 모습’을 요구했다.
 
방송국 피디와 작은 다툼을 벌이고 속상해 하는 나에게, 선배는 ‘그것이 세상의 상상력이고, 그러하기에 더욱 당사자의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고 말했다.
 
당사자의 목소리로 세상과 소통한다는 것이 어떤 것일까? 내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은 어디이며, 어떤 목소리를 내야 하는 것일까? 어려운 문제이지만 난 더 이상 나의 정체성을 숨기지 않기로 했다.
 
‘너울’이라는 성폭력 생존자로서 첫 강연을 마치고서, 나는 비로소 내가 불행하거나 숨기고 싶은 과거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 정체성을 인정하게 되자, 생존자로서 내가 필요한 곳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또한 더 강렬하게, 당사자의 목소리로 세상과 소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 그리고 나의 목소리 
 

▲ <공개답변: 8회 성폭력생존자말하기대회>展 에 전시된 작품   © 사진 - 한국성폭력상담소 
 
내 책을 읽은 독자들에게서 메일이 오는 경우가 있다. 대부분 나와 같은 성폭력 피해경험이 있는 여성들이다. 어느 사연도 아프지 않은 것이 없지만, 며칠 전 받은 메일은 내내 마음에 돌이 되어 버렸다. 잠을 자는 순간에도 밥을 먹는 순간에도 나는 그녀가 평온하기를 빌어보지만, 그녀에게 가 닿을지는 알 수 없다.
 
나처럼 여러 차례 성폭력을 경험한 그녀는 ‘살아갈 희망을 알고 싶다’면서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녀도 예전의 나처럼 ‘말할 수 없는 고통, 말해지지 못하는 고통’ 속에서 ‘죽고 싶다’가 아니라 ‘살고 싶지 않아’ 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강간당한 여자에게 살아갈 희망은 무엇이냐’ 라는 물음에, 나는 답을 할 수 없을 것 같다. 여전히 나는 강간당한 여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 해답을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할 수만 있다면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고,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싶다. 그녀도 자신의 경험을 여성주의적으로 해석하고, 트라우마를 가지고도 살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살아가고 싶다’는 마음을 가져보길 바라본다.
 
그녀에게 간절한 마음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 그녀의 목소리도, 그리고 나의 목소리도, 또 어떤 피해자의 목소리도 나눌 수 있고, 들어주는 곳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공감’에도 연습이 필요하기에, 그녀의 목소리와 나의 목소리가 ‘있는 그대로’ 지지를 받을 수 있는 곳.
 
또 다른 그녀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
 
지금 내 주위 사람들은 대부분 나처럼 생존자들이다. 우리는 하나하나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고통을 이해했고,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위로와 공감과 지지를 보낼 수 있는 사람들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주최한 <작은 말하기>에 나가면서, 세상에 나와 닮은 상처를 가진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서로의 경험을 지지하고 지지를 받는 과정을 통해 사람에 대한 불신을 회복하고 관계 맺는 법을 배우게 되었다.
 
우리는 여성주의로 자신의 경험을 해석하고 회복하며 성장했다. 그리고 이제는 그 과정을 나누고 싶다는 욕구를 가지게 되었다. 쌍둥이처럼 닮은 우리들은 여성주의 선배들이 우리에게 손을 내밀었던 것처럼, 과거의 우리처럼 홀로 고립되어 나만 경험하는 고통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또 다른 그녀들에게 손을 내밀고 싶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다.
 
나는 다른 생존자들과 함께 ‘생존자네트워크’를 만들려고 준비 중이다. 선배 여성주의자들이 내민 손이 나를 성장시켰듯이, 나는 또 다른 여성주의를 만들어 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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