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문화감성 충전

매너있는 그들이 불러낸 '대학살의 신'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2. 1. 14. 07:30

전강희가 초대하는 무대 (2) 연극 <대학살의 신> 
 
▶ 문화 기획 <전강희가 초대하는 무대> 연재가 시작되었습니다.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학과에 재학 중인 필자 전강희님이 매력적인 연극의 세계로 독자들을 초대합니다.  <일다> www.ildaro.com

온라인 게임 중에 ‘트로이’라는 게임이 있다. 광고화면을 보면 아테나 여신과 비너스 여신이 전쟁을 일으키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들이 휩쓸고 간 자리는 전쟁터가 된다.

 
대학살의 신은 고대에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도 그 신이 함께이다. 신이 휘두르는 무기는 ‘말’이다. <대학살의 신>은 두 쌍의 부부가 아이들의 싸움을 해결해 보려고 만나는 시점에서 시작한다. 동서양 모두 애들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변하는 것은 어쩔 수 없나 보다. 이 극은 거친 전장 대신 깔끔한 가정집의 거실에서, 칼과 총이 아닌 말로 싸움을 시작한다.
 
무대는 친구에게 맞아 이가 부러진 아이의 집 거실이다. 아이의 부모 미셸과 베로니끄는 상황을 완만하게 풀어보고자 가해 학생의 부모 알랭과 아네트를 ‘초대’한다. 초대라는 단어가 우아한 이들에게 가장 어울릴법한 단어이다.
 
‘우아한 대화’로 고조되는 어른들의 싸움
 

▲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풍자한 <대학살의 신>   
 
자식이 다쳤는데도 대화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 하다니 참 이성적이구나라고 생각하려는 찰나에 뭔가 어긋나는 것들이 생긴다.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는 배려심, 아니면 풍부한 학식, 교양 있는 행동 등이 전혀 상대의 마음으로 파고들지 못한다. 다음 싸움으로 나아가는 단서만을 제공할 뿐이다. 서로의 말이 꼬리를 물고 더 큰 싸움으로 변한다. 이 싸움을 중단시키는 소리는 알랭의 핸드폰 벨소리뿐이다.
 
말싸움에서 이기는 사람은 상대방을 설복시키는 사람이다. 말싸움도 일종의 소통이라고 해야 할까? 몸싸움과 달리 상대를 자신의 사고방식에 따르게 하는 과정이니 억지스러울 지라도 우선은 소통이라고 생각하자. 이런 측면에서 이들의 싸움은 소통으로 변해가고 있는 듯이 보인다. 잠시나마 상대방과 공감대가 형성된다. 하지만 핸드폰 벨소리가 울리면 그들의 연대는 다시 깨어진다. 핸드폰 소리든 전화기 소리든 그들을 원래 있던 자리로 되돌려놓는다.
 
그들을 떨어뜨려 놓는 것이 핸드폰 소리라면 하나로 묶어주는 것은 음식이다. 처음에는 파이를 먹으면서, 다음에는 보드카를 마시면서, 또 콜라나 물을 들이키며 가해자 대 피해자의 경계가 흐려진다.
 
이들의 경계는 남성 대 여성으로, 이성적인 사람 대 감정적인 사람으로 끊임없이 모습을 바꾼다. 가해 학생의 엄마인 아네트가 거실 여기저기에 구토를 해댈 때조차도 이들은 날카로운 대립각을 세우지 않는다. 마치 추억 만들기 놀이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뭔가 좋은 결말을 낼 것 같은 기대감마저 든다. 이는 아네트가 술에 취해 진짜 속마음을 남편에게 퍼부어 대기 전까지의 분위기이다.
 
허위 의식이 걷힌 자리에 남은 것
 
보드카가 그들의 이성을 잠재웠나 보다. 처음의 우아하고 지적인 모습은 모두 사라진다. 어긋난 그들의 행동들이 때를 만난 것처럼 터져 나온다. 이쯤에서 이들의 싸움은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소통!? 상대방을 자기편으로 만들기!? 이젠 필요 없다. 그들의 모든 허위의식이 서로를 통해서 까발려진다.
 
상대의 약점을 가장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배우자이다. 이들은 마치 네 사람이서 부부싸움 하는 것처럼 서로를 물고 늘어진다. 베로니끄와 아네트는 미셸이 기르던 햄스터를 길에 버려 죽게 한 것에 대해서 맹렬히 비난한다. 그는 상황을 완만하게 수습해 보려는 인자함을 지닌 사람처럼 보였지만 일상적인 행동 하나하나에 잔인함이 배어있는 사람이다.
  
▲ 네 사람의 갈등은 몸싸움까지 하면서 극으로 치닫는다. <이미지 출처> 대학살의 신
 

 
미셸과 알랭은 베로니끄가 아프리카의 고통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은 정의로움이 아니라 교조적인 태도일 뿐이라고 몰아세운다. 그녀는 지적인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지만 비싼 꽃을 사다 놓고 상류층인양 고상을 떨기도 한다. 알랭은 아내와 아이들을 위해서 열심히 일하는 변호사인 것 같지만 소송에 이기기 위해 양심을 저버리는 발언도 거리낌 없이 해치우는 인물이다.
 
아네트가 알랭의 핸드폰을 꽃병에 쳐 넣는 행동은 형편없는 남편에 대한 시위이다. 순진하고 착할 것만 같았던 아네트는 베로니끄에게 “우리 아들은 니네 아들처럼 맞고 들어오진 않아!”라고 속을 드러낸다. 그녀가 극중 가장 가식적인 인물이다.
 
몸싸움까지 하면서 극으로 치닫던 이들의 싸움은 아네트가 화병에서 꽃을 뽑아 바닥에 뿌리는 것으로 일단락된다. 비싼 돈을 주고 산 순백의 꽃도 바닥에 떨어지니 아네트의 토사물과 다를 바 없다. 이들의 모습도 처음에는 화병에 담긴 흰 꽃처럼 도도했지만 지금은 바닥에 뒹구는 꽃처럼 진이 빠져 있다. 화병에 담긴 꽃이나 바닥에 뒹굴어 더러워진 꽃이나 사실은 똑같은 흰색이다. 결국 같은 하나의 색일 뿐이다.
 
배우들의 깊은 내공이 빛난 무대
 
이 극의 작가 야스미나 레자(Yasmina Reza)는 무거운 주제를 일상적인 터치로 쉽게 그려내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 극도 역시 중산층의 허위의식을 풍자를 통해서 유쾌하게 풀어내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풀리지 않는 의문점이 있다. 베로니끄는 다큐멘터리 작가로서 아프리카의 불안정한 정치상황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아프리카를 그녀의 허위를 드러내기 위한 소재로만 기능을 축소하기에는 학살이라는 단어가 극의 곳곳에서 메아리치고 있다.

 
그곳에서 자행되는 학살을 이곳 중산층 가정에서 일어난 언어적 참변과 어떻게 관련지어야 하는가? 국가라는 공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폭력이 가정이라는 사적인 영역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을까? 단순히 지식인의 허위를 꼬집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눈물을 한 방울 떨어뜨린 것이라면 이는 고통에 너무 가볍게 접근하는 것이 아닌가? 전자가 표현되지 않은 것이라면 연출선이 너무 단순하게 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고, 후자의 경우라면 작가에게 후한 점수를 주고 싶지 않다.

문제가 무엇이든 간에 배우들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오랫동안 한 길을 걸어온 사람들의 깊은 내공이 느껴지는 무대였다.
 
베로니끄 이연규의 잔소리는 정말로 듣고 싶지 않았다. 비호감 교조주의자의 역할을 제대로 해냈다는 증거이다. 아네트 역의 서주희의 열연도 돋보인다. 특히 무대 위를 술에 취에 갈지자로 걸으며 토사물을 쏟아내는 장면은 이 극의 가장 명장면으로 기억될 것이다. 그녀들의 남편들인 미셸의 이대연과 알랭의 박지일도 자신들의 몫을 충실히 소화해내었다. 이 공연은 작가나 연출가의 이름보다는 배우들의 이름을 더욱 빛나게 했다.
 
□ 공연: <대학살의 신>  90분 공연/ 초등학생 이상 관람가
□ 일정: 2011. 12. 16. 금 ~ 2012. 2.12. 일
         화~목요일: 저녁 8시 / 토요일: 3시, 7시 / 일요일: 3시
□ 장소: 예술의 전당 자유소극장

전강희 / 미디어 <일다> 즐겨찾기! www.ildaro.com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