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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온몸으로 투표하라, 영향력을 행사하라'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2. 12. 18. 07:30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시민의 불복종 外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차갑고 간결하고 고요한 겨울이다. 산과 들이 흰 눈옷을 입고 조용히 쉬고 있다. 겨울 산과 저 소나무는 지금 무슨 꿈을 꾸실까. 산길을 천천히 걷는다. 푹신하게 쌓인 눈 위에 산짐승 발자국들이 어지러이 찍혀있다. 멧돼지, 고라니, 산토끼, 들고양이들이 살금살금 혹은 거침없이 돌아다닌 흔적들이다. 겨울인데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녀석들, 먹을 것을 찾아다니는 것이리라.
 
그런데 이 겨울, 먹을 게 곳간에서 썩어나갈 지경인데도 결코 쉬지 못하는 존재들은 누구일까? 산짐승들이 그럴 리 없다. 정답은 어떤 인간들. 가만히 있지 못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아서 이 산골까지 시끄럽다. 정치의 계절이니 권력을 뒤쫓느라 바쁜 정치꾼들이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대고 찾아온다. 마음이 가는 책들을 어루만지며 겨울날을 보내고 싶은 나는 마뜩찮다. 내 방식의 꿈꾸기와 느긋한 집중 상태가 깨져버린다. ‘어휴, 알아서 내 멋대로 투표할 테니 그만들 하시라고요! 무슨 텔레마케팅도 아니고.’
 
돌봄 대신 ‘약’을 먹는 ‘복지’사회의 아이들 

▲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정서적인 불안을 겪는 아이들이 늘어간다. '소아우울증' '주의력결핍' 등의 병명이 붙은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진정 약물치료일까. © 일다 
 
내가 사는 곳은 지금 대통령선거뿐만이 아니라 군의원과 도지사 보궐선거까지 겹쳐 있다. 장날에 읍에 나가면 알록달록한 유니폼을 입은 아르바이트 선거 홍보원들이 장보러 온 장꾼들보다 더 많다. 며칠 후면 쓰레기통에 처박히게 될 수많은 현수막들과 홍보물들이 뒤엉켜있는 시골 읍내를 걸어가다 보면, “정치든 뭐든 모든 것이 금방 소비되어 쓰레기가 되어버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게 피곤하다. 여기저기 설치된 스크린과 확성기에서 함께 울려대는 노래들과 외침 소리가 어찌나 시끄러운지, 알아듣기는커녕 귀를 가리고 달아나고 싶다. 추운 장터에 앉아 한 줌의 나물을 사가라고 권하는 할머니 목소리는 들리지도 않는다.
 
돈과 권력을 더 많이 가지려고 아등바등하는 어른들만 그런 것이 아니다. 가난한 집에 평탄치 않은 부모를 둔 어떤 아이들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산만하고 말썽부리고 성질부리고 거짓말하고 못되게 군다. 치고받고 싸우고, 울고불고 일러바치고, 앙칼지게 대든다. 우리는 안다. 불평등과 빈부격차가 심해지면서 이런 아이들이 계속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그런데 복지사회를 내세우고픈 대한민국은 이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나? 요즘 한창 유행하는 그 아름다운 ‘돌봄’과 ‘배려’를 해주고 있는가? 아니다! 약을 먹이고 있다고 한다. 교육복지가 시행되고 있는 학교에서는 가만있지 못하는 가난한 아이들한테 ‘사례 관리’라는 꼬리표를 붙인다. 그런 뒤 지역사회전문가, 사회복지사, 상담사들이 이 아이들을 ‘관리’한다. 상태에 따라서 전문 치료사, 소아 정신과 의사들까지 개입해서 ‘소아 우울증’, ‘주의력 결핍’, ‘과잉행동장애’ 같은 진단 검사를 실시한다.
 
“내가 말을 안 듣고 산만해서 약을 먹는 거래요.” 현실에서 온갖 구박을 받으면서 공짜 약까지 얻어먹고 있는 아이의 말이다. 병 주고 약주는 사회! 소아 정신과 병원과 상담소와 제약 업체들만 신나는 상황이 벌어졌다. 저소득층 아동복지기금이란 명목으로 풀려나오는 돈들을 나눠 먹는 시장이 형성된 거다.
 
결핍 가득한 환경에 적응하기 싫어서, 상처 입은 어린 짐승처럼 두렵고 화가 나서, 구박당하는 처지가 싫어서 가만있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화학적 약물을 투여하는 데 몰두하는 사회는 대체 누구를 위한 사회인가. 한창 자라는 어린 뇌에 흡수되는 약물이 미래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 누가 안단 말인가.
 
빈민가의 빌리는 정말 ‘문제아’였을까 

▲ 20세기 중반 영국 북부 광산촌에 있는 빈민가를 무대로 매를 키우는 '문제아'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케스-매와 소년>(배리 하인즈, 녹색평론사, 1998).   
 
문제아들에게 약을 먹이는 어른들에 관한 글을 읽다보니, 꽤 오래 전에 읽은 책 한권이 생각났다. <케스-매와 소년>(배리 하인즈, 녹색평론사, 1998). 20세기 중반 영국 북부 광산촌에 있는 빈민가가 이 소설의 무대이다.
 
빌리란 소년이 있다. 어느 누구에게도 따스한 보살핌을 받지 못한다. 밥조차 챙겨주지 못하는 바람난 엄마, 집나간 아버지, 동생이 먹을 것까지 깡그리 혼자 먹어치우는 잔인한 이복형. 빌리는 공부도 못하고 몸집도 작고 문제아로 찍혀있다. 주린 배를 안고 새벽에 신문을 배달하면서 어떻게든 기회를 틈타 슬쩍 먹을 것을 훔쳐서 자기 배를 채워야 한다. 맨날 지각하는 학교에서는 열등생 교실에 앉아서 졸기 일쑤이고, 선생들한테 툭하면 혼나고 매 맞고, 친구들로부터는 왕따를 당한다.
 
그런데 이 소년은 정말 그렇게 못나빠진 멍청이 아이인가? 아니, 그렇지가 않다! 빌리는 온전히 혼자 힘으로 케스라는 새매를 키운다. 달 밝은 밤에 그는 광산촌 근처의 폐허가 된 높다란 성벽 위의 매 둥지까지 어렵사리 올라가서 어린 매 한 마리를 꺼내다가 지극정성으로 키운다. 주변 누구도 보여주지 않았던 애정에 대한 갈구, 사랑하고픈 갈망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애완동물로 키우는 게 아니다. 빌리가 주는 먹이를 먹고 그의 손에서 훈련을 받지만 케스는 본래의 야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매이다. 호락호락하게 인간과 타협하지 않으며, 결코 비굴하게 굴지 않는다.
 
콘크리트에 완전히 갇힌 지금의 도시 빈민가 아이들에 비하면 빌리는 어쩌면 운이 좋은 건지도 모르겠다. 개인사는 불운이 겹쳐있지만 빌리한테는 갈 곳이 있었다. 인간이 받아야 하는 상처와는 관계없는 곳. 걸어서 광산촌의 공영 주택지를 조금만 벗어나면 빌리는 자연을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는 곳 근처에 야생지가 조금은 남아 있던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데이지 꽃과 미나리아재비가 피어있는 목초지가 있다. 농장과 들판이 있고, 참새와 찌르레기를 비롯한 온갖 새들이 노래하며 맘대로 둥지를 짓는 나무숲이 있고, 폐허가 된 수도원의 높다란 성벽에는 새매들이 살고 있다.
 
이 새매는 하늘을 날 때 바람을 맞으며 공중에서 정지해 있는 특성이 있다. 빌리는 서점에서 책을 훔치면서까지 열심히 매에 관해 읽고, 연구하고, 끈질기게 탐구한다. 온갖 어려운 용어들을 다 외워가면서. 빌리에게 유일하게 관심을 갖는 선생님 한 분이 어느 날 빌리의 새매 훈련 과정을 보면서 나눈 대화이다.
 
“매가 날 때는 뭔가 기이한 느낌이 있는 것 같더라.”
“선생님이 무슨 말씀하시는지 알겠어요. 세상이 아주 조용해지는 것 같다는 말씀이시죠?”
“바로 그거야!”
선생님이 크게 외치는 바람에 매가 움찔하며 긴장했다.
“쉿, 조심하세요, 선생님. 매가 놀라서 기절하겠어요.”
“그래. (...) 매는 마치 정적의 골짜기, 그래, 정적의 골짜기를 나는 듯해. 참 이상해, 그치?”
“매는 신경이 예민하니까요. 우리가 목소리를 낮춰야 해요.”
“아니야, 그것만이 아니야. 그건 본능적인 거야. 그것은 일종의 존경심이야!”
“알아요. 누가 나더러 애완용 매를 갖고 있다고 하면 화가 나는 것도 바로 그래서예요. 매는 애완용이 될 수 없어요. 그냥 훈련을 받은 것 뿐예요. 매는 사납고 거칠다고요. 매는 아무한테도 상관 안 해요. 저한테조차도 별로 관심이 없어요. 그리고 그게 바로 근사한 점이예요.”
“하지만 사람들은 그걸 이해하지 못할 거야. 사람들은 친구로 삼을 애완동물을 좋아하지. 그걸 가지고 야단법석을 떨고, 좀 귀여워하기도 하고, 주인노릇도 하고 말이야. 그렇지 않니?”
“네, 그런 것 같아요. 하지만 전 그런 건 관심 없어요. 저는 그냥 바라보고 날리는 게 좋아요. 저한텐 그거면 충분해요. (...) 어떤 때는 매가 이렇게 해주는 것이 저한테 선심을 쓰고 있는 것 같은 기분도 들어요.”
“(...) 내 생각엔 그건 어떤 자부심과 독립심인 것 같다. 자신의 아름다움과 용맹을 알고 그것에 만족하는 것 말이야. 그건 마치 똑바로 우리 눈을 마주 바라보면서 ‘넌 도대체 뭐냐?’라고 묻는 것 같거든. 매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것 같구나.”
“맞아요, 선생님.”
 
누추한 삶 속에 갇혀 있지만 빌리는 자연을 끈기 있게 관찰하고 그에 적응할 줄 안다. 동물들을 신뢰하고 인정하며 존중하기까지 한다. 세상으로부터 온갖 구박을 당하지만 이 소년은 결코 비굴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소년 소녀들에게 어른들이 약을 먹인다? 새매를 죽이고, 숲과 들판을 깡그리 없애고, 콘크리트 빌딩과 공장 폐수만 흐르게 하는 세상을 만들어 놓고는, 불평등과 절망으로 몸부림치는 아이들과 갈 곳 없는 아이들에게 약을 먹이는 세상이라니!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오늘날 한국사회에 태어났다면 

▲ 문명 비판론자이고, 자기 시대의 정부와 노예제를 비판하면서 힘껏 저항했던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책 <시민의 불복종>(은행나무, 2012년 개정판)   
 
문득 어떤 사람이 떠오른다. 자기가 살던 시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거부했던 사람. 자기 식대로 알아서, 자기 멋대로, 고집스럽게 저항한 사람. 삶을 실험하고 자연과 자기 자신을 열심히 탐구하면서 인생의 정수만을 살고자 한 사람. 150여 년 전에 죽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1817~1862)이다. (그의 이름 ‘Thoreau’는 한국어로 ‘소로우’ 혹은 ‘소로’ 두 가지로 번역되어 쓰인다)
 
그가 잠시 눈을 떠서 이 21세기 세상을 바라본다면? 세상이 얼마나 요지경처럼 변했는가를 보고 기절초풍하지 않을까? 자동차, 비행기, 컴퓨터, 휴대전화, 온갖 기계들과 약물들이 판치는 세상을 보고는, 이건 분명 끔찍한 악몽이라고 머리를 흔들지나 않을까? 탐험하고 관찰하고 기뻐하며 두 발로 걸어 다닐 야생의 숲과 강과 자연이 사라진 세상을 보며, 소로는 어쩌면 큰 비탄에 빠지지 않을까? 아니면 특유의 냉소로 진짜 인간은 없고 “단지 인간성의 그림자이자 추억이며 산 채로 염을 해서 세워 놓은 인간”, 그러니까 좀비 같은 인간은 만날 필요가 없으니까 자기는 이만 사라지겠노라고 인사하고 휙 돌아서지 않을까?
 
자연 예찬서인 것처럼 알려진 <월든>으로 유명한 소로지만, 오늘은 그의 책 중에서 <시민의 불복종>(은행나무, 2012년 개정판)과 <소로우의 일기>(도솔, 2003)를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청년들이 <월든>보다는 이 두 책을 먼저 읽는 게 더 좋으리란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월든>이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단순하고 간결한 삶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사람들이 그 책을 애호한다나? 불필요한 삶의 사치들을 돈으로 맘껏 즐기는 부르주아 자연주의자들과 예술가들께서 호화로운 아파트와 강변의 별장과 비싼 자가용 뒷좌석에다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을 <월든>을 비치해 놓는다는 말을 들었다. 화려한 사진들이 가득한 타샤 튜더의 수 만평이나 된다는 아름다운 정원 책들과 함께 말이다. 숲에 통나무를 짓고 자연 속에서 은둔자처럼 살았다고 하니까 멋있어 보이는 모양이다.
 
이 허영심 가득한 로망은 그 자체로는 해가 안 되겠지만, 문제는 소로가 진짜 추구했던 삶을 왜곡해버린다고 느껴진다. 나는 소로가 그들이 생각하는 식의 숲 속에서 은둔하며 유유자적하던 자연예찬론자만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소로 운운하는 부르주아들이 소로의 글을 찬찬히 읽어보면 그가 얼마나 뼛속 깊이 시대에 저항하는 사람인지 알고는 깜짝 놀랄 것이다. 적당한 보수주의나 타협과는 너무나 거리가 멀뿐더러, 그가 사실은 체제의 반항아이자 물질적 부를 움켜쥔 사람들을 얼마나 경멸했는지를 알고는 부끄러워할 텐데 말이다. 실제로 소로가 숲속에서 산 것은 대략 2년 정도였고 그 삶도 은둔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
 
내가 이해한 소로는 문명 비판론자이고, 자기 시대의 정부와 노예제를 비판하면서 힘껏 저항한 사람이었다. 물질에 얽매이지 않는 소박한 삶을 살고 싶어 했고, 죽을 때까지 비정규직으로 이런저런 일들을 했으며, 자아 탐구자이자 모험가, 진리 탐구자였다. 무엇보다 그는 글쓰기를 진정 사랑한 사람이었다. 산업화로 인해 문명이 자연을 점차 잠식해 들어가던 시절, 하지만 아직 인디언의 자취가 남아 있고 자연이 풍요롭던 아메리카 땅, 그 야생의 끝자락 시대를 살던 소로는 인간이 만든 아름다운 공원이나 정원이 아니라 야생의 습지가 훨씬 소중하고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한 사람이다.
 
노예제도를 폐지하지 않는 정부한테는 세금을 내지 않겠다며 인두세를 거부한 죄로 감옥에 들어갔다가 나온 뒤에 쓴 글이 <시민의 불복종>이다. 나중에 간디와 마르틴 루터 킹, 톨스토이 등에게 큰 영감과 영향을 준 길지 않은 글이다.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
 
“나는 ‘가장 좋은 정부는 가장 적게 다스리는 정부’라는 표어를 진심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이 하루빨리 실현되기를 바란다. (...) 대부분의 정부는 거의 언제나 불편한 존재이다. (...)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존경을 받을 만한 정부가 어떤 것인지를 분명히 밝혀야 한다.”
 
“우리는 먼저 인간이어야 하고 그 다음에 국민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법에 대한 존경심보다는 먼저 정의에 대한 존경심을 기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오늘 날 이 정부에 대해 어떻게 처신하는 것이 한 인간으로서 올바른 자세일까? 나는 수치감 없이는 이 정부와 관계를 가질 수가 없다. 나는 노예제를 인정하는 정부인 이 정치 조직을 단 한순간이라도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가 없다.”
 
우리가 하고픈 말을 대신해주는 것 같지 않은가. 나 역시 수치감 없이 한국 근현대사와 지금 이 나라 정부를 바라볼 수가 없다. 원전 마피아들과 토건 재벌들만 배불리는 이 정부를 나의 정부로 인정할 수가 없다. 또한 핵발전소를 멈추지 않는 정부의 국민이고 싶지가 않다. (그런데 감옥에 가기 두려워서인지 문제가 생기는 게 귀찮아서인지 나는 대충 세금을 내고 있다. 마음과 행동의 불일치이다.)
 
“원칙에 따른 행동, 즉 정의를 알고 실천하는 일은 사물을 변화시키고 관계를 변화시킨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혁명적이며, 과거에 있던 것들과는 완전히 다른 것이다. (...) 하지만 불의가 당신으로 하여금 다른 사람에게 불의를 행하는 하수인이 되라고 요구한다면, 분명히 말하는데, 그 법을 어겨라. 내가 강력하게 비난하는 해악에게 나 자신을 빌려주는 일은 없도록 해야 한다.”
 
“온몸으로 투표하라. 단지 한 조각의 종이가 아니라 자신의 영향력 전부를 행사하라. 소수가 무력한 것은 다수에게 다소곳이 순응하고 있을 때이다. (...) 시작이 아무리 작은 듯이 보여도 한 번 행해진 옳은 일은 영원히 행해진다.”
 
“부자는 언제나 자신을 부자로 만들어준 기관에게 영합하게 마련이다. 단언 하건데 돈이 많을수록 미덕은 적다. 왜냐하면 돈이 사람과 목적 사이에 끼어들어 그것을 대신 획득해주기 때문이다. 돈이 없었더라면 직접 해답을 찾기 위해 고심해야 할 많은 문제들을 돈은 간단히 유보시켜 준다. (...) 수단이라는 것이 늘어갈수록 삶의 기회들은 그만큼 줄어든다.”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소로의 일기에는 

▲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죽음을 맞이한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남긴 일기를 발췌해 구성한 책 <소로우의 일기>(도솔, 2003) 
 
소로는 스무 살부터 마흔 다섯 살에 폐결핵으로 죽기 전까지 39권의 일기를 남겼다. 우리나라에서는 전체 일기 중 일부를 발췌하여 <나를 다스리는 것은 묵직한 침묵>(거송미디어, 2006)와 <소로우의 일기>(도솔, 2003)로 번역 되어 있다. 인용하고 싶은 부분이 아주 많지만 지면이 너무 짧으니 간단하게 몇 구절만 보자.
 
“나의 일기가 사랑의 기록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나의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세계, 내가 생각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서만 일기에 적고 싶다.”
 
“사람들의 지능은 대체로 메말라 있다. 지능에 열매를 맺게 하고 상상력을 낳는 것은 영혼과 자연의 결합이다. 우리가 풀 한 포기 없는 대로처럼 메말라 있을 때에도 건강하게 양육된 감각은 자연에 공감하여 우리와 자연과의 관계를 회복시킨다.”
 
“나는 두 종류의 사람을 안다. 절대 다수는 사회적 인간이다. 그들은 피상적인 삶을 산다. 그들의 관심은 일시적이고 덧없는 것들에 있다. 그들은 영원의 바다에 뜬 거품과 찌꺼기에 불과한 소식들만을 언제까지나 묻고 또 물을 뿐이다. 그들에게도 정책은 있다. 주제의 빈곤을 예절로 보충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공이란 부와 사람들의 인정이다. 세상은 그들에게 충고하고 그들은 그 충고에 귀 기울인다. 그들은 전적으로 덧없는 삶을 산다. 상황의 피조물이다.”
 
“멸종된 동물들을 생각하면 내가 길들여진 땅, 말하자면 거세된 땅에서 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나와 교제하는 자연은 불구가 된 불완전한 자연이 아닐까? 봄을 예고하고, 사계절을 특징짓는 다양한 자연의 소리와 노래, 이동과 움직임, 모피와 깃털의 변화를 생각할 때면 나는 자연 속에서의 인생, 자연 현상의 불완전함을 통탄한다. 나는 그것이 슬프다.”
 
소로는 “이처럼 평화롭고 만족스럽게 죽음을 맞이하는 사람은 보지 못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평화롭게 죽음을 맞이했다. 죽기 전에 친척 아주머니가 하느님과 화해를 했느냐고 묻자 그는 “우리가 언제 싸운 적이 있었나요”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 집 작은 아이는 아직 소로의 글에 관심이 없지만, 큰 아이는 전에 소로의 일기를 잠시 읽어보고는 자기도 일기를 꾸준하게 써보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곧 스무 살이 되어가는 큰 아이에게 물어봐야겠다. 피상적이지 않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삶을 위해서, 사실을 깊이 보고 그 이면을 표현하기 위해서 일기를 계속 쓰고 있느냐고. 기품 있고 고요하고 무한한 격려가 되는 친구를 만나듯이 자신의 고독을 만나고 있느냐고.  (도은)

     <케스-매와 소년> 배리 하인즈, 녹색평론사
     <시민의 불복종> 헨리 데이빗 소로우, 은행나무
     <소로우의 일기> 헨리 D. 소로우, 도솔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독립언론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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