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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빼앗긴 자들은 어떻게 정의를 찾을 수 있나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아룬다티 로이'를 읽다
현대문명과 거리를 둔 채, 산골에서 자급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도은님이 <이 시대 청년들과 함께 읽고 싶은 책> 연재를 시작합니다. 도은님은 두 딸과 함께 쓴 “세 모녀 에코페미니스트의 좌충우돌 성장기” <없는 것이 많아서 자유로운>의 저자입니다. www.ildaro.com
‘신비로운 나라’ 인도의 고통스러운 현실을 보다
▲ 아룬다티 로이는 30대 중반이던 1997년에 <작은 것들의 신>(문이당)이란 소설로 영국 부커상을 받았고,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인도란 나라는 서양 여행자들뿐만이 아니라 한국 여행자들도 많이 끌어당기는 곳이다. 오래된 나라이고 땅덩이도 아주 크다.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종교들이 정신없이 뒤섞여 있는데다가 인구는 또 얼마나 많은지 어딜 가나 바글바글 번잡스럽다. 누군가 인도에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듣곤 하는데, 가보지 않은 사람이 들으면 언뜻 근사해 보인다. 서양인들로서는 자기들 내면의 오리엔탈리즘을 적당히 만족시켜줄 수 있는 곳일 테니까 조금은 수긍이 간다. 그런데 한국인들은 왜 인도에 가고 싶어 할까.
대부분의 피상적인 여행기가 말해주듯이 큰 돈 들이지 않고 색다른 걸 경험하려는 욕구가 있겠고, 오래된 문명이니까 눈요깃거리도 많을 것이다. 분명 여행자들을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나라인데, 내 생각에는 여행비가 비교적 싸게 먹힌다는 사실도 중요한 이유가 아닐까 싶다. 게다가 인도는 ‘명상, 요가, 영성이 꽃피운 신비로운 나라’라는 요상한 이미지까지 덧붙여진 나라가 아닌가. 한참 전에 이런 이미지에 홀려 돈도 별로 없으면서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몇 달 동안 인도를 헤매 다녔던 한국 여자가 있었는데, 바로 나란 여자이다.
어쩌다보니 그때 우리는 가이드북이 지정한 여행자 루트를 별로 따르지 않았고, 아주 가난하게 현지인들과 부대끼며 몇 달을 지냈다. 처음에는 나도 한국의 일상과 너무 다른지라 강한 인상을 받으면서, “오, 대단한 나라구나”라고 생각했다. 허나 조금씩 알아 갈수록 이 늙고 낡아버린 인도란 나라에 덧씌워진 신비와 그에 홀린 나 자신이 어찌나 가소롭던지 헛웃음이 나오곤 했다.
기분이 상하니까 되도록 안 보려고 해도, 그 사회의 충격적인 빈부 격차, 머릿니처럼 바글거리는 빈민들, 인간들로 인해 무섭게 황폐해진 자연이 계속 보여서 참 괴로웠다. 대도시 슬럼가나 궁벽한 시골 아이들의 굶주린 눈빛도 좀체 잊을 수가 없었다. 사탕발림으로 새롭게 치장했을 뿐 여전히 위세를 떨치는 오랜 계급제도, 거기에 묶인 채 고통 받는 문맹의 가난한 사람들도 영 마음에 걸렸다. (10억이 넘는 인도 인구 중에서 4억 이상이 글을 못 읽는 문맹이다.)
그 고약한 기분을 뭐라고 말할까. 뭔가 신비로운 깨달음을 얻고 영혼을 고양시켜보겠노라고 애써서 길을 떠났는데, 정작 만난 것은 오천년 묵은 구렁이처럼 서리서리 똬리를 틀고 앉아 자연과 하찮은 인간들을 맘대로 집어삼키는 제도였던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나도 그런 구렁이, 안 보고 싶었다. 멋진 여행이었고 정말 즐거웠다고, 대단한 나라라고 회상하고 싶었다. (미궁 같다는 면에서는 대단하긴 대단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세계화까지 받아들인 그 노회한 구렁이의 똬리 밑에서 끝없이 쏟아져 나오는 쓰레기들과 궁상맞은 육신들의 처참한 곤궁을 모른 척 하면서, 내 영혼의 고양만을 추구하기는 그리 쉽지 않았다.
만들어진 가짜 이미지에 들뜨고 혹했던 내 마음을, 그때는 위선인지 허영심 때문인지 차마 드러내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비판하고 한심해했다. 그런데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우리는 하나이고, 사랑만이 유일한 답이니라.” 그러면서 고상한 목소리로 인도의 영성과 신비를 논하는 동서양의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묻고 싶다. 인도 어디에나 우글거리는 그 빈민들의 텅 비어 쪼그라든 위장과 터질 듯 빵빵한 당신의 위장은 과연 하나이냐고, 당신과 그들이 사랑으로 정말 연결되어 있느냐고.
인도의 핵개발과 댐건설에 저항한 '지구의 시민'
▲ 아룬다티 로이의 <생존의 비용>(문학과 지성사) 인도의 핵무기 개발과 대형댐 건설을 비판한 에세이집.
책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삐딱하게 인도 이야기를 꺼내는 것은 이번에 함께 읽고 싶은 책의 저자가 인도인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 내가 마주쳤던 고약한 기분, 머리가 지끈거릴 만큼 의아해했던 문제들을 또렷이 볼 수 있게 해준 사람이다. 아룬다티 로이, 그녀는 인도 남부 케랄라주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30대 중반이던 1997년에 발표한 <작은 것들의 신>이란 소설로 영국 부커상을 받았고, 40여개 언어로 번역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하지만 곧이어 인도의 핵무기 개발과 대형댐 건설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펼치는 에세이집 <생존의 비용>을 펴내면서 힘 있는 이권세력으로부터 눈엣가시로 취급당하며 많은 적이 생겼다. 댐 건설 반대 항의 시위에 나섰다는 이유로 법정에 기소되기도 했다. <생존의 비용>에 나온 그녀의 말을 한번 들어보자.
“큰 댐이 국가의 ‘개발’에서 하는 역할은 핵폭탄이 국가의 무기고에서 하는 역할과 같다. 그것들은 둘 다 대량 파괴 무기이다. 그것들은 둘 다 정부가 그들의 국민들을 지배하기 위해 사용하는 무기이다. 둘 다 인간의 지성이 생존의 본능을 넘어섰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문명이 한 고비를 넘어 그 방향을 꺾었다는 불길한 징조이다.”
규모는 인도보다 작지만 이명박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4대강 ‘개발’이 생각나는 대목이다. ‘물을 지배하는 세력이 세상을 지배하는가?’ 이 정부도 로이 말처럼 사람들의 생존 본능을 거스르고 있는 게 분명해 보인다. 그토록 잦은 사고가 나는 데도 원자력 발전소를 계속 짓겠다는 우격다짐의 숨겨진 의도 또한 불길하기 짝이 없다. 핵무기 개발을 위한 포석이 아니라면 대체 무엇일까.
“지구상에 어디 점잖은 사람치고 아직도 서구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그들의 역사는 다른 사람들의 피를 빨아먹고 자랐다. 식민주의, 인종차별, 노예제, 인종청소, 세균전, 화학 무기, 실제로 이 모든 것들을 그들이 발명했다. 그들은 나라를 강탈하고 문명을 멸망시키고, 인구 전체를 몰살하기도 했다.”
딱 하나 이 문장에는 이의를 제기하고 싶다. 아직도 서구에 대한 환상을 품고 있는 점잖은 사람이 한국에는 아주 많아 보이니까 말이다.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점잖은 사람’은 많을지라도 로이가 생각하는 ‘점잖은 사람’이 한국에는 아주 적은 건가?
“핵폭탄에 저항하는 것이 반힌두교도적이고 반민족적이라면, 나는 힌두교와 민족을 떠나겠다. 나는 나 스스로가 독립적이고 능동적인 공화국임을 선언한다. 나는 지구의 시민이다. 나는 영토를 소유하지 않는다. 깃발도 없다.”
그녀는 용감한 아나키스트이다. 민족이나 국가, 종교를 초월해서 어떻게든 자신의 자율성을 지키고, 스스로 독립적이고 능동적으로 살겠다고 선언하는 이 당당한 태도라니! 재능이 많아 세계적 명성과 부를 얻은 작가, 그러나 해롭지 않은 작가로 보았을 때는 인도의 자랑거리라고 추켜 주던 지배 세력들과 허영심 많은 중산층들이 이제는 그녀를 괘씸하게 여기고 있다. 걱정이 된 친구들이 로이에게 조심하라고 충고하면서 적들에게 꼬투리 잡힐 약점이 없는지 확인하라고 한다. 로이는 두렵다고 고백하면서도 아주 꿋꿋하다. 꼬투리 잡힐 약점이 크게 없거나, 자신을 지지하고 사랑해주는 친구들과 동지들의 힘을 굳게 믿는 것 같다. 정말 다행이다.
미국의 패권주의에 ‘뜨겁게’ 맞서다
▲ 전쟁을 반대하고, 자유세계의 시녀로 전락한 ‘민주주의’와 쇼 비즈니스 제조물일 뿐인 ‘자유 언론’을 통렬히 비판하는 아룬다티 로이의 에세이집 <9월이여, 오라>(녹색평론)
강렬한 언어로 전쟁을 반대하고, 자유세계의 시녀로 전락한 ‘민주주의’와 팔기위한 쇼 비즈니스 제조물일 뿐인 ‘자유 언론’을 열정적으로 비판하는 에세이집 <9월이여, 오라>에서 몇 구절을 살펴보자.
“미국이란 제국 그리고 거대 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야만적인 약탈의 과정이 아닌가? 그것은 원거리에서 조종되고, 디지털로 작동되는 식민주의의 변종이 아닌가?” 2001년 9.11 이후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공습과 “미국의 자유를 수호하고 이라크를 해방시키겠다.”며 오만한 미국이 벌인 이라크 전쟁은 “세계의 민중에 대한 또 하나의 테러행위이다.”
“신자유주의 자본주의란 단지 소수를 위한 자본의 축적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또한 소수를 위한 권력의 축적을 의미한다. ‘자유로운’ 시장에서 ‘자유언론’은 정의, 인권, 식수, 깨끗한 공기 같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이제 그것은 그것을 살 여유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허용 된다.”
“민중이 전쟁의 승리자가 되는 일은 거의 없고 정부가 전쟁의 패배자가 되는 일도 거의 없다. 민중은 죽임을 당한다. (중략) 정부는 껍질을 벗고, 재편된다. 정부는 머리가 아홉 달린 죽지 않는 괴물이다. 그들은 국기를 이용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움츠러들게 하고, 생각하지 못하도록 마비시킨 다음, 국가를 위해 기꺼이 죽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의로 그 국기를 사용한다.” (그런데 이라크전쟁으로 죽은 미군의 관을 싸맸던 성조기는 중국산이었다던가?)
“미국 정부는 그동안 전 세계의 수많은 독재자와 폭도들에게 자금과 무기를 대주고 은신처를 제공해왔다. (중략)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이 전쟁을 벌이고 폭격을 했던 나라들의 목록을 보자. 중국(1945-46, 1950-53) 한국(1950-1953), 과테말라(1954, 1967-69), 인도네시아(1958), 쿠바(1959-60), 벨기에령 콩고(1964), 페루(1965), 라오스(1964-73), 베트남(1961-73), 캄보디아(1969-70), 그레나다(1983), 리비아(1986), 엘살바도르(1980년대), 니카라과(1980년대), 파나마(1989), 이라크(1991-99), 보스니아(1995), 수단(1998), 유고슬라비아(1999), 아프카니스탄(2001),”
여기에는 안 나와 있지만 이 목록에는 2차 이라크 침공(2003-2011)도 추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걸 읽으면서 솔직히 조금 놀랐다. 대충 내가 아는 것은 미국이 한국 전쟁에 개입했고, 베트남 전쟁을 벌였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고 이라크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 정도였다. 지금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 지를 나는 너무 모르고 있다.
이 시대 한국 청년들은 어떨까. 적어도 나보다는 나으려나? 아니면 멋들어진 풍경 사진과 시시껄렁한 이야기로 도배한 남미 여행기나 동남아 여행기를 보면서 언젠가 나도 돈 모아서 그리로 여행가야지 이러고 있을까? 미국이 벌인 전쟁으로 그 나라에 이름 없이 죽은 민간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무수한 전쟁 장애인들과 땅에 묻힌 수많은 지뢰를 한번이라도 떠올리기나 할까?
동남아 밀림의 무성한 숲은 고엽제가 뿌려졌고, 열화우라늄탄이 사방에 퍼져 중동의 땅과 강들은 극심하게 오염되었다. 계속된 폭격으로 납, 수은, 열화우라늄 같은 중금속 독극물들이 농사지을 땅과 물과 숲을 파괴했다. 기형아로 태어나는 아이들이 수십 배로 증가하고 있다는 자료들이 계속 보고되고 있다. 미군의 집중 공격으로 주택 5만 채 가운데 3만 6천여 채가 파괴되었다는 이라크 팔루자 일대에서는 히로시마 원폭 생존자들과 유사한 종류의 소아암 환자가 2004년 이후 12배나 증가했다고 한다.
뜨겁고 열렬한 로이의 글을 읽으면 그 진정성이 가슴을 후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때로 부끄럽게 만들기도 한다. 특히 기성체제가 제시해준 것 이외의 관점에서 세계를 볼 수 없는 “우리 지성의 무능력”과 “상상력의 결핍”을 나무랄 때는 나 역시 부끄럽고 뜨끔하다. 총과 석유와 무기 거래에 관한 숨겨진 사실들을 나는 조금이라도 알고 있는가?
“창고가 폭탄들로 가득 차 있지만 사람들의 배는 텅 비어 있을 때, 폭탄과 식량을 거래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라고, “핵기술이 시장에 나오고, 서로 팔려는 경쟁이 심해져서 가격이 떨어지면 정부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살 여유가 있는 이는 누구나 사설 무기고에 핵무기를 넣어둘 수 있지 않느냐”고 말할 때는 오싹해진다.
세계의 무기를 거의 다 제조하고 판매하면서, 대량살상무기인 화학무기, 생물학 무기, 핵무기를 보유한 부자나라들이 있다. 이들이 “테러에 맞서는 국제연대”를 조직해서 미국의 패권 전쟁을 돕고 있다. 새로운 제국주의 미국과 강대국은 전쟁을 일으켜서라도 석유 안보를 확보하려고 한다. 그리고 군사산업 복합체인 다국적 대기업들이 이권 경쟁을 벌이며 그 뒤를 보필하고 있다. 이 사실을 나는,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그들은 현대사에서 대부분의 민족학살, 정복, 인종청소, 인권침해에 책임이 있는 전쟁을 해왔고, 수많은 독재자와 폭군들을 지원하고, 무장시키고, 돈을 주어왔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다. 한국 전쟁 이후 남북 대치상황에 있는 한반도야말로 미국 패권 전쟁의 교두보이다. 냉전은 끝난 게 아니라 성형수술로 고친 얼굴로 돌아와 가짜 미소를 지으며 교활하고 은밀하게 활동하고 있을 뿐이다.
저항의 정치, ‘속도를 늦추고 책임질 것을 요구하라’
▲ 미국의 패권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고 있는 아룬다티 로이의 <보통 사람들을 위한 제국 가이드>(시울)
로이는 권력을 불신하는 아나키스트의 본능을 가졌다. 이 열정적인 아나키스트는 숨 막히게 죄어오는 기업화된 세계화의 속박에 대응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것에 저항하는 거라고, 그것을 차지하거나 소유하는 게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저항의 정치, 속도를 늦추고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정치이다.
“우리가 찾아내야 하고, 갈고 닦아 찬란히 빛나는 것으로 완성시킬 필요가 있는 것은 새로운 종류의 정치입니다. 그것은 지배의 정치가 아니라 저항의 정치입니다. 그것은 반대의 정치, 책임질 것을 요구하는 정치, 속도를 늦추는 정치, 세계 전역의 사람들과 손을 맞잡고 명백한 파괴를 막는 정치입니다. 현재의 상황에서 나는 세계화할 가치가 있는 유일한 것은 이의(異議)를 제기하는 행동이라고 말하겠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파괴하지 않은 것을 지키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북돋워서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것입니다. 잔혹하고 망가져 버린 우리들의 세상에도 아직 아름다움이 남아 있습니다. 아름다움은 숨어 있지만 굉장하고 거대하지요. 우리는 이것을 찾아내서 키우고 사랑해야 합니다.”
아, 숨어 있는 아름다움을 삶에서 어떻게 찾아야 할 것인가. 어쨌든 나는 개인적으로 전문성을 비판하는 로이의 글에도 뜨겁게 공감한다. “빈곤 문제나 민중의 절망적 상황에 관련해서 모종의 전문성을 발휘한 대가로 먹고사는 직업적 전문가”들이 한국에도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을 목격하기 때문이다. 학자, 의사, 연구자, 컨설턴트, 상담사, 사회사업가, 사회복지사, 세라피스트라는 이름으로 넘쳐나는 전문가 그룹들이 정부 돈과 기업의 돈을 따내느라 날마다 분주하다. 이런 전문가들에게서 우리의 미래를 다시 낚아채 와야 한다는 그녀의 주장에 크게 고개를 끄덕인다. 자율성이라는 아름다운 가치 때문이다.
또한 내 가슴에 가장 크게 와 닿았던 부분은, ‘저항과 이의를 제기하는 말과 행동’이 고통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기쁨이기도 하다는 그녀의 세계관이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저항하면서 기뻐하는 것만으로 힘없는 개인인 우리들이 거대한 적들을 능가할 수 있을까? 여전히 회의가 들긴 해도, 관습과 차별과 빈곤이 촘촘히 짜인 인도 시골구석에서 홀어머니와 그녀의 “마르고, 까맣고, 영리한” 딸이 재미나게 살았다는 것, 이게 나한테는 크나큰 격려가 된다.
“그 페미니즘적인 투쟁의 핵심은 터널의 끝에 가서 즐거움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매 맞고, 억압당하고, 신음하는 여성의 이미지로는 안 됩니다. 사물에 대해 생각하고, 세상에 참여하다 보면, 우리는 주위에 있는 끔찍한 고통을 인식하게 됩니다. 그럴 때 이 모든 것과 함께 있을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하는 일의 과정을 즐기고, 가장 슬픔이 깊은 곳에서도 기쁨을 말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햄버거를 먹고, 다이아몬드를 사고, 롤스로이스를 타야만 행복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그런 세상에서 살고 있다면, 우리는 이게 완전히 틀린 생각이라고, 최대한 행복한 모습으로 말하는 겁니다. 이것은 ‘생존 게임’입니다. 만약 스스로 불행해지도록 내버려둔다면, 우리는 모든 걸 잃게 됩니다.”
진심으로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한다. 잘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든 기쁨의 샘물을 발견하고 지켜내고 싶다. 그러면서 최대한 행복한 모습으로 이 잔혹한 세상에 대해서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
가을이 깊어가면서 집 마당과 밭가에 늠름하게 서 있는 감나무들에 감들이 주렁주렁 달렸다. 이웃들이 도와주어서 어제 감을 땄다. 홍시가 되어가는 것들은 추운 겨울 동안 하나씩 꺼내 먹고, 너무 무르고 상한 것은 항아리에 쟁여서 감식초를 담고, 단단한 놈들은 깎아서 처마에 매달아 곶감을 만들 생각을 하며 미소를 짓는다. 이 순간 내가 느끼는 달콤한 기쁨의 샘물은, 올 여름의 가뭄과 태풍을 이기고 풍성함을 선물해준 환한 주홍빛 감들인가 보다. (도은)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독립언론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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