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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세상에 홀로 맞선 하청여성노동자의 싸움, 그 의미를 생각한다 
 
여성가족부 앞,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부당해고 노동자의 노숙농성이 160일째를 맞이합니다. 겨울의 추위가 엄습하는 농성장에서 지원대책위원회 활동가가 보내온 편지를 싣습니다. 필자 나영님은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사무국장이며,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편집자 주]
 
돈 없고, 빽 없는 여성이 혼자 살아간다는 것

▲ 여성가족부 앞 농성텐트.      
 
처음 여성가족부 앞에 텐트를 치던 그날 밤, 부슬부슬 비가 내렸다. 집에서 급히 가져온 텐트와 마침 우리 것과 똑같이 생긴 재능지부 분들이 주신 텐트가 급히 깔아놓은 비닐 한 장 위에 덩그러니 놓였다. 세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냥 던지면 펴지는, 허약하기 짝이 없는 조그만 텐트 두 동. 비를 막을 수도 없었다.
 
집회를 끝내고 돌아가려는 사람들에게 휘어진 캐노피 텐트를 지붕만 빌려 세워보려 했지만 이내 경찰이 막았다. 결국 비닐 몇 장이 간신히 텐트 위에 덮이고 그날부터 언니는 그 초라한 텐트 안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투쟁이 시작된 후 종종 농성장 앞에 앉아 청계천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곳의 풍경이 참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곤 했다. '디자인 서울' 운운하기 무색하게 주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인공의 조형물과 그 아래로 흐르는 인공의 개천.
 
관광객을 실은 버스가 쉴 새 없이 매연을 뿜으며 달려와 그 앞에 도착하면 깃발을 앞세운 무리들이 그 인공의 개천을 따라가며 사진을 찍어대고, 그 매연들 사이에서 화려한 불빛으로 치장한 관광마차를 끌고 힘들게 달려온 말들은 지친 표정으로 도착해 여성가족부 건물 앞에 서곤 했다.
 
그리고 그 ‘여성가족부’ 앞에는 14년을 일한 일터에서 성희롱 당한 사실을 알렸다는 이유만으로 해고된 ‘여성노동자’가 농성을 한다. 무엇 하나 자연스러운 것이 없는 풍경 속에서 단지 농성장과 지친 말들의 표정만이 열심히 현실을 대변하고 있었다.
 
농성장에서 언니와 함께 잤던 날, 언니는 처음으로 나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었다. 아무리 인생이 곧 드라마라지만 그 날 언니가 들려준 이야기는 드라마 같다 못해 비현실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가부장으로 점철된 이 세상에서 돈 없고, 빽 없는 여성이 혼자 힘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희망이 절망이 되고, 삶의 의지가 고통으로 되돌아오는 매 순간을 견뎌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 고통의 순간마다 언니는 좌절하는 대신 싸워왔고, 이번에도 포기하는 대신 용기를 냈다. 결국 언니가 지금 겪고 있는 일은 이 폭력적 가부장 사회가 언니에게 안겨준 고통의 정점이자, 더 이상 견딜 수만은 없는 언니가 택한 중요한 전환점인 셈이었다. 그리고 언니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 이 싸움은 혼자만의 싸움이 아니라 폭력이 곧 권력이 되는 세상을 향한 우리 모두의 싸움이 되었다.
 
피해자를 문제의 원인으로 모는 사회에 맞서
 
성폭력의 일상성은 대부분 사람들로 하여금 여성에 대한 남성폭력을 지극히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으로 여기게 만들고, 성폭력은 특별한 설명이 필요 없는 일이며, 성폭력을 없애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여기게 만든다. 그러나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폭력을 당연한 일로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자기 암시와 같은 특별한 정신 훈련을 통해 성폭력이 실제로 발생한다거나 또는 그들 자신에게도 일어날 수도 있다는 것은 부정하려 애쓰고 있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바보 같은” 행동을 하지 않고, 미리 조심하기만 한다면 어떤 여성이라도 충분히 성폭력을 피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이야기해 그리고 다시 살아나> 수잔 브라이슨
 
농성을 하면서 언니가 들었다는 이야기 중 가장 황당하고 가슴 아픈 이야기는 지나가던 여성이 “성희롱 당한 게 뭐 자랑이라고 길에 나와서 이러고 있어”라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다. 2010년 겨울 현대자동차 본사 앞에서 기자회견을 한 지 한 달쯤 지났을 때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 사무실로 가해자와 부인이 함께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가해자는 뻔뻔하게 직장을 계속 다니며 여전히 자신의 권력을 누리고 있지만 피해자는 세 자녀를 두고도 척박한 길 위에서 물벼락을 맞고 폭행을 당해가며 텐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는 죄를 지어 놓고도 여전히 남성이기 때문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
 
그가 저지른 성희롱은 그의 권력을 이용한 여성 노동자 관리의 수단이었으며, 그래서 성희롱은 그 자체로 권력이 되었다. 저항해 봤자 잘리면 그만인 하청 기업에서 여성노동자들에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던 성희롱은, 그것으로 자신의 권력을 과시하고 이를 바탕으로 다른 일들에까지 저항하지 못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수단이 되어왔던 것이다.
 
하청 회사의 관리자라는 권력을 이용하여 상습적으로 성희롱을 하고 급기야 피해자를 직장에서 내쫓은 가해자는 남성 가장이라는 또 다른 사회적 권력을 이용해 이제는 아예 부인과 함께 피해자를 모든 일의 원인으로 몰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일들은 우리 사회에서 당연한 일상처럼 되어버렸다. 사람들은 이제 수잔 브라이슨의 말처럼, 성희롱을 없애기란 쉽지 않은 일이라고 여기고, 그 사실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성희롱을 당하는 여성들에게 그 탓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성희롱 당한 게 뭐가 자랑이냐” 잔인한 말을 했던 그 여성은 아마도 그 착각으로부터 자신을 일깨우는 농성장이 매우 불편했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우리는 바로 그 불편함과 싸우고 있다.
 
아픔으로 핀 작은 꽃이 온 세상에 퍼질 그 날까지

▲시민들과 함께 한 촛불문화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성희롱·부당해고 피해 여성노동자 지원대책위'. 이게 우리 대책위의 공식 명칭이다. 이 긴 대책위 이름에 들어가는 단어들 중 어느 하나라도 빠지면 이 싸움의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못할 것 같아서 사람들에게 이 투쟁에 대해 이야기할 때뿐만 아니라, 블로그나 트위터에 글을 쓸 때조차도 이 이름을 그대로 전하기 위해 애썼다.
 
'현대자동차'의 '하청기업'에서 벌어진 '성희롱', 게다가 그 사실을 동료에게 알렸다는 이유만으로 '징계'와 '해고'를 당한 '여성' 노동자라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도 우리 사회의 '여성', '노동자'가 처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싸움에 함께한 지 어느 덧 일 년이 되어가는 지금, 나는 우리가 대책위 이름을 잘못 지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피해자'가 아니라 벌써 2년째 이 엄청난 싸움을 지속해온 투쟁의 주체이고, 때문에 우리의 역할은 '피해자'를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와 함께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투쟁을 함께하면서 나는 "가해자를 처벌하고 피해자를 복직시켜라" 라는 이 당연한 요구가 왜 그렇게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인지, 이 투쟁의 결과가 얼마나 큰 변화의 파장을 가져오게 될 지 새삼 하나하나 깨닫고 있다. 이 싸움은 '현대자동차'라는 글로벌 대기업의 무책임한 경영 윤리에 대한 고발일 뿐만 아니라, 하청 노동자를 쓰다 버리는 부품쯤으로 여기는 원청 기업들의 반인권적 행태에 대한 도전이다. 또한 성희롱, 성폭력으로 여성 노동자들을 '관리'하며 자신들의 권력을 유지하는 남성 관리직 노동자들의 문화와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남성 중심적 권력구조, 여성들을 저임금의 비정규직, 하청 노동자로 내모는 가부장 사회에 대한 폭로다.
 
고용노동부도, 여성가족부도, 민주노총도 하지 못하고 있는 이 엄청난 일을 그녀가 2년째 하고 있다. 처음에 이 '작은 꽃'은 아픔으로 피었지만 결국 그 씨앗이 온 세상에 퍼져 지금과는 다른 세상을 만들게 될 것을 알기에, 우리는 이 싸움을 끝까지 함께할 것이다. 그 날, 언니가 나에게 보여주었던 사진 속 그 모습처럼 예쁘게 차려입고 당당하고 아름다운 사진을 다시 한 번 찍었으면 좋겠다. 

▶링크: 현대차 사내하청 성희롱 부당해고 피해
노동자 지원대책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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