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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말하다

"가지 않은 길"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1. 8. 24. 15:43

<일다> 윤하의 딸을 만나러 가는 길(19) 
 
대학을 졸업할 당시, 주위에서 공장에 취직할 계획을 세운 사람은 나만은 아니었다. 노동자들과 문학운동을 펼치고 싶어 하는, 문학 동아리 소속 대학생들이 모여 사회진출 모임을 만든 건 4학년 가을의 일이다.

거기서 희수를 만났다. 우리 모임의 여학생들 중 유일하게 공장 활동을 시작한 사람은 나와 그녀뿐이었다. 희수와 난 나이가 같아 금방 친해지기도 했지만, 그녀가 참 좋았다. 그녀는 내가 흉내 낼 수 없을 만큼  거침없고 용감했는데, 내게 그런 희수의 모습은 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희수는 그렇게 ‘부러움이란 절대로 따라할 수 없을 때 생기는 감정’이라는 걸 내게 깨닫게 해 준 아이였다.

 
우리는 함께 서울에 있는 한 작은 공단에서 각자 마음에 드는 공장을 골라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는 중에도 가끔씩 만나 서로를 격려했고, 너무 고단하거나 앞으로 펼쳐질 일들로 불안감을 느낄 때도 그녀의 존재는 내게 큰 위로와 용기가 되었다.
 
나는 희수를 생각할 때마다 내 인생의 다른 편을 보는 것 같다. ‘내가 그때 공장을 그만 두지 않았다면, 희수처럼 살았겠구나’ 생각하면서 그녀를 본다. 똑같은 지점에서, 똑같은 마음으로 서 있었던 분신 같던 아이. 아니, 여전히 분신 같은 아이. 내가 가지 않은, 나와 다른 길을 거침없이 걸어갔던……. 그녀도 나를 그렇게 생각할까? 자기와 너무 다른 길을 향해 걸어간, 그녀의 또 다른 존재로.
 
우린 둘 다 문학에 열정을 갖고 있었지만, 그녀는 나보다 더 실력이 있었다. 졸업을 할 당시, 희수는 이미 단행본을 출간할 만큼 촉망받는 소설가 지망생이었다. 또 우리는 둘 다 연애 중이었다. 내가 임신을 핑계 삼아 세 달 만에 공장생활을 접고 결혼으로 도망친 것과 달리, 희수는 애인과 헤어지고 더 큰 공단지역으로 떠났다. 그렇게 그 물길을 따라, 그녀는 ‘정말 노동자’가 되었다. 우리 인생이 한 발짝씩 벌어지기 시작한 건 바로 그때부터였다.
 
그 후, 난 아이를 낳았고 이혼을 했다. 희수는 계속 노동운동을 했고 거기서 만난 건강한 남자와 결혼을 했다. 이혼 후 난 대학원에 다녔고, 희수가 첫 아이를 낳은 직후, 난 프랑스로 떠났다. 그러다 몇 년 뒤, 잠시 한국에 돌아와 희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어느새 세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물론 희수도 노동운동을 접었고, 지금은 한 소도시에서 어린이들에게 글쓰기를 가르치며 살고 있다.
 
그런 희수를 마지막으로 본 것도 벌써 여러해 전의 일이다. 그때, ‘지하철에서 내려 이제 버스를 타러 갈 거’라는 전화를 받고나서부터 난 집에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하고 정류장으로 나가, 설레며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는 사이, 마음은 먼 시절로 물러나  어느새 꿈 많던 어린 시절 소녀가 되어, 난 그녀를 기다렸다.

그러나 그 때, 왜 아무 말도 하지 않은 희수가 혼자 올 거라고 생각했는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린 끝에, 우당탕탕! 희수보다 먼저 버스를 달려 내려오는 그녀의 세 아이들을 보는 순간, 다시 난 현실로 돌아와, 현실 속의 그녀를 만났다.

‘고단한 삶 속에서도 네가 여전히 밝고 기운찰 수 있는 건 바로 저 천진스런 아이들 때문이겠구나’ 하면서, ‘저들이 네가 삶 속에서 가장 아끼는 보석이겠구나’ 하면서. 그러나 아무리 애써 그렇게 생각해도 썰물처럼 마음 한구석을 쓸어내리는 슬픔을 거둘 수가 없었다. 결국, 그날 난 희수와 마음속의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난 항상 그녀를 생각하면, 저 먼 꿈 많던 시절의 열정과 사랑들이 떠올라 가슴이 아프다. 똑같은 지점에 함께 있었던, 어느 지점에서부턴가 한 발짝씩, 서로 발걸음을 내딛으며 세월을 빠져나왔는데, 이렇게 세월 한참 흘러서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는 느낌을 거둘 수 없어, 항상 마음이 아프다.
 
난 희수의 씩씩하고 천진스럽기만 한 세 아이들을 보면서도, “넌 행복하니?”라고 묻지 못했다. 글쎄, 그녀는 행복할까? 나와 항상 다른 선택을, 다른 길을 간 그녀는, 그래서 행복할까? 그러나 항상 그것은 내 자신에게 묻는 질문이었다. 나는 너무 다른 길을 간 희수 속에서조차 내 모습을 본다. 그리고 내게 묻는다. “넌 행복하니?”
 
※ 이 글은 지난 2007년 ‘도서출판 일다’에서 출판한 <나, 독립한다> 중 ‘내가 선택한 아이’의 일부를 고쳐 쓴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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