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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시설장애인, 탈시설-자립생활의 조건을 말하다① 
시설장애인의 자립 가로막는 '부양의무제'의 함정
 

이 글은 탈시설장애인 김현수씨의 구술을 토대로 장애와인권발바닥행동 김정하 활동가와 효정 활동가가 기록하였습니다. [편집자 주]
 
시설장애인에게 ‘돈’은 어떤 의미인가
 
“우리의 신체성(身體性) 자체가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있다.”
 
이것은 1960-1970년대 일본의 급진적 장애인운동단체인 푸른잔디회(뇌성마비 장애인단체)가 외쳤던 구호입니다. 중증장애인들은 자본주의적 경쟁 원리가 지배적인 사회에서는 생활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며, 따라서 속성상 반자본주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지요.

▲ 복지의 사각지대를 만들어 내는 <기초생활보장법>의 '부양의무제'를 폐지하라는 목소리가 높다.   © 빈곤사회연대 

경쟁이 요구하는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는 대다수의 장애인들은 주변부로 밀려납니다. 생산(노동)에에서 배제될 뿐만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교육, 참정, 이동, 주거, 사생활, 일상생활 및 관계 맺음 등 전반에 걸친 권리를 박탈당하고, 수 십 년간 최소한의 인간적 품위도 허용되지 않는 시설과 집을 온 세상 삼아 살아가게 됩니다.
 
때문에 시설의 장애인이 시설이 아닌 지역사회로 탈시설-자립생활을 이야기하는데 가난과 돈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제 시설안의 삶을 벗어나 자립생활을 시도하려는 장애인들의 이야기를 나눠보려고 합니다.
 
탈시설은 단지“시설에서 나가겠다.”라는 선언만으로 불가능합니다. 노동과 소득, 주거, 교육, 활동보조인제도 등 여러 가지 조건이 모두 충족되어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탈시설-자립생활에 대한 본격적인 첫 이야기는 교육과 노동에서 배제된 장애인의 기본소득원인 기초생활수급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보려고 합니다.
 
기초생활수급에 대한 문제는 특히 시설수급과 시설운영의 논리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시설에서 생활하는 장애인은 시설수급자로 분리되며, 자신의 통장으로 직접 수급비를 받는 것이 아니라 1인 당 책정된 일정 수급비가 시설운영자에게 직접 지급되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장애인 개인은 수급비에 대한 재산권을 행사할 수가 없습니다. 권리의 행사는커녕 아직도 시설 장애인 대다수와 그의 가족들은 시설의 운영자가 자신을 거둬 먹여주고 돌봐준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러한 운영형태는 절대적인 권력구조를 만들어내고 장애인은 일괄적 통제 상황에서도 목소리조차 낼 수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또한 지방자치단체는 시설수급자 개인에게 수급자로서 알아야 할 정보를 제공하지 않고, 시설은 시설수급자에게 개인통장(운영비와 별개로 장애연금은 장애인 개인통장으로 지급됩니다.)을 시설에서 일괄관리 합니다. 시설수급자는 한 달 몇 만원의 경제권조차 박탈당하는 것입니다.
 
시설장애인에게 돈은 단순히 ‘소비’를 위한 도구 이상입니다. 시설 안에서 자유란, 때론 ‘담배 한 갑, 껌 한 통을 사더라도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내 손으로 건 낼 수 있는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하니까요.
 
현수씨의 이야기 ‘시설에 안가면 어디서 먹고 살거니?’ 

<9살 때부터 시설에서 생활했으니 25년이 다 되었네요. 처음엔 다른 시설에 있었어요. 기숙사도 있고, 학교도 있었는데, 병동에 들어가서 생활해야 했지요, 당시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누워서 신문지 깔고 똥 싸고 그랬으니까.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7년 정도 있다가 초등학교만 겨우 마친 상태에서 나와야 했어요. 시설에서는 나이가 다 찼으니 나가라고 하더군요.
 
잠깐 집에 와있었지만, 부모님은 또 시설을 알아보시더군요. 엄마에게 “시설에 가고 싶지 않아요.”라고 말했는데, 씨도 안 먹히더라고요. “너 시설에 안가면 어디서 먹고 살거니?” 그 한마디에 말문이 막히더군요. 부모님은 어부였고, 집이 넉넉한 것도 아니었던 데다가 아래 동생들이 있으니 집에 계속 있을 수는 없었거든요.
 
그래도 시설에는 가고 싶지 않아서 가출을 했어요. 길거리에서 자고, 노숙하는 아저씨들에게 밥도 얻어먹었지요. 그럭저럭 버틸 만은 했는데, 시간이 지나니 수동휠체어의 바퀴에 있는 쇠가 닳아서 손이 다 찢어졌어요. 피는 나고, 집에 가면 시설에 보내질 것 같고……. 하지만 결국 사춘기 반항은 여기서 끝났어요. 돌파구가 없었으니까. 그 때 들어온 곳이 지금의 석암 시설이지요.
 
부모님은 별로 가진 게 없었지만, 나를 이 시설에 보내려고 입소금을 무려 2천만 원이나 내야 했어요. 처음에는 4천만 원을 불렀다고 하데요. 집에서는 “많은 돈을 냈으니 얌전히 살아라.”라고 말했고요. 처음 몇 달은 기억도 잘 나지 않아요. 뭘 먹고 살았는지, 어떻게 살았는지, 내가 뭘 했는지……. 너무 지치고 할 일이 없어서 그랬겠죠? 대부분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으니 마음을 나눌 사람도 없어서 우울증에 걸리기도 했어요. 그래도 어찌어찌 아무생각 없이 살다보니 시간이 지나고, 나이를 먹긴 하더라고요.
 
기초생활수급권: 내가 시설을 나가지 못했던 이유
 
8년 전 쯤 처음 그룹홈이라는 걸 들었고 자립생활이라는 것도 알게 됐어요. 어머니는 얌전히 살라고 했지만 부모님도 동생들도 각자의 인생이 있듯 나의 인생도 있는 거 아니겠어요? 나도 남들처럼 돈 벌어서 연애도 자유롭게 하고, 먹고 싶은 것 먹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고 싶었어요.
 
일산에 있는 직업학교에 지원했는데, 고등학교 졸업 이상만 입학할 수 있는 곳이었어요. 난 초등학교 밖에 안 나왔잖아요. 사정사정 했지요. 초등학교밖에 못나왔지만, 여기서 하는 일은 잘 할 수 있으니 지켜봐 달라고요. 다음날 땜질하는 테스트를 하고, 필기시험 보는데 중학교 이상이 풀 수 있는 문제가 나오더군요. 나는 초등학교밖에 못 나와서 이런 문제 못 푼다고 했더니, “누가 중학교 안 다니라고 했냐?” 그러는 거예요.

내가 다니고 싶지 않아서 안 다닌 것도 아닌데, 배우지 못한 게 죄도 아닌데. 못 배웠으니까 배우고 싶어서, 남들처럼 일도 하고 돈도 벌고 싶어서 그래서 간 거였는데.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걸어 그렇게 원망을 했어요. 엄마도 울고 나도 울고…….나는 결국 엄마에게 부탁해서 석암 시설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 후로 제가 사는 시설에서 비리를 저지른 운영자도 감옥에 보내고, 운영진들도 바꾸도록 만들면서 저는 자립생활을 더 가까이 접하게 되었어요. 저와 같이 시설비리를 없애기 위해서 싸웠던 많은 동료들은 자립생활을 하고 있어요. 그런데 저와 몇몇만 시설에서 나가지 못했어요. 바로 기초생활수급권 문제 때문에 말입니다.
 
나는 이미 시설에서 25년 가까이 살아왔고, 시설 안에서는 기초생활수급자로 정부의 지원을 받고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시설에서 나가서 자립을 하려면 시설에서 퇴소를 하고 주소지를 옮겨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수급에 대한 재심사를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부모님이 지금도 일을 하고 계시는데, 부모님이 저를 부양해야 하는 의무가 있어서 내가 시설에서 나오면 100% 수급에서 떨어진다고 하더군요. 그렇다고 형편이 그리 넉넉한 것도 아니고, 지금도 밖에 나와 사는 걸 반대하고 있는데, 시설에서 나온들 부모님이 생활비를 지원해 줄 리 없고, 이 나이에 용돈을 받아서 생활하는 것도 썩 내키지는 않습니다.
 
자립생활 용기 내 보았지만…

그래도 다시 한 번 시설에서 나와 집을 얻어서 살려고 시도를 했습니다. 작년(2010년) 9월에 김포시 양촌면에 휴** 아파트를 신청을 했습니다. 신청을 하기엔 조건이 맞지는 않았으나, 되면 좋은 거고 안 되면 말고 그런 생각으로 신청을 했습니다.
 
방1칸에 거실이 넓은 15평이었습니다. 제겐 계약금과 입주금이 없는 상태여서 한편으로는 안됐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됐으면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된다면 계약금 260만원과 입주금 1045만원에 대한 것이 문제가 되어서 걱정을 했고, 안된다면 그동안 돈을 모아서 다시 신청을 해야겠다 생각도 들었습니다.
 
신청한지 보름이 지나 문자가 왔습니다. 그 문자는 아파트가 되었으니 계약금을 입금해 달라는 문자였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자유를 느끼고, 통제도 안 받고 아침에 늦도록 자겠구나 하는 생각에 너무 기뻤습니다.
 
하지만, 다른 한구석엔 계약금과 입주금에 압박에 떨고 있었습니다. 우선 급한 계약금을 내야 된다는 생각에 은행과 제 주변에 사람들한테 말을 했습니다. 계약금이 260만원 인데 선뜩 빌려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마음도 이해가 가겠더군요. 제가 직장에 다니는 것도 아니고 수입이 있는 것도 아닌데 누가 선뜻 260만원 이라는 돈을 저한테 빌려주겠습니까?
 
며칠 후 전화가 왔습니다. 계약금을 내주겠다는 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계약금을 내주시면서 입주금을 어떻게 마련하시겠냐고 말씀 하시더군요. 너무 고마웠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주금은 걱정 안하셔도 된다고 그랬습니다. 하지만, 입주금을 어떻게 마련해야 될지를 몰랐습니다. 일단 계약금을 내야 되겠다는 것만 생각하고 돈을 빌려서 수납을 했습니다.
 
그리고 3달 후 문자가 왔습니다. 아파트 사전점검이 있으니 와 달라는 문자였습니다. 사전점검 때 가서 은행 대출해서 입주금과 살림살이를 해결하려고 했었습니다. 보증금이 1045만원인데 은행 전세자금대출은 800만원까지 된다고 하더군요. 전세자금대출조건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 만 35세가 넘어야 하고 다른 한가진 기초생활수급자가 돼야 된다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러나 전 두 가지가 해당이 안됐습니다. 지금은 시설 안에서 수급자로 되어 있지만, 시설에서 나가면 부양의무자에 대한 재산을 다시 조사해서 수급자에서 탈락하게 됩니다. 그래서 전 그 나머지를 동생한테 마련해달라고 했고, 부모님한테는 비밀로 해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동생은 1000만원을 마련해준다고 했습니다. 나만의 집에 입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저는 쇼핑도 하고 전자제품과 가구를 알아보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습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면서 이때 사람다운 것을 느꼈습니다.
 
자립 반대하는 부모의 손에 다시 이끌려
 
그러나 그런 기쁨도 잠시였습니다. 어떻게 저희 부모님이 이 사실을 아시고 아침 일찍 시설로 찾아오셔서 앞으로 엄마아빠가 25평정도 얻어서 너하고 같이 살면 되지 않겠냐고 하셨습니다. 시설에서 나오는 것을 반대해 온 부모님이기에 퇴소하겠다는 나에게 웬일로 반대를 안 하시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의아함도 잠시, 부모님은 당신들이 은퇴하시면 시골에 아파트를 얻어 같이 살자고 하셨습니다. 제 꿈은 바로 눈앞에서 다시 물거품이 되고 있었습니다. 이렇게 될 줄 알고 동생한테 비밀로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결국 동생이 말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부모님 설득에 결국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모님은 울면서 ‘나가고 안 나가고는 너의 뜻이지만 현실은 다르고 지금은 현 복지 시스템으로는 아직까지 부족 하다’면서 나가지 말라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면서 ‘새장에 새를 가두면 새가 나가려고 날개 짓을 하듯이 사람도 같다’고 말하시더군요. 그런 비유를 쓰면서도 제가 나가는 것은 반대했습니다.
 
저는 고민을 해야만 했습니다. 전세대출자금도 안되고 저희 부모님도 반대하시고 기초생활수급자도 안되는데 내가 이러면서까지 나가야 되는 걸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무턱대고 나가면 나간 다음 먹고 살아가야 할 일도 막막하고 직장 구하기도 힘든데 말이죠. 그렇다고 다시 시설로 들어가자니 시설에서도 받아줄지도 모르고, 난 어떻게 되는 걸까? 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저는 아파트를 포기 해야만 했습니다. 그 이후론 저는 부모님과 대화가 단절된 상태이고, 외출 외박도 하기 싫은 정도입니다. 그리고 중증장애인인인 나는 여전히 시설에 남아 있습니다. 시설에서 세상 밖으로 나가서 살기 위해서는 어디선가 돈을 벌지 않는 이상, 현재의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바꾸거나 아니면 부모님이 돌아가실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처지입니다. 나는 언제까지 시설에 있어야 할까요?>

김정하, 효정 기록/  여성주의 저널 일다 www.ildar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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