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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여성 숨은그림찾기 (17) <노트르담 드 파리>와 <미녀는 괴로워>
※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 연재는 다섯 명의 장애여성들이 다양한 ‘매체 읽기’를 통해 비장애인, 남성 중심의 주류 시각으로는 놓칠 수 있는 시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러시아 시골에서 과일을 팔던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러시아 출신 유명 모델)가 파리로 갈 수 있었던 건 물론 그 빼어난 미모 덕이다. 이 세상 대부분은 남성이 기득권을 튼튼히 지키는 사회이거나 외모지상주의 사회이니, 미모는 이제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여성이 특권층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하지만 미모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15세기의 집시 아가씨 에스메랄다는 미모를 가졌음에도 ‘신데렐라’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의 대척점에 서 있다.
에스메랄다를 파멸시킨 ‘미모’와 ‘매력’
▲ 원작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원작 소설을 센스 있게 재창조했다. 그 시대를 불태웠던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기저에는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우월감, 혹은 허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노트르담 부주교인 클로드 프롤로의 외국인(집시)에 대한 적대감과 배척을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극우파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는 현대의 프랑스를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비판하는 연출은 왜 <노트르담 드 파리>가 뮤지컬 위의 뮤지컬인지 보여준다. (지금도 계속해서 프랑스에선 극우파가 이민자들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광고가 방송되고, 외국 국적의 시민들에게 영주권이 발급되는 자격과 절차가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에스메랄다는 귀딜 수녀가 도둑맞은 딸이 아닌, 집시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 집시가 되었고, 원작에서 “동네 바보 형” 정도의 캐릭터인 그랭구아르는 온건한 진보 논객의 지위를 얻었다. 집시의 우두머리인 클로팽은 반란군의 핵심인물로 정의롭고 의리 있는 사나이로 그려진 반면, 노트르담의 부주교 프롤로는 절대 악인으로 추락했다. 프롤로는 다른 모든 면에서 성실하게 살며 명망을 쌓아왔지만 성적인 욕망이 비뚤어졌을 뿐이고, 그런 인물은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 주위에 흔하기에, 개인적으로는 조금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다시 에스메랄다 이야기로 포커스를 좁히자면, 그녀는 근위대장과 신부님뿐 아니라 여태껏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아본 적 없고,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도 없는 척추장애인 종지기(카지모도)까지 홀딱 반하게 만든 절대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호적이 없는 이방인이다. 그녀의 시대엔 그것이 절대미모로조차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모양이다. 귀족 도련님(페뷔스)도 높으신 성직자 어르신도 그녀를 하룻밤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이었고, 그 결과 그녀의 미모와 매력은 결국 그녀를 파멸시켰다.
장애인과 이방인, 소외된 이들의 교감
그녀가 페뷔스의 약혼녀인 플뢰르 드 리스처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처녀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페뷔스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청혼을 해야 했을 것이고, 프롤로도 신부 직위를 내던지고 일반인으로서 그녀에게 청혼해야 했을 테니까. 그 두 사람은 에스메랄다가 성매매를 한 적이 없음에도 “집시”라는 신분 때문에 그녀를 쉽게 보고 일회성 쾌락의 대상으로 여겼다.
물론 카지모도만큼은 신분 때문에 그녀를 다르게 보거나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미녀와 야수” 사이의 아찔한 아름다움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그 둘 사이에 (표면적으로나마) 우정이 가능했던 건 어떤 동질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카지모도는 파리에서 나고 자란 백인이지만 신체장애를 가진 추남이기에 따돌림 당하고, 놀림 받고, 평생을 종탑에 갇혀 다른 사람을 피해 사는 처지이다. 종교시설에 수용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된 장애인인 셈이다. 에스메랄다는 오늘날로 따지면 난민 혹은 불법체류자이다. 성당 안은 성역이기에 그녀가 체포되지 않고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 살지만 동등한 시민으로서 대접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당에서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동정한다.
위치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결혼이민자들은 독립된 개인이라기보다 한국인 남성의 ‘아내’이자 2세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로서만 시민의 자격을 인정받는 것 같다. 허가된 체류기한을 만료한 채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처우는 훨씬 더 열악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성폭행을 당한들 가해자를 고발할 수 있을까? 명동성당에 보호를 신청하면 받아들여질까? 반면, 장애인은 한국 국적을 가진 원주민이지만 교육권, 선거권, 피선거권 등의 권리를 사실상 비장애인 시민과 똑같이 인정받지 못한다. 슬프게도 지금 한국의 상황은 뮤지컬 속 1482년 파리의 노트르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뚱뚱한 여자라 죄송합니다?
▲ 뚱뚱하고 못생겨서 가수가 될 수 없었던 여성이 등장하는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
이번에는 반대로, 미모를 절실하게 갈구하는 여성 캐릭터 이야기다. 영화를 원작으로 했지만 영화보다 더 집요하게 문제의식을 유지하는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의 강한별은 비만여성이다. 그녀가 쇼 비즈니스에서 스타가 되고 싶었기에 전신성형을 택한 것이 자연스럽게까지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비만 여성은 쇼 비즈니스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별을 넘어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게 여러 장면에서 나타난다.
예쁜 여자는 신체를 노출 하고 몸매가 “안 되는” 여자는 가려주는 게 동방예의지국이고, 예쁜 여자는 예쁜 여자답게 굴어야지 너무 착하고 겸손하면 주위를 불편하게 한다는 내용의 넘버(뮤지컬에 삽입되는 노래)가 있다. 살이 많이 찐 상태에선 길 가는 사람조차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더니, 수술로 살을 뺀 후에는 모든 행인들이 추파를 던지는 장면도 있다. 물론 뮤지컬답게 과장되어 있지만 비슷한 장면은 실제에서도 볼 수 있다.
필자만 해도 지난여름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다리에 살집 많거나 허벅지 살이 튼 여성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미니스커트 착용을 자제해 달라’는 멘션을 똑똑히 봤다. 이는 그나마 해당 멘션의 내용을 완곡하게 옮긴 것이다.
내 몸을 날씬하게 관리하건 살이 붙게 놔두건 그건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몸에 군살이 붙게 방치한 사람은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한 죄인이고, 그런 몸매로 유행을 따라 옷을 입는 것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비만여성들이 장애여성, 특히 지체장애여성에게 공감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일반인’의 기준에서 이들의 몸은 어떤 경우에도 예쁘지 않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예쁘다”는 인사말을 종종 듣지만, 나도 알고 있다. 사실은 그 앞에 “장애인 치고”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장애여성은 장애남성에 비해, 비만여성은 비만남성에 비해 더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남자는 20대 후반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듯 말하지만 20대 후반의 여성은 배가 나오면 안 된다. “뚱뚱한 여자들은 이렇다”던가, “장애자들은 저렇다”는 선입견(물론 대부분 진실과 다르다)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는 공통점도 있고, 연애시장/결혼시장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또한 이들은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게 잘하는 뭔가가 있지 않은 이상 취업시장에서도 페널티를 안고 출발한다, 단지 평균체중보다 더 나간다거나,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만으로. 비만인 배우는 성공해봤자 주인공의 친구나 엄마 배역밖에 못 받지 않는가. 심지어 비만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에도 날씬한 여배우가 배역을 맡아 비만여성 분장을 하는 판국이다. 사회에선 비만이 장애로서 인식된다는 걸 인정한다 쳐도, 비만으로 장애인 등록이 되어 감세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 하는 장애인 셈이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다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를 보면서 새삼 느낀 것이 있다. 이 사회가 진정으로 무릎 꿇는 미모 권력은 오직 무(無)성형 자연미인 뿐인 것이다. (주의: 귀족도 진골/성골을 나눴던 신라시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강한별은 노래를 잘 하지만 비만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죄송해야 했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던 이주일 씨처럼. 그래서 결국 전신성형을 하고 예뻐졌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런 인공적인 미모로 얻은 권력은 “뒤가 구린” 취급을 받는다. 그녀는 뚱뚱하다고 괄시 받는 것이 싫어 전신성형을 했다고 대중에게 고백한 이후에야 ‘떳떳한’ 가수로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등장인물 중 의사가 되기 위해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공부만 했고 성형외과 의사가 된 후에는 쉰이 다 되어가는 재벌 2세 여성에게 팔려가듯 장가가는 이공학은, 외롭거나 긴장될 때 폰섹스로 스트레스를 푸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부주교 프롤로의 왜곡된 성욕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다만 프롤로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알아버린 에스메랄다를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처형해버렸지만, 이공학은 폰섹스 파트너였던 강한별의 폭로 협박에 못 이겨 스스로 의료 봉사를 했다는 점이다. 15세기엔 에스메랄다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지금이라면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세상이 전혀 안 변한 건 아닌가 보다. (쫄쫄2)
* 여성저널리스트들의 유쾌한 실험! 인터넷 저널 <일다> 바로가기
※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 연재는 다섯 명의 장애여성들이 다양한 ‘매체 읽기’를 통해 비장애인, 남성 중심의 주류 시각으로는 놓칠 수 있는 시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미디어 <일다> www.ildaro.com
러시아 시골에서 과일을 팔던 나탈리아 보디아노바(러시아 출신 유명 모델)가 파리로 갈 수 있었던 건 물론 그 빼어난 미모 덕이다. 이 세상 대부분은 남성이 기득권을 튼튼히 지키는 사회이거나 외모지상주의 사회이니, 미모는 이제껏 그래왔듯 앞으로도 여성이 특권층으로 접근할 수 있는 강력한 무기일 것이다. 하지만 미모가 모든 것을 극복할 수 있을까. 15세기의 집시 아가씨 에스메랄다는 미모를 가졌음에도 ‘신데렐라’ 나탈리아 보디아노바의 대척점에 서 있다.
에스메랄다를 파멸시킨 ‘미모’와 ‘매력’
▲ 원작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는 원작 소설을 센스 있게 재창조했다. 그 시대를 불태웠던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의 기저에는 ‘다름’을 허용하지 않는 우월감, 혹은 허용할 수 없는 두려움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노트르담 부주교인 클로드 프롤로의 외국인(집시)에 대한 적대감과 배척을 무대화하는 과정에서, 극우파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가는 현대의 프랑스를 자연스럽고 세련되게 비판하는 연출은 왜 <노트르담 드 파리>가 뮤지컬 위의 뮤지컬인지 보여준다. (지금도 계속해서 프랑스에선 극우파가 이민자들을 노골적으로 공격하는 광고가 방송되고, 외국 국적의 시민들에게 영주권이 발급되는 자격과 절차가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뮤지컬 <노트르담 드 파리>에서 에스메랄다는 귀딜 수녀가 도둑맞은 딸이 아닌, 집시 혈통을 이어받은 정통(!) 집시가 되었고, 원작에서 “동네 바보 형” 정도의 캐릭터인 그랭구아르는 온건한 진보 논객의 지위를 얻었다. 집시의 우두머리인 클로팽은 반란군의 핵심인물로 정의롭고 의리 있는 사나이로 그려진 반면, 노트르담의 부주교 프롤로는 절대 악인으로 추락했다. 프롤로는 다른 모든 면에서 성실하게 살며 명망을 쌓아왔지만 성적인 욕망이 비뚤어졌을 뿐이고, 그런 인물은 그 때나 지금이나 우리 주위에 흔하기에, 개인적으로는 조금 가혹한 처사가 아닌가 싶다.
다시 에스메랄다 이야기로 포커스를 좁히자면, 그녀는 근위대장과 신부님뿐 아니라 여태껏 아무에게서도 사랑을 받아본 적 없고, 누군가를 사랑해본 적도 없는 척추장애인 종지기(카지모도)까지 홀딱 반하게 만든 절대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호적이 없는 이방인이다. 그녀의 시대엔 그것이 절대미모로조차 극복할 수 없을 만큼 치명적인 약점이었던 모양이다. 귀족 도련님(페뷔스)도 높으신 성직자 어르신도 그녀를 하룻밤 욕망의 대상으로만 여길 뿐이었고, 그 결과 그녀의 미모와 매력은 결국 그녀를 파멸시켰다.
장애인과 이방인, 소외된 이들의 교감
그녀가 페뷔스의 약혼녀인 플뢰르 드 리스처럼 좋은 집안에서 태어난 처녀였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페뷔스는 정당한 절차를 거쳐 청혼을 해야 했을 것이고, 프롤로도 신부 직위를 내던지고 일반인으로서 그녀에게 청혼해야 했을 테니까. 그 두 사람은 에스메랄다가 성매매를 한 적이 없음에도 “집시”라는 신분 때문에 그녀를 쉽게 보고 일회성 쾌락의 대상으로 여겼다.
물론 카지모도만큼은 신분 때문에 그녀를 다르게 보거나 다르게 대하지 않았다. “미녀와 야수” 사이의 아찔한 아름다움의 차이에 대한 이야기는 접어두고, 그 둘 사이에 (표면적으로나마) 우정이 가능했던 건 어떤 동질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카지모도는 파리에서 나고 자란 백인이지만 신체장애를 가진 추남이기에 따돌림 당하고, 놀림 받고, 평생을 종탑에 갇혀 다른 사람을 피해 사는 처지이다. 종교시설에 수용되어 사회로부터 격리된 장애인인 셈이다. 에스메랄다는 오늘날로 따지면 난민 혹은 불법체류자이다. 성당 안은 성역이기에 그녀가 체포되지 않고 몸을 피할 수 있었다. 같은 시대, 같은 도시에 살지만 동등한 시민으로서 대접 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성당에서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고 동정한다.
위치는 조금 다르지만 우리나라의 결혼이민자들은 독립된 개인이라기보다 한국인 남성의 ‘아내’이자 2세를 낳고 기르는 ‘어머니’로서만 시민의 자격을 인정받는 것 같다. 허가된 체류기한을 만료한 채 한국에서 계속 일을 하고 있는 노동자들의 처우는 훨씬 더 열악하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성폭행을 당한들 가해자를 고발할 수 있을까? 명동성당에 보호를 신청하면 받아들여질까? 반면, 장애인은 한국 국적을 가진 원주민이지만 교육권, 선거권, 피선거권 등의 권리를 사실상 비장애인 시민과 똑같이 인정받지 못한다. 슬프게도 지금 한국의 상황은 뮤지컬 속 1482년 파리의 노트르담과 크게 다르지 않다.
뚱뚱한 여자라 죄송합니다?
▲ 뚱뚱하고 못생겨서 가수가 될 수 없었던 여성이 등장하는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
이번에는 반대로, 미모를 절실하게 갈구하는 여성 캐릭터 이야기다. 영화를 원작으로 했지만 영화보다 더 집요하게 문제의식을 유지하는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의 강한별은 비만여성이다. 그녀가 쇼 비즈니스에서 스타가 되고 싶었기에 전신성형을 택한 것이 자연스럽게까지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비만 여성은 쇼 비즈니스에서뿐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차별을 넘어 비난을 받고 있다는 게 여러 장면에서 나타난다.
예쁜 여자는 신체를 노출 하고 몸매가 “안 되는” 여자는 가려주는 게 동방예의지국이고, 예쁜 여자는 예쁜 여자답게 굴어야지 너무 착하고 겸손하면 주위를 불편하게 한다는 내용의 넘버(뮤지컬에 삽입되는 노래)가 있다. 살이 많이 찐 상태에선 길 가는 사람조차 경멸의 눈으로 쳐다보더니, 수술로 살을 뺀 후에는 모든 행인들이 추파를 던지는 장면도 있다. 물론 뮤지컬답게 과장되어 있지만 비슷한 장면은 실제에서도 볼 수 있다.
필자만 해도 지난여름 트위터 타임라인에서 ‘다리에 살집 많거나 허벅지 살이 튼 여성은 다른 사람들을 생각해서 미니스커트 착용을 자제해 달라’는 멘션을 똑똑히 봤다. 이는 그나마 해당 멘션의 내용을 완곡하게 옮긴 것이다.
내 몸을 날씬하게 관리하건 살이 붙게 놔두건 그건 나의 선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몸에 군살이 붙게 방치한 사람은 자기관리를 제대로 못한 죄인이고, 그런 몸매로 유행을 따라 옷을 입는 것은 다른 사람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도 있다.
비만여성들이 장애여성, 특히 지체장애여성에게 공감하는 경우를 자주 본다. ‘일반인’의 기준에서 이들의 몸은 어떤 경우에도 예쁘지 않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서 “예쁘다”는 인사말을 종종 듣지만, 나도 알고 있다. 사실은 그 앞에 “장애인 치고”라는 말이 생략되어 있다는 것을.
장애여성은 장애남성에 비해, 비만여성은 비만남성에 비해 더 불리한 위치에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남자는 20대 후반이 되면 어쩔 수 없이 배가 나오기 시작한다는 듯 말하지만 20대 후반의 여성은 배가 나오면 안 된다. “뚱뚱한 여자들은 이렇다”던가, “장애자들은 저렇다”는 선입견(물론 대부분 진실과 다르다)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다는 공통점도 있고, 연애시장/결혼시장에서 소외되어 있다는 점도 비슷하다.
또한 이들은 남들보다 훨씬 뛰어나게 잘하는 뭔가가 있지 않은 이상 취업시장에서도 페널티를 안고 출발한다, 단지 평균체중보다 더 나간다거나, 휠체어를 탄다는 이유만으로. 비만인 배우는 성공해봤자 주인공의 친구나 엄마 배역밖에 못 받지 않는가. 심지어 비만여성이 주인공인 영화에도 날씬한 여배우가 배역을 맡아 비만여성 분장을 하는 판국이다. 사회에선 비만이 장애로서 인식된다는 걸 인정한다 쳐도, 비만으로 장애인 등록이 되어 감세 혜택을 받는 것도 아니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겉으로는 모르는 척 하는 장애인 셈이다.
어쨌든 시간은 흘렀다
뮤지컬 <미녀는 괴로워>를 보면서 새삼 느낀 것이 있다. 이 사회가 진정으로 무릎 꿇는 미모 권력은 오직 무(無)성형 자연미인 뿐인 것이다. (주의: 귀족도 진골/성골을 나눴던 신라시대 이야기가 아닙니다)
강한별은 노래를 잘 하지만 비만이기 때문에 남들에게 죄송해야 했다. “못 생겨서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던 이주일 씨처럼. 그래서 결국 전신성형을 하고 예뻐졌지만 그게 다가 아니었다. 그런 인공적인 미모로 얻은 권력은 “뒤가 구린” 취급을 받는다. 그녀는 뚱뚱하다고 괄시 받는 것이 싫어 전신성형을 했다고 대중에게 고백한 이후에야 ‘떳떳한’ 가수로서 일을 계속할 수 있었다.
재미있게도, 등장인물 중 의사가 되기 위해 연애 한 번 못 해보고 공부만 했고 성형외과 의사가 된 후에는 쉰이 다 되어가는 재벌 2세 여성에게 팔려가듯 장가가는 이공학은, 외롭거나 긴장될 때 폰섹스로 스트레스를 푸는 취미를 가지고 있다. 이는 <노트르담 드 파리>의 부주교 프롤로의 왜곡된 성욕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다만 프롤로는 자신의 성적 욕망을 알아버린 에스메랄다를 사회적 위치를 이용해 처형해버렸지만, 이공학은 폰섹스 파트너였던 강한별의 폭로 협박에 못 이겨 스스로 의료 봉사를 했다는 점이다. 15세기엔 에스메랄다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겠지만, 지금이라면 그녀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이들이 있었을 텐데……. 그러고 보면 세상이 전혀 안 변한 건 아닌가 보다. (쫄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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