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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 저널 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열여덟번째 
 
일 년에 네다섯 번쯤 마을 울력을 한다. 마을로 들어오는 길가에 코스모스를 심는 '꽃길 가꾸기'를 제외하면, 대부분 청소가 주된 일이다. 봄에는 봄맞이 대청소를, 설과 추석이 끼여 있는 가을겨울엔 명절맞이 대청소를 하는 식.
 
며칠 전이 마침 청소하는 날이어서 아침상을 물리자마자 빗자루를 들고 회관 앞으로 나갔다. 작년 가을부터 올 초봄까지 집을 비운 적이 많은데다, 집에 있는 날엔 춥다고 방에 웅크리고 있느라 동네 분들을 거의 만나지 못해서 그런지, 오랜만에 동네 분들을 뵙는 자리에 나서는 것이 조금 쑥스러우면서도 설렜다.
 
늙었다고 봄을 모르겠는가
 
시골에서 땅만 파며 산다고 해서, 게다가 나이가 많다고 해서 봄을 외면할 수 있을까. 가난하다고 해서 사랑을 모를 리 없는 것처럼, 어디에 살든 나이가 몇이든 봄이 되면 누구라도 마음이 말랑해지고 허술해져서 바람이 숭숭 통하고 물기가 스며드는 건 아닐까.
 
특히 봄은 여자의 계절이라더니, 아닌 게 아니라 유독 할머니와 아주머니들의 헤어스타일이 확 달라진 것이 눈에 뜨였다. 전부 뽀글이 파마에 염색을 하고 나타나셨으니, 실은 달라진 게 아니라 같아졌다고 해야 정확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까맣게 윤기 흐르는 머리카락에 한결 가벼워진 옷차림이 그분들에게도 봄날이 왔음을 알려준다. 몇 주 후, 마을에서 차를 대절해 놀러갈 때쯤이면 아마도 더 고와져 있겠지. 허리와 발목에 고무줄을 댄 몸빼 바지와 우중충한 점퍼 따위 벗어던지고 울긋불긋 꽃단장도 하시리라.
 
봄가을에 한 차례씩 마을 어르신들이 한껏 차려 입고 놀러 가시는 모습을 볼 때면, 마음이 좋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이상하게 애잔해진다. 혹 그중에 유독 등이 굽고 다리는 휜데다, 손짓발짓이 어딘가 모르게 어둔해 뵈는 분이 계시면 더 그렇다.
 
저분들 모두 한때는 쇳덩이도 소화시킬 만큼 정정하셨을 텐데. 삶이 부가한 의무와 역할 따위 벗어던지고, 그저 예쁜 여자 멋진 남자와 연애나 걸면서 한 세상을 주유하고 싶은 시절도 분명 있었을 텐데. 자식들이 어려서는 큰소리로 훈계하고 가끔은 회초리를 들 만큼 위신도 섰을 텐데… 이런 생각들이 밀려들어서다. 쉽게 말하면 생로병사의 운명을 지고 가는 인간이란 종에 대해, 갑작스레 연민이 치솟는다고 할까.
 
하지만 정작 그분들은 소풍 가는 어린아이모양 눈은 반달로 웃고 있고 입도 티 나게 벙싯거린다. 그 모습은 뭐랄까. 내 육체는 한시도 쉬지 않고 계속해서 늙고 병들어 죽어가지만, 나는 그와 상관없이 지금 이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기쁨을 온전히 즐기겠다고 선언하는 것만 같다. 이런 초연한 태도에 비하면 연민이나 애잔함은 너무 싸구려 감상처럼 느껴져서, 나는 문득 부끄러워진다.
 
나를 보는, 나와 닮은 여자
 
봄을 닮아 화사해진 동네 아주머니들에게 자극을 받아서일까. 청소를 하고 돌아온 후부터 내게는 유독 흰머리만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화장실에서 양치질을 하다가, 혹은 거울 앞에 앉아 로션을 바르다가, 심지어는 방바닥을 닦다가도.
 
내 기억으로는 이미 삼십대 중반부터 흰머리가 나기 시작했으니 새삼 유난 떨 일도 아니다. 더군다나 사십대에 들어서면서는 보는 사람마다 한마디씩 할 정도로 무성해지지 않았던가. 그때는 젊은 애가 왜 이리 새치가 많으냐고 하면 ‘어, 정말 그러네?’ 하고 말거나, 가끔은 어디선가 주워들은 싱거운 농담 -머리 나쁜 사람이 머리를 쓰면 탈모 증세가 나타나지만 머리 좋은 사람이 머리를 쓰면 하얗게 센다- 을 그들에게 들려주며 낄낄대곤 했었는데.
 
하지만 흰머리가 많아도 너무 많아져서 예전처럼 마냥 무덤덤할 수만은 없겠다 싶은 마음이 들었다. 작년까지만 해도 머리 양 옆, 그러니까 정수리와 두 귀를 잇는 라인에만 나던 새치가 어느새 앞뒤로 확산되어 있으니 말이다. 게다가 쇠심줄만큼이나 억세고 질겨 보이는 그 모양새라니.
 
원래 숱이 많은 편이 아니어서 평소에 흰머리 한 올도 뽑지 않고 애지중지하던 나는, 하루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벽에 걸린 거울 앞에 바싹 다가섰다. 다 뽑을 수도 없거니와 그러자면 대머리가 될 것 같아서, 우선 가르마를 따라 새로 나기 시작한, 짧고 뻣뻣하여 검은 머리카락 사이를 뚫고 밖으로 삐져나오는 것들만 솎아내기로 했다.
 
처음 한 가닥은 쉽게 뽑혔다. 그러나 두 번째 목표가 된 머리카락은 숨을 참고 오로지 그 하나에만 집중을 해도 당최 뽑아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몇 분이나 씨름을 한 것일까. 하도 눈을 치켜떠서인지 눈물이 번질 만큼 동공이 아렸고, 내 손아귀엔 애꿎은 검은 머리카락 두어 가닥이 잡혀 있었다.
 
나는 잠시 숨을 돌릴 겸 뻑뻑해진 눈과 팔 근육을 풀어주었다. 그러고 나서 다시 거울 앞에 섰을 때. 나는 순간 흠칫하며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서고 말았다. 거기, 거울 속에 나 아닌 다른 여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속쌍꺼풀 깊은 눈과 도드라진 광대뼈와 완고해 보이는 입매. 무엇보다도 흰머리가 풍성하게 반짝이는, 나와 참 많이 닮은 여자가.
 
예나 지금이나 나는 나쁜 딸 

▲ 거울을 보며 흰머리를 헤아릴 때마다 엄마를 떠올린다. 염색약을 끼고 살았음에도 내겐 흰머리로만 기억되는 한 여자를.   © 자야 
 
그러고 보니 몇 달 전인가, 서울에 갈 때 가끔 들르는 고모네 집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네가 외탁을 해서 흰머리가 많구나. 너희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두 분 모두 얼마나 머리가 하얬게. 니 엄마도 젊을 때부터 그랬잖니."
 
외조부모야 나 태어나기도 전에 돌아가셨으니 모르겠고, 엄마는 확실히 그랬다. 일찍 머리가 센 덕분(?)에, 나 어릴 때는 엄마의 흰 머리카락을 뽑아주고 하나에 십 원씩 용돈을 받기도 하지 않았던가.
 
흰머리가 점점 많아져 뽑는 것만으로는 감당이 안 되던 시절부터 엄마는 줄곧 염색을 했는데, 웬일인지 나는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가 염색을 할라치면 '얼굴엔 주름이 자글자글한데 머리만 까마면 더 이상해 보인다'는 따위의 험한 소리를 섞어가며 괜한 참견을 했었다. 심지어는 엄마가 아빠와 산에 갔을 때 어떤 사람이 아빠를 엄마의 아들로 오해하는, 엄마로서는 결코 웃지 못 할 사건이 있었음을 안 이후에는, 잊을 만하면 그 일을 종종 입에 올려 엄마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때 나는 왜 그런 철없는 행동을 했던 것일까. 나이보다 이르게 머리가 파뿌리로 변해 버린 엄마에게도, 여전히 젊어 보이고 싶고 예뻐 보이고 싶은 마음이 있음을 몰랐던 걸까 아니면 모른 척했던 걸까. 당시 엄마는 내게서 놀림을 받을 때마다 나쁜 년, 하고 말았지만, 어쩌면 엄마는 내가 지금 짐작하는 것 이상으로 그로 인해 스트레스를 받았던 건 아닐까.
 
거울 속에서 자신을 닮은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그녀를, 나 또한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녀가 이렇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것 봐라. 너도 머리가 하얘지니 별 수 없지. 나 염색하는 건 죽어라 반대하더니, 네 머리가 세니까 염색하고 싶냐?
 
그 순간 가슴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솟구쳐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불쑥 나타나서 이렇게 날 놀리다니, 엄마가 밉고 그리워서 견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재빨리 눈을 훔치고 다시 거울을 봤을 때, 이미 그녀는 사라진 뒤였다. 원한다면 이제는 내 손으로 염색을 해줄 수도 있는데, 우리 동네 아주머니들처럼 까만 머리 나풀거리며 봄바람 속을 훠이훠이 걷게 할 수도 있는데.
 
그날이 하필이면 엄마의 기일이었던 것은 우연이었을까. 어쨌거나 그날 이후 나는 더 이상 흰머리에 신경 쓰지 않게 되었다. 거울을 볼 때마다 그녀를 닮은 내 모습이 거기 있다는 게, 어쩐지 썩 괜찮게 느껴져서이다. 혹시 머리를 까맣게 염색하면, 그때는 까만 머리의 엄마를 닮아 있지 않겠냐고? 하지만 내게는 까만 머리의 엄마가 통 기억나지 않으니 그게 문제다. 엄마 말마따나, 예나 지금이나 나는 정말 나쁜 딸년인가 보다.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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