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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조이여울의 記錄> 3.1운동의 역사적 가치와 유산③ ‘비폭력’ 정신
 
1919년 3.1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어떠했는지, 여성사로서 당시를 기록하고 그 의미를 살펴봅니다. [www.ildaro.com
 
① 십대여성들의 3.1운동
② 독립투사였던 기생들
③ 비폭력 원칙을 끝까지 지키다
④ 여성운동사에서 3.1운동의 위치
 
여성시위자에 대한 일제의 성적(性的) 탄압
 
3.1운동은 비폭력 시위로 전개되었으며, 시위주동자와 참가자들은 무장한 일본 경찰들 앞에서 태극기 한 장을 들고 맨몸으로 독립만세를 외치며 저항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복원한 고문실  ©일다 -이옥임 
 
한국민의 비폭력 저항에 대한 일제의 대응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자행되었다. 특히 여성들에 대해서는 성적 학대와 고문을 통해 가장 가혹한 방식으로 진압했다.
 
“10세 밖에 되지 않은 어린 소녀들과 아녀자들, 그리고 여학생들이 자기의 조국을 위해 정열을 발산하고 독립을 외쳤다는 단순한 죄목으로 치욕적인 대우를 받았고 체형을 받았으며 또 고문을 당했다. 어린 소녀들은 고꾸라지고 잔혹하게 얻어맞았다.” (Frederick Arthur Mckenzie, 1920)
 
프레드릭 아서 맥켄지 기자는 『한국의 독립운동』에서 3.1운동에 위협을 느낀 일본인들은 “제멋대로” 칼을 휘둘렀다고 기록하고 있다.
 
맥켄지 기자는 일본 제국 정부가 고문을 하지 못하도록 성문화된 법규를 제정했지만 실상은 고문을 용납하고 있으며, 아직 공판에 회부되지도 않은 사람들에게 대대적인 고문을 가하고 있다고 고발하면서, 일제가 즐겨 쓴 고문 형식을 나열했다.
 
1. 여학생과 젊은 여인들의 옷을 벗기고 두들기고, 발로 차며 채찍질하고 또 욕을 보이는 일.
2. 학생들에 대해서 죽도록 채찍질을 한 일.
3. 불에 태우는 일, 즉 담배불로 어린 소녀들의 연한 살을 지지고, 또 불에 달군 쇠로 남자건 아녀자건 할 것 없이 이들의 살을 태운 일.
4. 엄지손가락에 끈을 매어 달아 매고 대나무와 쇠몽둥이로 때리다가, 의식을 잃으면 다시 깨워서 이런 일을 되풀이하는데, 이런 고문은 어떤 때는 하루에도 여러 번, 또 어떤 때는 죽을 때까지 계속한 일.
5. 고통이 극에 이르도록 사람을 헝겊으로 감아 조이는 일.
6. 고문 상태로 오랜 기간 감금시키는 일. 이를테면, 남녀를 한 방에 빽빽이 집어넣어서 며칠이든 쭉 피고 눕거나 앉을 수가 없는 일.
 
맥켄지는 이러한 고문이 외딴 지역에서 지위를 남용한 이들에 의해 자행된 것이 아니라, “많은 도시에서, 그리고 또 많은 사람에게 가해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본 경찰들이 여성들의 만세시위 기세를 꺾기 위해 공개된 장소에서 성고문을 가했다.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몸을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던 당대 여성들을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억압한 것이다.
 
“대부분의 경찰서에서는 시위에 조금이라도 가담했으면, 여학생과 젊은 부녀자들의 옷을 벗이고 때리고 완전히 알몸으로 만들어,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일본 남자들 앞에 노출시키는 것이 예사였다. 한국 여자들은 백인 여자들처럼 자기의 몸을 남에게 보이기를 싫어하는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알고, 이런 방법으로 욕보이기를 좋아했다.”

▲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에서 복원한 벽관.  간신히 한 사람이 서 있을 수 있는 좁은 공간이다.    © 일다 - 이옥임 
 
당시 국내외 언론들에 보도된 기사들에서도 시위에 참여한 여성들에게 가해진 폭력과 고문에 대한 기록을 찾아볼 수 있다.
 
“여성들은 체포되면 거리에서 옷을 벗기고 일본 헌병들이 보이는 곳에 세우고 희롱…” 「대한독립신문」
“나체로 만들어 발로 걷어차고 유방은 소에 대하는 듯이 쥐어짠다” 「북경 데일리뉴스」
“포박된 조선부인과 여학생들에 대한 학대에 대해 일일이 지면에 싣고 싶지만 기재할 수 없다” 「재팬 크로니클」
“고통이 길게 가도록 간격을 두고 태형을 가하며 옷을 입으라는 명령이 내렸을 때는 수족이 이미 마비돼 움직일 수 없는 상태” 「차이나 프레스」
 
시위주동자로 형을 확정 받아 감옥에 수감된 여성들에게는 한층 더 악랄한 성적 학대가 가해졌다. 서대문형무소 역사관의 기록에는 “(일제가) 자주 사용한 고문법으로 ‘소좆몽둥이’(소의 생식기를 뽑아 말린 것)를 물에 불려 여성 음부에 삽입했다”고 되어있다. 또한 여성들의 팔을 자른 사례들도 전시돼있다.
 
멕켄지 기자는 남자들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은 “여학생으로서 죽기보다 싫은 것 같았다”고 기록하며, 종로경찰서에 끌려간 여학생들로부터 얘기를 들은 한 미국인 여성이 자신에게 해준 말을 옮겨 적었다.
 
"그 여학생들이 한 얘기를 모두 당신 같은 남자분에게 말할 수는 없어요. 이것만은 말씀 드리겠어요. 여학생들이 팔을 잘리기도 했다는 얘기가 있어요. 만약 이 여학생들이 내 딸들이라면, 나로서는 종로서에서 그러한 일을 당하느니보다는 차라리 팔이 잘리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비폭력’ 원칙에 입각한 평화운동
 
성적 박해와 폭행, 죽음을 당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여성들-여학생, 교사, 가정주부, 기생-들은 집밖으로, 학교 밖으로 뛰쳐나와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많은 비밀모임을 조직하고, 외국의 평화운동가들에게 탄원서를 제출하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일제에 저항했다.
 
3.1운동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요구하며 마하트마 간디에 의해 1917년 시작된 인도의 비폭력 저항운동 ‘사티아그라하’(산스크리트어로 ‘진리를 지킨다’는 뜻)와 더불어, 세계사적으로 기록될만한 범민족적인 비폭력 평화운동이다.
 
평화적인 한국민의 만세시위를 일본 제국 경찰들은 무자비한 폭력으로 진압하고 학살하였지만, 3.1운동은 무기를 들지 않고 맨몸으로 저항하는 비폭력 원칙을 고수한 채 전국적인 물결을 이루었다.
 
시위 과정에서 다수의 사람들이 집결하여 일본 경찰서를 점거하거나 헌병들을 제압하거나, 반일감정으로 국내에 체류 중인 일본인들을 해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한국민들은 결코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3.1운동은 시위였지, 폭동은 아니었다. 첫날 이래 폭행은 조금도 없었다.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던 일본인들 중에 다친 사람은 없었으며, 일본인 상점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Frederick Arthur Mckenzie, 1920)
 
경찰이 습격하고 칼을 휘두를 때에도 3.1운동의 지도자들은 힘으로 저항하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타민족과 타국가를 점령하여 평화를 깨뜨린 제국주의 세력에 대항하는 한국민들이 방식은 평화를 지키는 것, 즉 ‘평화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비폭력 투쟁이 어떤 무장투쟁보다 더 용감하고 급진적인 투쟁이라고 평가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시구문. 일제강점기에 사형 집행 후 그 사실을 은폐해야 할 경우, 외부로 몰래 반출하기 위해 뚫어 놓은 비밀 통로.  © 일다 -이옥임 
 
3.1운동을 통한 비폭력 저항은 한국민들의 정신적 힘과 의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 보여주었으며, 이를 지켜보는 바깥의 시민들-세계인들은 커다란 감흥을 받았다.
 
맥켄지 기자는 『한국의 독립운동』 필자 서문에서 대한민국의 평화적인 항일의거에 대해 깊은 경의를 표하며, 한국민족성에 대해 세계가 재평가하기를 촉구했다.
 
“지금까지 세계의 정치인들로부터 무기력하고 비겁하다는 별명과 딱지가 붙어오던 한 나라가 이제 아주 높은 수준의 영웅심을 발휘한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무기도, 아무런 방어 수단도 없이 버티었던 것이다. 그들은 미리 폭력을 쓰지 않기로 굳게 맹세했다. 자기네의 운명이 선인들이 당했던 것과 꼭 같은 고문, 즉 토르케마다(스페인 최초의 종교 재판소장)와 그 일당이 행했던 것과 같은 교묘한 여러 가지 고문을 당하리라는 생각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예상했던 온갖 것, 즉 억눌리고 짓밟히는 온갖 고통을 견뎌내야만 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감옥에 끌려가면, 다른 이들이 대신 그들 자리에 들어섰고, 이들이 끌려가면 또 다른 이들이 그들의 일을 맡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도 만약에 문명세계의 항의가 일본의 행동을 중단시키지 못할 경우엔, 더 많은 사람이 이 무서운 행렬에 가담할 태세를 지금도 갖추고 있는 것이다.

한국민족성에 대하여 세계의 여러 나라들이 이전에 내렸던 그 평가가 잘못되었거나, 그렇지 않으면 이 민족이 이제 다시 새롭게 탄생하였다는 것은 명백한 일인 것 같다. 어느 편이 정말 정당한 설명일까? 양편이 다 옳을는지도 모른다.”
 
3.1운동 당시 어린 여성들이 일본 경찰들에 의해 폭행과 성고문이 마구잡이로 자행되는 가운데에서도 만세시위를 그치지 않았고, 감옥에서 나온 여학생이 “나는 이 모든 악형을 나라를 위하여 당하는 일이라 생각하기 때문에 수치도 아픔도 이길 수 있었다”고 말하는 등의 광경을 목도한 선교사 게일(Gale)도 한국민의 의지에 경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한국의 독립운동과 일제의 탄압을 기록한 보고서에서 “남자라도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어린 여학생들이 용케도 감당했노라”고 칭송하였고, 서양인들은 흔히 한국인을 비겁한 민족으로 인식하고 있는데 어느 민족역사에도 이처럼 용감하고 떳떳한 민족이 있었다는 것을 듣지 못했다고 적었다.
 
무자비한 폭력으로 제압하는 일본 경찰 앞에 무기를 들지 않고 맨몸으로 맞섰으며, 다수가 집결하였다 하여 일본인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지 않았던 ‘비폭력 정신’은 3.1운동을 여성사로서 복원하면서 다시 새겨보아야 할 우리 역사의 유산이자 가치이다.  (조이여울)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만화 <두 여자와 두 냥이의 귀촌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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