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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감성 충전

과학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2. 11. 20. 14:00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웰컴 투 머신, 1984 外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감시와 통제로 향하는 머신토피아를 꿰뚫다

자동차, 백화점, TV, 영화보다는 땅과 바위, 나무와 들풀들, 새와 잠자리를 더 좋아한다. 샘물, 바람, 해질녘 노을처럼 인간의 간섭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고유한 속성대로 존재하는 것들을 사랑한다. 그들을 가까이 만날 수 있는 장소에 자리를 잡고, 뿌리를 내리며 살고 싶었다.

 
인간의 손길에 훼손되지 않은 야생의 땅을 꿈꾸지만 한국에는 이제 그런 곳이 없다. 언젠가 그런 야생의 장소들이 되살아나길 간절히 바라면서, 작은 산골에 빈약하나마 둥지를 틀고서 이 장소를 알아가고 있는 중이다. 나는 이 장소에서 먹고 마시고 숨 쉬는 생명체이다. 느끼고 생각하고 분노할 줄 아는 동물계 영장류 인간이다. 전체 생태계에서 하나의 자리를 차지하는 존재란 뜻이다.
 
이곳에서 철없는 아이들과 아웅다웅하고 살림하고 농사일을 하면서 살아가다 보면, 세상이 빠르게 변화해간다는 사실을 잊을 때가 종종 있다. 시골에 온 초기에는 일부러 잊으려고 애쓴 적도 있지만, 이제는 자연스레 무심해질 때가 더 많다. 그러다가 뭔가 일이 있어서 오랜만에 서울에 갈 기회가 생긴다. 고속버스에 올라타자마자 첨단 기술들의 향연이 펼쳐진다. 버스 안에 설치된 TV가 켜지고, 휴대폰이 울리고, 인터넷 검색이 시작되고, 스마트폰, 디지털카메라, MP3 등이 등장한다.
 
기계에 둘러싸인 삶, 익숙하고 편한가요? 

▲ 데릭 젠슨과 조지 드래펀이 함께 쓴 <웰컴 투 머신>(한겨레출판, 2006)은 과학 기술을 통한 감시와 통제의 문화를 고발하는 책이다.    
 
서울에 도착한다. 도시라는 거대 기계가 돌아가는 소리와 혼탁한 공기가 제일 먼저 나를 반긴다. 복잡한 지하철을 탄다. 천장에 매달린 모니터는 번쩍대는 영상들을 내보내고, 고개를 숙이고 기계들을 만지작거리는 사람들만 가득하다. 그래도 20여 년 전에는 지하철에서 책을 읽는 사람들을 꽤 볼 수 있었는데…. 길거리 전광판들을 비롯해서 조작된 영상 이미지가 어딜 가나 넘쳐난다.
 
지인의 아파트에 도착한다. 경비원은 없고 현관 입구부터 자동감시 장치가 맞이한다. 인터폰, CCTV, 지인이 알려준 번호를 눌러야 열리는 이중 자동문, 엘리베이터 등 온갖 기계장치들을 통과해서야 안에 들어간다.
 
“현대 기술, 특히 감시 장치들이 사람들의 삶에 아주 깊이 개입하고 있네요. 너무 빠른 속도라서 좀 어리둥절한데요.”
“익숙해지면 당연하게 여길 거예요. 이제 여기 생활은 기계가 없으면 곤란하게 되었어요. 기계가 인식하고, 기계가 대신하는 일이 아주 많지요. 세상 참 편해졌죠?”
“글쎄요, 나로서는 왠지 위축되고 자유롭지 못한 것 같고, 이게 뭘까 싶은데….”
 
오늘은 데릭 젠슨과 조지 드래펀이 함께 쓴 <웰컴 투 머신>(한겨레출판, 2006)이란 책을 소개하고 싶다. 한국어 책 부제는 ‘머신토피아, 또는 권력에 관한 보고서’이고, 영문 책 부제는 ‘과학, 감시, 그리고 통제의 문화(Science, Surveillance and Culture of Control)’이다.
 
기계를 환영한다는 역설적인 제목을 붙인 이 책은 놀랍게도 아주 흥미진진하다. 난해하거나 전문적이지 않고, 명료하면서도 대담한 방식으로 쓰인 글이다. 이 책을 읽으면 나 같은 촌사람도 현대의 과학, 그리고 최신 기술의 성과와 그 응용이 어디까지 왔는지를 상당히 많이 알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과학과 기술 만세를 외칠 만한 내용이겠지만, 나한테는 현대 문명이 ‘결국 이 지경까지 왔구나.’ 싶은 내용들이다.
 
급진적 환경운동가, 에코아나키스트, 작가, 글쓰기 교사로 알려진 데릭 젠슨의 다른 글에 매료된 적이 있던 나는, 어느 날 저녁을 먹은 뒤 편하게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깊은 밤을 넘기고 새벽까지 책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마음이 턱 막히는 부분을 읽다가는 밖으로 나와서 숨을 골라야 했다.
 
고요한 어둠 한가운데서 한참을 서 있었다. 검푸른 하늘에 떠있는 별들, 멀리서 들리는 고라니 울음소리, 앞산을 흔들고 가는 바람소리를 듣고서야 마음이 놓였다. 그 순간 내가 살아있는 몸을 가진 인간이고, 지금 이곳에는 어떤 기계도 감시 장치도 없다는 안도감으로 조금 행복하기조차 했다.
 
‘만물을 보는 눈’이 우리를 지켜본다 

▲ 팬옵티콘은 영국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죄수를 효과적으로 감시할 목적으로 고안한 원형 감옥이다.  
 
<웰컴 투 머신>은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는 새로운 권력 획득 방식에 대한 치밀한 보고서이다. 18세기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이 설계한 원형감옥 팬옵티콘(Panopticon)과 1달러짜리 지폐 뒷면에 그려진 그림과 글귀에 대한 흥미로운 설명으로 시작하는 이 책에서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
 
“지난 수천 년 동안 우리 문화는 고대 메소포타미아를 시발점으로 중동, 지중해 인근,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 아시아, 오세아니아로 끊임없이 세력을 확장해왔다. 그 과정에서 전 세계 산림의 90%가 파괴되었고, 전 세계 어획고의 90%가 고갈되었으며, 비슷한 비율로 조류와 유제동물들이 자취를 감췄다. 대부분의 다양한 문화들이 파괴되거나 포섭되거나 강제로 동화되었다. 그 결과 지구에서 인간과 다른 방식으로 인식하고 존재하는 것들은 대부분 잊혀졌다.”
 
인간이 너무 대단해져 버린 것이다. 그리고 너무 많은 기계들을 만들어놓았다. 크게는 수많은 도청장치와 위성 감시 기구가 있다. 사방에서 마주치는 CCTV나 내비게이션 같은 위치 추적 시스템, 상품에 삽입되는 미세 장치인 RFID(전자태그), 보안카드, 인터넷사용 ID와 비밀 번호, 피부에 삽입하는 미세칩, 각종광학장치, 극소바이오기술 등 그 범위나 차원에서 너무나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그 목적도 군사적이거나 정치적인 것은 물론이거니와 시민사회의 통제나 반대자 색출 그리고 다국적기업의 데이터베이스 구축을 위한 것까지 한계가 없는 것 같다. 국가정보조직들은 필요하면 개인의 통화기록, 이메일기록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언제든지 열람할 수 있다고 한다.
 
중앙 탑 안에서는 모든 것을 볼 수 있지만, 주위를 둘러싼 원형 건물들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오직 보여 지기만 하는 “팬옵티콘은 단순한 건축 아이디어가 아니라 현대문명을 뒷받침하는 권력관계의 모델이기도 하다. 팬옵티콘의 통치자는 신과 비슷하다. 전지전능하고 눈에 보이지 않는다. 접근할 수 없는 불가지의 신, 권력자가 중재하고 대표하는 신이 된다.” 이때의 권력자란 과학, 성직자들, 대기업, 군대 같은 조직들이겠다.
 
미국 정보인식국의 로고에는 (1달러짜리 지폐에도 그려져 있는) 끝이 잘린 피라미드와 ‘만물을 보는 눈’이 그려져 있다고 한다. “이 섭리의 눈, 신의 눈, 경찰의 눈, 군대의 눈, 대기업 대표의 눈은 금빛 광선을 내뿜으며 지구를 내려다본다. (중략) 이들이 수집하는 정보에는 재정, 건강, 쇼핑, 전화, 고용, 도서관기록, 지문, DNA 샘플, 걸음걸이 분석, 두뇌 단층촬영, 감시 사진, 연인에 관한 정보, 전화상의 대화, 이메일 사본, 인터넷 이용 상황, 착취 가능한 다른 약점들까지 정상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온갖 정보가 포함될 수 있다.”
 
“감시는 포르노와도 흡사하다. 감시의 사촌이자 과학의 사생아인 포르노는 관찰자와 피관찰자라는 역학관계, 힘 있는 감시자가 무력한 상대를 바라보는 관계라는 점에서 감시 혹은 과학과 동일하다. 이것으로 포르노의 대중적 인기를 조금이나마 설명할 수 있다. 삶에서 무력한 사람들이 포르노를 보면서 강한 인간처럼 느끼게 되는 것이다.”
 
감시와 통제의 기술: ‘너희는 이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 

▲ 인간을 통제하는 거대한 체제를 비판하고 있는 조지 오웰의 책 <1984>(문학동네) 
 
그런데 통제와 감시는 필연적으로 자유와 충돌하지 않나? 누가 정보를 수집하고, 저장하고, 접근하고, 이용하는가? 정보국들과 군대와 산업체들은 적들(?)에 대한 이런 첩보활동이 사람들과 세상을 더욱 안전하게 지켜준다고 말하면서 권력을 행사하고 있는데, 과연 그러한가? 오히려 이것은 자연세계와 타인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아닐까?
 
책에 인용된 과학 저술가 스탠리 아로노비츠와의 대화 구절을 보자.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인간의 지배 아래 두는 것입니다. 과학자들은 추론하고, 추론을 토대로 예측한 결과를 인간과 자연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이용하려 들지요. 유전공학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유전공학을 뒷받침하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 자연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의존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연에 개입하게 될 겁니다. 더 빠른 성숙과정, 더 많은 생산량, 더 저렴한 물건이 필요해질수록 인간이 나서서 그 과정을 더욱 철저히 통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과정은 결국 지구의 모든 환경과 생물들을 독소와 방사능으로 오염시킬 것이다. 자연의 생태적 구조를 체계적으로 해체할 것이다. 이웃한 인간과 동물을 체계적으로 노예화하거나 멸종시키고, 세상의 모든 것을 표준화하고, 자연의 모든 신비를 통제하거나 소멸하려 들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하면 나는 분노가 치미는데 여러분은 어떠한가?
 
조지 오웰은 <1984년> 끝 부분에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옛날 전제군주의 명령은 ‘너희는 이렇게 해선 안 된다’는 식이었고, 과거 전체주의자의 명령은 ‘너희는 이렇게 해야 한다’는 식이었지만, 우리의 명령은 ‘너희는 이렇게 하도록 되어 있다’는 식이네.” 자유는 완전히 사라졌고 그렇게 하도록 조작하는 거대 체제만 남았다.
 
그렇다. 슬프게도 어느 정도는 이게 지금 우리의 현실이다. 산업화된 이 세상에서 우리들 대다수는 자연과 분리된 채 살아간다. ‘분리’가 아니라 어쩌면 ‘격리’란 말이 더 맞을 지도 모르겠다. 기술이 이런 격리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야생의 존재들과 교류하거나 관계를 맺기보다는 기계에 둘러싸여 기계와 상호작용하고, 기계에 의존하고, 기계를 위해 일하면서 삶을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기계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한다면
 
일상에 파고든 기계를 거부하는 것이 결코 쉽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이 전하는 메시지는 분명하다. 우리가 기계에 대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기계와 헤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계의 신화를 믿는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라고 한다. 생명보다 권력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사람이 되지 말자는 메시지이다. 때로는 혼자서 때로는 신뢰하는 이들과 함께 최선의 방법으로 마음으로부터 기계를 몰아내고, 더 이상 번쩍이는 장치들에 묶여 지내지 말자고 권유한다.
 
“당신 자신의 삶, 육체, 풍경, 당신 자신의 세상에서 그냥 보고 지나치는 여행자가 되지 마라, 이곳은 당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다. 이것은 당신의 삶이다. 현명하게 살아라. 기계가 아니라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살아라.”
 
새로운 기계파괴운동(러다이트)으로 이끄는 매력적인 맺음말이다. 힘으로는 기계를 이길 수 없을 테지만, 영화에서와는 달리 매트릭스 밖에는 아직 기계가 손을 뻗지 못한 장소가 조금은 남아 있다. 어떤 노력과 정성이 있으면 아름다운 생명들과 인간 이외의 존재들도 만날 수 있다. 시스템이나 기계 속에서 하나의 인적 자원이 되려는 게 우리 삶의 최종 목적은 아닐 테니까. 감시당하는 톱니바퀴 말고 삶에는 분명히 다른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탐구열에 불타는 청년이라면, 유명한 철학자이자 정신 병리학자였던 미셸 푸코의 <감시와 처벌>이란 책도 읽어보면 좋겠다. ‘감옥의 역사’란 부제가 붙어 있는데, 국가 권력의 가장 중요한 기구이자 장치인 감옥의 문제를 다루면서 권력의 정체를 파헤치는 책이다. 읽고 나면 자신의 지성에 박수를 보낼 수 있을 듯싶다. (고백하건데 나는 아주 오래 전에 책을 사놓고는 군데군데 읽었을 뿐 여태 완독을 못했다. 이번 기회에 도전해봐야겠다.)
 
땅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작고 위대한 소리들>(실천문학사, 2010)은 인간세계에 만연한 파괴성을 깨닫고 다른 방식의 삶이 가능한지 알고 싶었던 젊은 젠슨이 기획한 대담집이다. 
 
1995년에 미국에서 출간된 데릭 젠슨의 초기작 <작고 위대한 소리들>(실천문학사, 2010)도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이다. 이 책은 우리 문화에 만연한 파괴성을 깨닫고 다른 방식으로 사는 게 가능한지를 알고 싶었던 젊은 젠슨이 기획한 대담집이다.
 
“우리는 자연과 다른 존재들과 연결되어 있다”고 믿는 사람들, 삶의 원형을 회복해서 자연스럽게 사는 길을 고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땅과 야생을 보호하고자 투쟁하는 환경운동가, 학자, 신학자, 기술비판론자, 아메리카 인디언, 심리학자 등 12명의 지성들과 저자가 깊이 있게 대화한 이야기들이다. 이 책은 출간된 해에 비평가가 꼽은 미국의 10대 환경 책 중 한 권으로 주목받았다고 한다.
 
원제가 “땅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Listening to the Land))”인 이 작고 소박한 책에 실린 12명의 이야기들은 저마다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나는 세상이 너무 파괴되고 있어서 기운이 빠질 때마다 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읽는다. 그때마다 조금씩 힘이 나면서 만나본 적 없는 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특히 ‘기술은 선인가, 악인가’를 이야기하는 제리 맨더와 ‘우리는 장소이다’고 말하는 데이브 포먼의 글은 꼭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기술에 관한 제리 맨더의 이야기는 <웰컴 투 머신>의 주제와도 깊이 통한다.
 
“민주주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업을 본질적으로 그런 기술이 구현한 기계의 일부로 이해하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사실 기업은 세계적인 차원에서 이용되는 기계를 만들어내고, 갈수록 빨라지는 순환 속에서 확산되고 있어요. 지금 전 세계에 손을 뻗은 거대 기술망은 지구 어디에서나 기업의 자본이 즉각 이전되는 것을 가능하도록 만들었어요. 동시에 기업이 자연, 그리고 저항적인 국가와 토착민들을 침범하는 것을 점점 더 수월하게 만들고 있지요.”
 
“TV는 세계적인 전달 시스템으로 기능하면서 이미지를 동질화하고, 주입시키고, 새롭게 세계화된 기업의 비전을 전파하고 있어요. 컴퓨터는 그런 세계화된 조직들을 가능하게 만드는 신경계 노릇을 할 것이고요. 무역협정은 저항을 무력화시켜버릴 테지요. 유전공학은 세계시장을 살아있는 생물의 체내 세포조직으로, 우주공학은 그 시장을 먼 우주 바깥으로 확대하는 것이지요.”
 
“해결책은 그 흐름에 역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술을 체계적으로 생각해보는 훈련을 전혀 받지 않았고 정반대의 교육을 받아왔어요. 신기술은 곧 진보이며 그런 진보는 언제나 유익하다는 말만 들어왔거든요. (중략) 하지만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모든 기술은 예측할 만한 사회적, 정치적, 환경적 파장을 낳는다는 뜻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기술이 일으키는 사회적 변화입니다, 기술이 우리의 지식과 사고, 경험과 참여와 권력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가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존재는 사랑스러우리니
 
과격한 환경단체로 알려진 ‘어스 퍼스트!(Earth First!)’의 공동설립자이자 땅을 위해서는 어떠한 타협도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열정적 환경운동가 데이브 포먼의 다음 이야기도 내 마음을 아리게 한다.
 
“어떤 기자가 묻더군요. 후손들이 날 어떻게 생각할 것 같으냐고요. 나를 에코테러리스트, 과격파, 괴팍한 보존운동가로 보지 않겠느냐고 하더군요. 내가 말했지요. 천만에, 걔들은 이렇게 물을 거예요. ‘도대체 왜 더 열심히 싸우지 않으셨어요? 왜 더 과격하게 저항하지 않으셨어요? 왜 더 전투적이지 않으셨어요? 왜 숲을 더 많이 구해내지 못하셨어요?’”
 
매튜 폭스라는 신학자의 이야기도 청년들과 함께 깊이 생각해보고 싶다. “사람들을 자기 신체로부터 분리시키려는 데에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어요. 사람들이 신체로부터, 자기 체험으로부터 멀어지게 되면 제국의 건설자들은 그 빈자리를 소비재나 군사적인 승리로 채우겠지요. 신체로부터 멀어진다는 것은 뱃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도덕적 격분’으로부터도 멀어진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그 사람은 공감도 느낄 수 없게 됩니다.”
 
올해 가을걷이를 하면서 땅콩을 캐서 널어놓았다. 산까치나 산비둘기 등이 워낙 좋아하니까 그물망으로 잘 덮어서 말렸더랬다. 햇살 따사로운 어느 날 흙 마당에 앉아서 땅콩을 정리하고 있는데, 대여섯 마리의 새들이 마당으로 몰려들었다. 땅콩과 나를 가까이 에워싼 채 빨래 줄에도 내려앉고 평상에도 걸터앉아서 “찌르륵, 찍찍찍,” 지들끼리 갖은 수다를 떨어대는 게 아닌가. 땅콩을 먹으려고 몰려온 것이리라. 머리와 등은 까맣고 배와 얼굴은 주홍빛이고 부리는 하얀 것이, 황금새란 이름이 딱 어울리는 어여쁜 새들이었다.
 
그들의 명랑한 수다를 듣다가 잠깐 한 눈을 판 사이, 한 녀석이 휙 날아와 땅콩 하나를 낚아채 갔다. 그러자 다른 녀석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우르르 날아와서는 입에다 땅콩 하나씩을 물고 날아갔다. “아니, 조것들이!” 입으로는 큰 소리로 나무랐으나 마음으로는 그들의 방문이 내심 반갑고 기뻤다. 고유한 속성대로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존재들은 언제 봐도 사랑스러우니까. (도은)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독립언론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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