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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에서 보낸 편지> 2. 도시의 둘레길을 걸으며
‘교육일기’와 ‘하늘을 나는 교실’의 필자 정인진님이 프랑스의 서북부 브르타뉴 지방에서 머물면서 보고 느낀 것들을 기록한 ‘브르타뉴에서 온 편지’ www.ildaro.com
변덕스러운 프랑스의 날씨, 배낭은 ‘필수품’
볕이 따뜻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밖으로 나오니 제법 쌀쌀했다. 점퍼깃을 채우고, 혹시 나 하면서 챙긴 면스카프를 가방에서 꺼내 목에 둘둘 마니 훨씬 적당하다. 여전히 그늘을 지날 때는 좀 춥다는 느낌이다.
프랑스에서 오래 살아보았지만, 여전히 날씨에는 적응이 안된다. 브르타뉴도 예외는 아니어서 얇은 스웨터나 스카프 같은 걸 챙겨 다니며, 입다가 다시 벗기를 반복하며 산다. 그래서 여기서는 늘 배낭에 비옷이나 스카프, 스웨터 같은 것들을 챙겨 다닌다.
물론, 이 배낭은 뭔가 챙겨 나올 때만 쓰는 것은 아니다. 입고 나온 점퍼나 스카프 같은 걸 풀러 놓을 때도 꼭 필요하다. 아침에 쌀쌀했다고 해서 낮에도 같은 날씨는 아니다. 다시 볕이 나서 엄청 더워지기도 하고, 또 언제 먹구름이 몰려와 비를 뿌릴지 모를 일이다. 그래서 여기서는 옷을 입었다 벗었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며 다녀야 한다.
이렇게 준비를 했다면, 걸어다니는 건 문제가 아니다. 오늘은 내가 살고 있는 도시, 렌 (Rennes)을 탐방할 계획이다. 렌에는 약 20km씩, 남북으로 나뉘어 도시를 산책할 수 있는 둘레길이 마련되어 있다. 오늘은 그중 북쪽 둘레길을 걷기 위해 집을 나섰다.
평소에도 볼일을 보러 시내를 갈 때 주로 걷는 편이니, 이런 둘레길 걷는 걸 놓칠 수는 없다. 지난 달에는 남쪽 둘레길을 걸었고, 오늘은 그 북쪽에 있는 길을 걸어볼 생각이다. 이렇게 걷기 좋은 복장으로 차려입고 지도까지 들고 길을 나서니, 마치 관광객이 된 기분이다.
보행자를 생각하는 렌의 교통정책
▲ 렌 시내를 관통하는 빌렌느강 운하 모습 © 정인진
렌은 도심을 걸어다니기가 나쁘지 않다. 차길을 따라 시내 도서관까지 걸을 수도 있지만, 운하를 따라 렌의 도심을 가는 건 더 쉽다. 현재 내가 살고 있는 렌은 브르타뉴의 다섯 개 지역의 하나인 ‘일에빌렌느’(Ille-et-Vilaine)의 중심지면서, 브르타뉴의 수도이기도 하다.
‘일에빌렌느’는 일강과 빌렌느강이 지나는 지역이라는 뜻으로, 마침 렌은 북으로 흐르는 ‘일강’과 동서를 가로지르는 ‘빌렌느강’이 만나는 바로 그 자리에 위치해 있다. 내가 살고 있는 곳은 렌 서쪽에 위치한 클뢰네(Cleunay)라는 마을로, 빌렌느 강을 따라 동쪽으로 한 20여분 걸으면 렌의 도심에 이를 수 있다. 렌 시내를 관통하는 빌렌느 강은 운하로 만들어져 있고, 운하 가장자리는 걷기 좋게 정돈되어 있다. 이곳에서는 나처럼 걸어서 도심을 오가는 사람들은 물론, 조깅을 하는 사람들도 자주 만날 수 있다. 무엇보다 강물 위에서 노니는 들오리들과 강가에 매어놓은 고깃배들을 보면서 걷는 것이 즐겁다.
게다가 렌의 도심은 교통량도 많은 편이 아니어서 걷기가 나쁘지 않다. 또 프랑스의 많은 도시들이 그렇듯, 도심은 개인승용차의 진입이 제한되어 있다. 렌의 도심이 활기있으면서도 느긋하게 느껴지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그 덕분에 넓게 자리한 광장을 느릿느릿 가로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산책할 수 있다.
또 현재는 렌을 관통하는 산책로가 건설 중에 있다. 이 공사는 렌 시내 전체, 동서를 관통하는 대로에 산책로를 만드는 것으로, 차도 중앙 양 옆으로 플라타나스를 심고 사람들이 걸어다닐 수 있도록 산책로를 만들고 있다. 물론, 현재는 이를 건설하기 위해 도로가 온통 파헤쳐지고 먼지가 풀럭여 근처를 지니기도 힘들지만, 조만간 공사가 끝나면 시민들이 더 걸어다니기 좋은 도시가 될 것이다.
▲ 차들의 진입이 금지된 렌 시청앞 광장 모습 © 정인진
점점 걷기 힘들어지는 프랑스의 도시들
그러나 프랑스도 도심을 어슬렁거리며 걷기는 점점 힘들어지는 것 같다. 재작년, 옛날에 살았던 남부의 몽쁠리에와 북부의 릴을 9년만에 다시 방문했을 때의 실망감은 잊을 수가 없다.
릴의 중앙 광장인 샤를르 드골 광장은 원래부터 한 편으로 차들이 다녔다. 옛날에는 신호등이 있었지만, 이번에 가보니 신호등을 없애고 그곳을 지나는 모든 차들은 시속 20km이하로 달리도록 하고, 사람들은 어느 때고 길을 건널 수 있게 해놓았다. 보행자를 위한 정책이라고 하지만, 나같은 동양사람이 차가 지나는 길에 서슴없이 발을 들여놓기는 쉽지 않았다. 특히, 릴의 도심에는 교통량이 많이 늘어, 약간만 존재하는 보행자전용도로를 벗어나면, 차들이 내뿜는 매연으로 걷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한편, 옛날 몽쁠리에 도심에는 대중교통은 물론, 모든 교통수단의 진입이 금지된 보행자 전용 공간이 엄청 많았다. 몽쁠리에의 중앙 광장인 ‘코메디 광장’부터 법원앞까지는 개인승용차는 물론, 버스도 다니지 않았다. 다만, 노약자를 위한 ‘쁘띠 뷔스’(petit bus)라고 부르는 아주 작고 귀여운 버스만이 사람들이 어슬렁거리는 광장과 골목길을 통통거리며 달렸다. 도심을 관통하고 싶은 차들은 광장 밑을 가로지르는 터널로 지나가게 되어 있었다. 이렇게 차들이 떠난 코메디 광장 가장자리로는 늘 카페 테라스가 넓게 펼쳐졌다. 사람들은 카페테라스에 앉아 한가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고, 또 지중해변의 찬란한 햇살을 받으며 천천히 광장을 가로지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10년 사이, 몽쁠리에에 전차가 개통되고, 코메디 광장 한 옆으로 전차를 통과시키면서 옛날의 한가한 정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그곳을 떠난 지 10년이 넘어 다시 가본 몽쁠리에의 코메디 광장은 앞으로 나아가기조차 힘들 만큼, 인파로 북적이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지난 추억을 떠올리기에는 너무 복잡한 이곳을 빨리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물론, 도심으로 사람들이 모여들게 되었으니, 시내 상업지구 사람들은 반길지도 모르겠다. 결국, 몽쁠리에의 차없는 코메디 광장을 만들겠다는 정책은 실패하고 말았다.
이렇게 다른 도시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터라, 나는 렌의 교통정책이 더 소중하게 생각된다. 렌에서는 대중교통을 제외한 개인승용차는 도심에 진입할 수 없다. 도심으로 들어오려면, 개인 자동차는 도심 주변의 대형 유료 주차장에 주차를 시켜놓아야 한다. 이를 위해, 도심 둘레에는 큰 규모의 주차장들이 여러 개 마련되어 있고, 각 주차장마다 얼마나 빈자리가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안내판들이 근처 도로마다 설치되어 있다.
도시화에 내몰린 브르타뉴, 렌은 ‘공사중’
그러나 렌의 이런 시정책을 유지시키기가 쉬워보이지는 않는다. 이 정책으로 인해, 도심의 상점들은 손님이 줄었다고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21세기에 들어, 경제적인 이익과 환경의 문제들이 첨예하게 부딪치는 사건들을 더 자주 목격하게 된다. 몽쁠리에의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나로서는 그것이 얼마나 슬픈 일인지 알고 있지만, 렌의 정책이 어디로 갈지는 확신할 수 없어서 더욱 안타깝다.
주민들에게 보다 쾌적한 도시공간을 제공하고 싶다는 렌의 정책이 일관되게 표현되고 있지는 않다. 도심 안으로 차의 진입을 통제하는 것과 다르게, 조금만 도심을 벗어나면 파헤쳐진 건설현장들로 가득하다. 현재, 렌은 대도시를 만들기 위해, 시의 규모를 확장시키려고 애쓰고 있다. 이 계획의 하나로 렌 시에서는 지하철 2호선 건설도 계획하고 있다. 남북을 가로지르는 기존의 지하철과 더불어, 이제는 동서를 잇는 지하철을 건설할 거라고 한다. 더 크고 거대한 도시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우리와 너무 닮아 뭐라고 안타까움을 표현할 수도 없을 지경이다.
시를 더 넓게 확장시키겠다는 계획은 시 외곽의 신시가지 건설로 이어진다. 렌은 앞으로 2020년까지 인구를 3만명 더 늘여 대도시를 만들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진행중이다. 이런 취지 아래, 주거지를 더 건설하고 도로를 건설하는 등의 엄청난 공사들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또 오래된 대규모 빌딩을 리모델링하거나 아파트를 새로 짓고 있어, 어디를 가나 고공 크레인들을 볼 수 있고, 공사현장마다 흙먼지가 풀럭인다.
▲ 쿠르즈 신도시 건설현장 모습 © 정인진
우리 동네 바로 옆, 쿠르즈(Courrouze)라는 동네도 신시가를 건설 중에 있다. 이곳 쿠르즈는 비슷한 규모로 건설되고 있는 여러 개의 신도시 중 하나다. 쿠르즈는 과거, 나무들이 우거진 공장 지대였던 곳이다. 공장들 외에 다른 건물들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던 곳인 만큼, 대규모 아파트 단지와 빌딩들이 속속 건설되고 있다. 2020년까지 4천 7백의 주거지와 3천개의 일자리를 만들어, 1만명의 주민이 살 수 있는 곳으로 만들 거라고 한다. 노인들의 유입을 이끌기 위해 쾌적하고 다양한 편의시설들을 함께 갖추고 있다는 홍보를 곁들인 아파트 광고판들도 눈에 띈다.
현재, 브르타뉴는 다른 어느 지역보다 빠르게 도시화되는 중이다. 그 중심에 렌이 있고, 렌은 자기를 확장시키기 위해 무진 애를 쓰고 있다. 그들은 도시화되더라도 좀더 환경친화적이고 디자인이 돋보이는 건축물을 실험하는 장으로 만들겠다고 하지만, 그것이 내실있게 이뤄질지에는 모두 자신없어하고 있다.
복잡한 한국의 도시에도 걷기 위한 길을 만든다면
▲ 보호대를 한 공사현장의 나무들 모습 © 정인진
내가 생각하기에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신도시 아파트들의 모양이 획일적이지 않고, 한 건물에 다양한 평형의 구조를 갖춘 아파트가 많다는 것이다. 단독주택 형태의 아파트는 물론, 1, 2층의 낮은 아파트와 고층 아파트, 또 작은 규모와 큰 규모의 아파트들이 섞여, 다양한 계층과 연령대의 주민들로 이루어진 마을이 건설 될 것 같다.
또 신도시에 아파트 단지를 건설할 때조차 원래 존재하는 큰 나무나 나무 군락들을 없애지 않고 그 사이사이에 아파트를 짓는 모습은 눈여겨 볼만하다. 이런 식으로 공사를 하려니, 군데군데 방책을 치고 그 방책을 피해가며 건설용 트럭들이 오가며, 불편함을 감수하는 공사모습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건설현장 어디를 가나, 나무들이 다치지 않게 몸통에 감아준 보호대는 인간을 위해 부수고 파헤치더라도 주변에 살고 있는 존재들을 조금이라도 덜 다치게 하려고 애쓰는 마음이 전해져, 볼 때마다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된다.
오전에 집을 나와 오후까지 길을 걸었다. 지도와 안내책자를 잊지 않고 챙겼지만, 무엇보다 20km에 이르는 길 곳곳 나무나 신호등 같은 데에 표시가 잘 되어 있어, 길을 찾기가 어렵지 않았다. 더욱이 이 둘레길은 차들이 적게 다니는 작은 도로를 지나 예쁘게 뜰이 가꾸어져 있는 주택가 골목길을 거쳐, 키 큰 나무들로 둘러쳐진 공원을 가르질러 도시에 숨겨진 오솔길들로 이어졌다. 이런 길을 정신없이 따라 가다 보면, 도시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잊을 정도였다. 한국의 우리 동네에도 이런 둘레길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귀국하면, 나 스스로 이런 길을 만들어 우리 동네도 걸어봐야겠다. (정인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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