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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말하다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엄마의 그 말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2. 8. 24. 10:15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꽃을 던지고 싶다> 14. 공주라 불리던 아이 
 
성폭력 피해생존자의 기록, “꽃을 던지고 싶다”가 연재되고 있습니다.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 죽어야 했던 아이. 질긴 생명력을 가진 아이. 어릴 적 나는 스스로에 대해 줄곧 태어나지 말았어야 한다고 믿으며 성장했다.
 
어른들은 나를 보며 항상 신기해하셨다. 내가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인간의 강한 생명력을 느끼시는 듯 놀랍다고들 말하셨다.
 
맏며느리로서 아들을 낳아야 했던 엄마는 언니 둘을 낳고 내 바로 위로 오빠를 낳았다. 아들을 낳아서 이제 자식을 그만 낳고 싶으셨지만, 아들 하나 더 낳으라는 할머니의 강요에 못 이겨 나를 임신하셨다. 아들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임신한 몸으로도 아버지로부터의 구타와 농사일을 감당해야 했던 엄마의 몸에 이상이 생긴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배가 점점 불러왔지만 이상하리만큼 먹고 싶은 것도 없고 얌전한, 순하디 순한 뱃속의 아이가 어느 순간 태동이 약해지고, 엄마의 몸이 부어서 신발조차 신지 못하는 상황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산부인과에 찾아가셨다고 한다.
 
임신중독이라는 진단과 함께, 의사는 아이가 거꾸로 놓여 있는데 그대로 두면 산모도 아이도 죽는다며 낙태를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너무 달수가 찼고, 위험한 수술이라 수술비만 집 한 채 값이었다. 엄마의 말대로라면 내가 태어나던 해에는 쌀 한 가마니가 2만원이었는데 병원비가 70만원이 필요했다고 한다.

엄마는 그 돈을 마련할 수가 없어서 죽기를 결심하고 나를 집에서 낳았다. 그렇게 70만원이 없어서 세상에 태어난 아이가 나였다.
 
해가 질 무렵 한참의 진통 끝에 엄마는 나를 낳았다. 돈이 없어서 세상의 빛을 보게 된 나는 2kg도 안 되는 미숙아였다. 머리가 아닌 다리부터 세상에 내놓은 아이는 태어나도 곧 죽을거라는 의사의 말에 이름조차 얻지 못했다.
 
또 딸을 낳아 미역국조차 얻어 먹지 못했던 엄마와 젖조차 빨 힘이 없는 아이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세상에서 만나게 되었다. 한 사람은 평생 아내구타를 감당해야 했던 여성으로, 또 한 사람은 그것을 지켜보며 성장하고 또 성폭력을 감당하는 삶을 살아내야 하는 여성으로.
 
시댁이 공주에 있었고 내가 딸이었기 때문에 나는 ‘공주’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나에게 다른 이름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초등학교 입학 전에 자신의 이름 정도는 쓸 수 있어야 한다는 언니의 말에 내 이름 석 자를 배울 때였다. 오빠는 아들이라는 이유로 온 집안의 어른들이 모여 항렬에 맞는 이름을 얻고, 태어나는 순간부터 장손이라는 대접을 받았다. 그와 대조적으로 나는 여자아이란 이유로 제대로 된 이름을 얻지 못했고, 집 안의 친척들에게도 이름조차 알 필요가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모진 삶을 살아야 할 운명이었는지, 질긴 생명은 곧 죽을 거라는 말에도 단 한 차례 병원에 가보지 못하였으나 죽지 않고 살았다. 울지도 못하고 젖조차 물지 못하던 아주 약한 생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장하면서 감기도 잘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아이가 죽지 않고 살아 있자, 출생신고를 해야 해서 엄마는 갑자기 이름을 지어서 호적에 올리셨다. 그런데 할머니는 엄마가 출생신고를 하신 줄 모르고 ‘공주’라는 이름으로 따로 출생신고를 하였다. 호적에 나는 쌍둥이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 후 공주는 사망 처리가 되었지만 지금까지도 친척 분들은 나를 공주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혼자 태어났지만 쌍둥이로 되었기에 두 배로 질긴 삶을 살 거라는 어른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자랐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어서도 엄마는 여전히 나의 탄생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리시곤 하였다. 꼭 죽을 것만 같았는데 라고 말을 하시면서....
 
중학교 다닐 적의 어느 날, 그 날도 괴로움에 술을 마시고 집에 들어가서 나를 왜 낳았냐며 엄마에게 대든 적이 있다. 엄마는 내가 아빠 때문에 그런 거라고 여기셨고 ‘네가 술이라도 안마시고 어찌 제 정신으로 살겠냐’ 하며,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을 하셨다.
 
처음이었다. 엄마가 나에게 그런 말을 하신 것이. 항상 내가 태어나서 참고 사신다고 하셨는데…. 맞고 사는 것이 나 때문이라고, 몸이 약한 내가 엄마 없이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참으신다고, 두고 떠나면 내가 죽을 것만 같았다고 하셨다.
 
그 말에 나는 화조차 내지 못하는 아이로 성장했는데…. 항상 스스로를 죄인처럼 여겼다는 걸 엄마는 알까? 힘든 엄마를 더욱 힘들게 한 나에 대해 저주스러운 마음. 어릴 적 나에게 ‘저게 아들이었으면 아빠 마음을 잡을 수 있었을 거다’ 라던 엄마와 할머니의 대화를 듣고 난 후 원죄처럼 저주했던 나의 존재. 가부장의 외도조차 내가 ‘여자아이’이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여야 했던 순간.
 
정말 할머니의 말씀대로 내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가부장의 외도도, 구타도 멈추었을까? 엄마는 조금 더 편한 삶을 사셨을까?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
 
엄마의 그 말에 내 안에 있는 분노가 조금은 잦아드는 것 같았다. 그 날 이후로 난 술과 담배를 끊었다.
 
나도 누군가에게는 소중한 딸이고, 가족이라는 사실. 누군가에게는 목숨 걸고 지켰던 생명이라는 사실을 나를 강간했던 사람들은 몰랐던 것일까?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웠던 아이를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로 믿게 만들었던 그 사건들이 나에게는 여전히 아프고 서럽다. 
 
너울 / 여성주의 저널 <일다> 바로가기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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