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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으로 말하다

나조차 몰랐던 내 몸의 이야기

그 여자들의 물결 일다 2011. 8. 19. 07:30

<일다> 자야, 귀촌을 이야기하다: 몸과 소통하기① 
 
기상청 예보에 따르면 대기가 불안정하단다. 그래서일까. 요즘은 하루에도 12번쯤 날씨가 변하는 것 같다. 오늘은 정도가 더 심하다. 거칠고 둔탁한 빗소리에 깨어난 게 분명한데 화장실에 갔다 오니 창밖으로 말간 햇살이 비추고, 그 틈에 마당에 나가 깻잎이며 고추며 방울토마토를 따서 아침상을 차리는데 다시 빗방울이 듣는 식이다.
 
오락가락 하던 비가 마침내 물러난 건 정오 무렵. 나는 챙 넓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몇 뼘은 높아진 하늘 아래 환한 햇살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언제 또 날씨가 변할지 몰라 조급한 나의 마음과는 달리, 길 위에 있는 모든 것들, 나무와 풀과 돌담 사이 핀 꽃과 심지어는 슬레이트 지붕 위에 누워 있는 고양이들조차도 얄미울 만큼 느긋하고 여유로운 표정이다.
 
게으른 자여, 걸음을 옮기라

▲   내 길지 않은 산책길의 반환점인 저수지 앞에서  © 자야
 
체질 탓인지 성격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습관이 그렇게 든 것인지, 아무튼 나는 몸 움직이는 것을 굉장히 귀찮아하는 편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밖에서 또래들과 뛰어 놀기보다, 방안에서 홀로 꼼지락거리며 만화책이나 읽고 과자 부스러기 주워 먹는 것에 더 흥미를 느꼈다. 그렇게 성장한 내 운동신경은 거의 제로에 가깝고, 흔히들 피트니스 클럽에서 한다는 운동에는 눈곱만큼의 관심도 없으며, 서울살이를 청산하기 직전에 아차산을 오르내린 것 말고는 등산을 제대로 해본 적도 드물다.
 
내가 하는 신체활동 중 요가에서 하는 아사나(자세) 수련을 제외하고 그나마 운동에 가까운 유일한 것으로는 ‘걷기’가 있지만, 그 또한 능동적으로 즐기는 수준은 아니다. 걷다 보니 살이 빠지더라,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더라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나는 그처럼 특정한 결과를 뼛속 깊이 느낄 만큼 걸어보질 못했다. 양질전화(良質轉化)가 일어나기에는 양이 턱없이 부족했다 할까.
 
다만 이런저런 이유로 걸어야 하는 상황이 되면 -예를 들어 대중교통이 변변치 않다든가, 시간은 남아도는데 할 일은 없는 곳을 여행 중이라든가- 기꺼이 걷기는 한다. 이따금은 그런 상황을 일부러 만들기도 하는데, 그때조차 내가 걷는 반경은 집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현재 사는 곳이 함양이어서 집 주변에 지리산 둘레길이 포함된다는 점이 좀 특별할지는 몰라도, 그건 그리 자주 있는 일은 아니다.
 
이런 내게 ‘하루에 한 시간씩은 규칙적으로 걸어야 한다’는 특명을 내린 사람이 있으니, 그는 강화도에서 한의학을 공부하면서 산으로 들로 약초를 캐러 쏘다니는 내 친구 겸 주치의다. 순환이 잘 안 되고 냉한 나의 몸 상태를 잘 아는 그이는 평소에도 나만 보면 “자야, 너는 땀이 날 정도로 걸어야 해” 하고 당부하곤 했었다. 그때마다 앞에서는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돌아서면 귓등으로 흘려버리기 일쑤였는데, 이번엔 차마 그럴 수가 없는 것이 며칠 전 그 친구로부터 백 퍼센트 수제품인 귀한 한약을 받았기 때문이다.
 
만류하는 것을 무릅쓰고 약값을 지불하긴 했어도, 그건 기본적인 약재 비용에도 못 미치는 수준임을 나는 안다. 게다가 제 발로 산에 올라 갈무리한 약초를 손질해 이 더운 여름날 꼬박 하루를 약탕관 앞에 앉아 있었을 그 친구를 생각하면, 걷는 척이라도 해야 내 마음이 편해질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이다.
 
바깥세상과 내면의 감응
 
막 비가 그쳐서인지 햇살은 뜨거워도 공기는 신선하다. 집 앞 텃밭을 지나 아주머니들이 콜택시를 타기 위해 기다리는 (아주) 작은 사거리를 가로지르니 금세 시야가 트인다. 두 명이 손잡고 가면 딱 좋을 너비의 길 왼편으로는 대나무 언덕이 솟아 있고, 오른편으로는 어느새 붉어진 고추밭이 내려다보인다. 고추밭 둘레로 한창 크고 있는 콩잎과 옥수수대가 그늘을 드리운 폼이 제법 풍요롭고 우아해 보이기까지 하다.
 
밭에서 논으로 풍광이 바뀌는 곳에 이르렀을 때, 나는 내가 평소와 다름없이 아주 천천히 걷고 있음을 깨닫는다. 앗, 친구는 내게 땀이 날만큼 빨리 걸으라고 했는데, 하는 자책도 잠깐. 오늘은 이 정도로 만족하고 싶다. 변명을 하자면 이미 내 이마와 콧잔등엔 땀이 몽글몽글 솟아오르고 있으므로. 더군다나 이 길 위에는 시원스레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벼 포기며 그들 사이에서 푸르게 일렁이는 바람까지, 나를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 많지 않은가.
 
논을 감상하며 걷다 보면 소똥 냄새가 진동하는 곳에 이른다. 이장님이 키우시는 소들의 집이다. 사납게 생긴 도사견 한 마리가 이 우사를 지키고 앉았는데, 이제는 내 낯을 익혀서인지 짖기는커녕 눈썹 하나 꿈쩍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호의적으로 구는 것도 아니어서 내 거동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도사견도 조용하고 소들도 잠잠하고. 사방이 적막하기만 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울어대는 뻐꾸기 소리가 운치를 돋웠는데. 그 새들은 다 어디로 간 것일까.
 
물 속 사원처럼 고요한 길을 걸으니 의도하지 않아도 내 의식이 호흡과 걸음걸이에 머무는 것을 느낀다. 나는 어떻게 숨을 쉬는가. 깊은가 얕은가. 거친가 부드러운가. 들어온 숨은 내 몸 어디를 어떻게 돌아 다시 밖으로 나가는가. 내 걸음은 또한 어떤가. 시끄러운가 단정한가, 곧은가 어지러운가. 발바닥과 접촉하는 대지는 무른가 단단한가, 아니면 딱딱한가 폭신한가.
 
현란한 색깔과 어지러운 소리들에 정신을 뺏기며 걷게 되는 도심과는 달리, 시골에서는 바깥 풍경조차도 걷는 이가 자기 내면에 집중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는다. 아니, 오히려 내면과 접촉하는 것을 돕는 하나의 통로가 된다. 본질적으로는 인간도 자연이어서 자연이 지닌 색과 소리와 모양이 이미 다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깥의 자연과 내면의 자연이 서로 감응하고 융화하는 것이다.
 
그것을 놓치지 않고 주의를 기울여 관찰할 때, 바깥과 내면이 만나는 지점은 점점 더 미묘해지고 그를 느끼는 감각은 더 섬세해진다. 혹자는 이때 바깥과 나를 가르던 경계가 말랑해지고 흐릿해지는 것을 경험하기도 한다. 이를 물아일체라고 하면 다소 과장된 표현일 수 있겠으나, 최소한 그런 느낌 자체가 거짓인 것은 아니다. 어찌됐건 그 순간에만은 몸과 마음이 중력으로부터 벗어나 가볍고 유쾌해지므로.
 
나 역시 오늘 그것을 느낀다. 가볍고 유쾌하다. 빨리 걸으라는 친구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을 제외하면.
 
내 안의 묵직하고 웅숭깊은 그것 

▲ 나조차 몰랐던 내 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는 계기를 마련해 준 두 명의 마녀    © 자야
 
어느 결엔가 나는 저수지 앞에 서있다. 이 저수지는 내 산책길의 끝이자 처음이다. 출발선을 떠난 수영선수가 반환점을 찍고 다시 출발선으로 돌아가듯, 나는 일단 산책을 시작하면 이 저수지에 와서 잠시 머물다 발길을 돌려 집으로 향한다. 보통 성인 걸음으로 왕복 삼사십 분 걸릴까. 하지만 그걸 한 시간으로 늘이는 건 내게 일도 아니다.
 
오랜만에 와본 저수지는 개구리밥인지 뭔지 미세한 초록입자들로 뒤덮여 있다. 고인 물이란 게 원래 질척이고 무거워 보이는 법이지만, 오늘은 유난히 둔중하고 웅숭깊게 느껴진다. 마치 내 배 속에 자리 잡은 ‘그것’을 처음 만졌을 때의 느낌처럼.
 
남원에 살 때 일이다. 내게 약을 보내준 친구와 아는 선배 둘이서 나를 만나러 그 먼 곳까지 온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그들과 오래된 사이도, 그렇다고 친한 사이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거리낌 없이 내게 왔고, 나 또한 기꺼이 그들을 맞이했다.
 
셋이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이야기를 나누며 하룻밤을 보내고 난 다음날 아침. 친구는 나를 바닥에 눕히고는 몸 여기저기를 만지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배 속에 아주 뿌리가 깊고 단단하고 커다란 적(積)이 있다며 내 복부를 집중적으로 마사지하는 거였다. 몸 구석구석에 따스한 손이 닿을 때부터 쿨렁거리던 눈물이 터진 건, 그녀가 마사지하는 사이사이 이런 말을 해주었을 때다.
 
“자야, 이 정도 덩어리면 거의 아기였을 때부터 긴장하고 스트레스 받으며 살았다는 증거야.”

“이건 없애려면 안 돼. 오히려 사랑하며 살아야지. 그래야 아주 서서히 조금씩 풀리지.”
 
우는 게 부끄럽다는 생각도 잠깐, 나는 쏟아지는 눈물을 멈출 수 없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엔가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선배가 노래인지 허밍인지 아니면 만트라(mantra)인지, 뭔가 알 수 없는 곡조를 읊조리기 시작하면서 내 흐느낌은 통곡으로 변해갔다. 내 안에 쌓여 덩어리로 뭉쳐진 적에서 솟구치기라도 하듯, 그 울음은 깊고 단단하고 어두웠다. 아기였을 때부터 나는 왜 나를 그토록 힘들게 했을까. 얼마나 오래, 뜨겁게 안아주고 보듬어야 내 몸에 숨겨진 이 단단한 이야기가 물처럼 흘러 사라질까.
 
한참을 울고 나니 머리는 맑고 배도 한결 따뜻해졌다. 두 다리에 기운이 도는 것도 같았다. 배 속에 그 무지막지한 덩어리를 키워온 나 자신에 대한 원망과 후회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고마운 마음이 훨씬 컸다. 덕분에 나는 나조차도 몰랐던 내 몸의 이야기에 비로소 귀 기울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마녀처럼 신비롭고 넉넉한 그 두 여자와 사랑에 빠지게 되었으니까.
 
지금 이 저수지 앞에서 나는 ‘그것’이 고마운 이유를 하나 더 추가한다. 하루에 두 번 한약을 마시고 한 시간씩은 꼭 걸어야 하는 호사를 누리게 된 것도 다 당신 덕분이라고.   (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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