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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강희가 초대하는 무대 (3)  연극 <풍찬노숙>
 
어릴 적 즐겨보던 드라마가 있었다. 바로 ‘조선왕조 500년’ 시리즈였다. 우리는 교과서에서도 드라마에서도 왕들의 역사를 우리의 역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허준’, ‘대장금’, 그리고 최근 ‘추노’를 거치면서 우리의 역사관은 변신을 거듭했다. 왕과 귀족이 아닌 평민, 궁녀, 노비와 같이 역사의 중심에서 밀려난 이들의 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공적인 목소리가 전해주지 않는 이야기이지만 이들의 질긴 삶도 오늘의 우리를 있게 한 깊은 뿌리이다.
 
1월 18일부터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는 <풍찬노숙>(연출 김재엽, 작가 김지훈)도 역사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이 극의 혼혈족은 보다 나은 현재와 미래를 위해 과거를 재구성하려한다. 이들이 선택하는 역사는 어느 길을 향할 것인가? 왕의 길일까? 아니면 주목 받지 못한 이들의 길일까?
 
초록이 사라진 회색 언덕에 남은 사람들
 

▲ 곳곳에 사다리를 두어 공연장의 구석구석을 활용한 풍찬노숙의 무대     © 남산예술센터 
 
공연시간이 총 3시간 50분에 이르는 <풍찬노숙>의 무대는 적막한 회색빛이 감돈다. 원래 객석을 무대로 사용하여 경사진 언덕을 만들었다. 무대 곳곳에 사다리를 두어 위쪽 공간도 극의 배경으로 사용할 수 있게 했다. 공연장의 구석구석이 모두 무대로 쓰인다. 전체적인 그림을 생각해 보면 큰 미끄럼틀 두 개와 정글짐, 구름사다리 등이 있는 놀이터 같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이 어두운 회색빛의 놀이터에서는 어른 들이 논다는 것, 그리고 그들의 놀이가 썩 즐거워 보이지 않는 다는 점이다. 어른 다섯이서 팔을 뻗어야 나무 한 그루를 품어 볼 수 있었고, 좋은 흙이 있어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던 시절에는 이 놀이터도 초록빛이었을 것이다. 어쩌면 그때는 이들의 놀이가 즐거웠을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 큰 불이 났던 날 이후로 이 언덕은 버려진 언덕이나 마찬가지이지만 혼혈족은 이곳을 차마 떠나지 못한다. 많은 이들의 염원과 한은 이곳을 신비한 힘이 깃든 곳으로 만들었다.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곳, 산자와 죽은 자가 함께 하는 곳이 되었다. 큰 북 만이 무대 한편에 놓여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이들에게 공포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배자의 질서로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있을까
 
북은 순혈족이 만들어 놓은 질서를 상징한다. 혼혈족의 어느 누구도 이 북을 건드리지 못한다. 문계(이원재)가 들려주는 혼혈족의 탄생설화는 의미심장하다. 북에 대한 그들의 두려움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처럼 아기 때부터 몸속에 흐르고 있다.
 
설화 속의 아기들은 북의 주인인 악마의 낚싯줄에 걸려 언덕 꼭대기를 향해 네 발로 기어오른다. 언덕을 무릎으로 힘겹게 기어오르던 아기들은 요령이 생겨 걷기 시작한다. 그러다 요령을 피운 것에 대한 벌로 머리통이 깨진다. 한 살배기의 머리통에서만 날 수 있는 ‘딱’하는 맑은 소리와 피비린내 대신 퍼지는 ‘벌꿀 향’이 무대 위에 놓여있는 아기 석상들을 더욱 그로테스크하게 보이게 한다.
 
백지처럼 순결한 어린 아이일 때부터 이들의 기억 속에 심어지는 것은 공포와 고통이다. 순혈족의 질서에 억눌려온 이들은 북 앞에서 겁을 먹고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끝까지 무릎으로 정상에 올랐던 한 아기만이 죄의식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그 아기가 바로 혼혈족 중 가장 뛰어난 자인 응보(윤정섭)이다. 그만이 두려움을 넘어 북을 칠 수 있다.
 
문계는 이런 응보가 그들의 왕이 되어 줄 것을 요구한다. 혼혈족만의 국가를 선포하고 국가로서 정당성을 가질 수 있는 역사 만들기를 제안한다. 혼혈족의 탄생설화 대신 그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줄 수 있는 건국신화를 만들어 내고자하는 것이다. 문계는 응보에게 “근대가 오려면 왕이 죽어야 한다”며 자신들에게 근대를 선물할 왕 노릇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그는 응보가 태어난 후 똑똑하다는 명성을 양보해야 했던 원수덕제(장성익)를 선왕으로 삼는 등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역사를 재구성한다. 또한 순혈족과 싸울 수 있는 모든 젊은이들을 동원하고, 역사를 세우는데 피바람이 분다.
 
그는 왕을 죽여 근대를 앞당기고 그 모든 죄를 자기가 짊어지고 죽음을 맞겠다고 선언한다. 이 놀이에서 그가 맡은 역할은 사관이다. 역사를 기록하는 자이다. 그러나 ‘왕, 정통성, 기록’과 같은 어휘들은 순혈족의 언어이다. 그들 질서의 근간이 되는 말들이다. 폭력으로 세워진 국가는 그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른 이의 희생이 필요하다. 문계가 만들어가려는 역사도 순혈족의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다. 직선적인 역사관이 보여주는 한계이다.
 
여성들을 통해 제시하는 또 다른 역사관

▲ 1월 18일부터 2월 12일까지 남산예술센터에서 공연되는 <풍찬노숙>   ©남산예술센터  

 
김지훈 작가는 힘의 방향이 한 개의 소실점으로 모이면서 모든 것이 빨려 들어가는 역사관 대신 새로운 역사관을 제시하고 있다. 그가 주목하는 것은 ‘어머니’이다. 공연은 처음부터 끝까지 혼혈족의 아이들을 길러내는 어머니의 모습을 반복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먼저 요년(황석정), 조년(김효숙)이 들려주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요년은 사지가 제대로 붙어있지 않은 자식들조차도 알아볼 수 있었다. 저년은 불낸 놈을 잡기 전까지는 아픈 기억으로 가득한 언덕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또한 심서(이혜원)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귀신이 되어서도 아들 곁을 떠나지 못했다. 아들이 늙어 자기와 함께 갈 때까지 기다렸다. 그녀는 무조건 아들의 편을 들지도 않는다. 아들에게 “응보를 죽이지 마라”, 언덕의 사람들에게 “내 아들이 죽었다. 이제 모두 발 뻗고 자라” 등의 이야기를 한다.
 
응보의 어머니 정갑(고수희) 역시 강한 어머니이다. 그녀의 존재는 문계와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문계의 역사가 희생을 강요하는 폭력의 역사라면 정갑의 역사는 모든 것을 포용하는 생명의 역사이다. 풍찬노숙의 세상에서 혼혈족을 지탱 시켜준 것은 어머니들이다. 모든 어머니들이 바로 역사이다. 응보가 새참이 형제(윤병훈, 윤종식, 이정수)에게 말하는 “어머니에게 잘 해라”라는 한 마디에 작가의 생각이 응축되어 있다.
 
이 공연에는 앞서 설명한 어머니인 여인들이 있고, 또 어머니가 되려는 여인들도 있다. 그 중 한 사람은 순대빛깔 얼굴들과 다른 결을 지닌 인물이다. 주워 먹는 그애(김소진)다. 그녀는 말도 할 줄 모르고, 도구도 쓸 줄 모르는 동물과 같은 상태이다. 하지만 순혈족, 혼혈족 어느 집단의 질서에도 물들지 않은 그녀(지난여름 낭독 공연 당시에는 흰 피부를 가진 여인으로 설정되어 있었다)는 순수 그 자체이다.
 
그녀는 북소리가 주는 공포가 무엇인지도 모른다. 그녀의 따듯함은 회색빛 언덕에 밝은 기운이 돌게 한다. 이런 그녀는 응보처럼 북을 칠 수 있다. 문계가 말하는 방식으로 세상을 바꾸지 않고 그녀의 방식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인물이다. 문계가 만들려는 질서의 세계에서는 위협적인 존재이다. 그래서 그녀는 응보의 아기를 밴 채로 죽임을 당한다.
 
아기의 죽음은 다음 세상에 대한 희망을 품을 수 없게 만들었다. 응보마저 떠난 후 더 이상 희망이 없을 것 같았던 이 언덕에 응보의 큰 부인 개심(김지성)이 부른 배를 안고 방금 빨래한 흰 천을 들고 등장한다. 그녀도 어머니가 되었다. 그녀에 의해서 혼혈족의 역사는 계속 될 것이다. 흰 천이 상징하듯 새로운 백지 위에 새로운 역사를 써나가기 시작할 것이다.
 
아쉬움 남지만 주목할 가치 있는 공연
 

<풍찬노숙>은 지난여름에 작품이 완성되기 전에 낭독 공연된바 있다. 당시 작가는 이 작품을 써야겠다고 떠올렸던 이유를 동남아시아 계열의 한 어머니가 혼혈인 자신의 아이와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서라고 답변했다. 낭독 공연 당시 이 점과 공연의 연관성을 전혀 감지할 수 없었는데, 이번 공연에서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짐작’이다. 작품이 의도하는 바를 좀 더 강한 색채로 표현했어야 하지 않았나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응보 상장 다린 물”이라든가 “홍길동의 혁명성을 대중성으로 격하시키는 진실”에 대한 설명은 김지훈답다. 하지만 이런 기지 넘치는 표현들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힘이 아니라 단편적인 웃음의 요소로 전락할 위험도 있다. 연출가가 긴장해야 한다. 그리고 전반부에 좀 더 힘을 뺄 필요가 있다. 너무 긴 도입부는 호기심과 긴장감보다는 지루한 연극일지도 모른다는 선입견을 갖게 만든다.
 
호흡이 긴 이 연극을 관극하는 데에 다른 걸림돌들도 있다. 무대와 객석을 전복시킨 아이디어는 좋았다. 하지만 이왕 시작한 것 객석을 좀 더 포기했어야 했다. 무대 좌우에 놓인 객석은 공연의 집중도를 떨어트렸다. B석의 정면에서 바라본 무대는 멋졌지만 무대의 옆면 C석에서 고개를 돌려 바라본 무대는 솔직히 지저분해 보여 관극이 유쾌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부한 음악사용은 오히려 극의 몰입도를 떨어뜨렸다. 점진적인 변화 없이 갑자기 끊기는 음향들은 극의 맥도 함께 뚝 끊어버렸다.
 
이 공연의 미덕은 생생한 캐릭터들에 있다. 작가가 만들어낸 독창적인 캐릭터들이 배우들의 좋은 연기와 만나 무대 위에서 더욱 생생하게 살아났다. 시의 적절한 주제의식과 독창적인 표현으로 여러 사람들의 주의를 끌만한 가치가 있는 공연이다.  (전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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