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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다> 장애여성, 숨은 그림 찾기(5) : 이탈로 칼비노 <우리의 선조들 3부작> 

다섯 명의 장애여성들이 다양한 ‘매체 읽기’를 통해 비장애인, 남성 중심의 주류 시각으로는 놓칠 수 있는 시선을 드러내고자 합니다. – <일다> 편집자 주

 

이탈로 칼비노는 <우리의 선조들 3부작>으로 각각 기사, 남작, 자작이라는 사회지도층의 기이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아질울포는 갑옷만으로 존재하고 『나무 위의 남작』의 코지모는 평생을 나무 위에서 살아간다.『반쪼가리 자작』의 메다르도는 신체가 정확하게 반으로 나뉘어져(!) 선인과 악인으로 각각 살아간다.
 
라틴 아메리카의 마술적 사실주의나 『반지의 제왕』같은 판타지가 아니어도 판타지에 근접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칼비노의 3부작. 중세시대 사회지도층으로 분류되는 지위임에도 불구하고 마이너로 살아가는 이야기라서 매우 흥미롭다.

『존재하지 않는 기사』,『나무 위의 남작』과 『반쪼가리 자작』의 주인공은 모두 조금 이상한 사회지도층이다. 지위만으로 보자면 부러울 것이 없어 마땅한데 그들에게선 비장함마저 감도는 결핍이 감지된다. 신체가 없거나(!) 신체가 나뉘었거나(!) 혹은 스스로 땅 밟는 권리를 박탈한다. 이 남다른 사회지도층들의 이야기에서 의외로 소수자코드를 읽을 수 있다.
 
사회지도층의 '이상한' 결핍 

▲ 이탈로 칼비노는 <우리의 선조들 3부작(민음사)>의 표지 이미지       
 
『존재하지 않는 기사』의 아질울포는 존재하겠다는 정신만으로 존재하는 ‘완벽한’ 기사이다. 완벽한 기사는 작품 내내 끊임없이 조롱당하다가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는 순간, 실체였던 갑옷만 남기고 사라진다. 남은 등장인물들에겐 어쨌든 해피엔딩으로 결말이 나지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씁쓸한 결말이다.
 
『나무 위의 남작』의 코지모는 달팽이요리 시식을 거부함으로서 스스로 나무 위에 유배되는 인물이다. 세 작품 중 그나마 본인의 삶을 사는 인물 코지모. 그러나 나무 위의 삶을 포기할 수 없어 다른 것들을 포기하게 되는 시기가 오자, 나무 위의 삶은 코지모의 삶을 증명하는 수단이 된다. 주체자가 수단에 잠식당하는 이상한 형태로 증명하는 삶이라니.
 
『반쪼가리 자작』의 메다르도는 전쟁 중 대포에 맞아 ‘선과 악’으로 분리되고 서로 결투를 벌인다. 두 반쪽은 봉합수술을 거쳐 하나의 인물로 돌아오면서 끝이 나는데, 이 결말 역시 뒤가 개운하지는 않다. 온전한 자작이 되어 돌아온 세상이 너무 복잡하기에.
 
현대 소수자의 결핍
 
이들은 사회지도층이지만 각각의 결핍으로 인해 권리를 제대로 누리지 못한다. 현대의 소수자도 마찬가지이다. 물론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의 인물들은 개인의 결핍이지만 현대의 소수자는 사회구조에서 오는 결핍이라는 차이점이 있다. 현대의 소수자에게 결핍된 것은 바로 힘이다. 힘이 없기에 아무리 목소리를 내어도 사회는 소수자의 목소리를 들으려하지 않는다. 소수자의 존재를 인정하는 순간, 다수자가 느낄 피로감을 의식해서이다.
 
트위터나 진보적인 웹사이트들에서 요즘 최대의 이슈는 한진중공업 사태이다. 그러나 크레인에서 180일이 넘도록 생활하고 있는 김진숙씨에게 최소한의 환경이던 전기마저 끊긴 상황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지배계층이 되어버린 거대 언론에게 ‘한낱’ 노동자에 지나지 않는 여성의 이야기는 불편할 뿐이다.
 
다중차별을 겪고 있는 장애여성에게 있어 중요한 법안인 ‘장애여성지원법’ 관련, 국회의원들에게 질의서를 보냈을 때도 답변은 쉬이 돌아오지 않았다. 장애여성이라는 소수자에게 관심을 쏟기보단 다수에게 집중하는 것이 국회의원들에겐 더 효과적이기 때문이다.
 
전복적인 기운을 감지하다
 
<우리의 선조들 3부작>에서는 ‘지배층이라고 다 권력을 누리는 것은 아니야’라고 이야기 하고 있다. 마치 현대의 지배층들에게 ‘지금 너희들의 상황이 언젠간 전복될 수도 있다고’ 라고 말하는 듯하다. 혹시 <우리의 선조들 3부작>의 사회지도층이 권력을 가지지 못한 것은 다른 소수자들과 연대하지 않아서가 아닐까? 아질울포가 그를 숭배하던 토리스몬도와 계속 관계를 유지했다면, 코지모가 다른 나무위의 사람들과 합류해 살아갔다면, 메다르도가 한센병 환자들과 함께 해 나갔다면 3부작의 결말이 조금은 다르지 않았을까?
 
내가 칼비노의 작품에 꽂혔던 이유는 작품 전반에 흐르는 전복적인 기운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님 말고~’라며 슬쩍 뒤로 물러나 있기도 하다. ‘상황을 전복시키는 것은 네 몫이야, 근데 안 되면 할 수 없고’라고 ‘시크’하게 말하는 작가. 작가의 말에 귀 기울이자니, 지배층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으려면 힘을 키우고 그들의 논리에 대항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소수자는 힘이 없기에 본인들의 정체성을 성립하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기도 하고 과정이 지난하기도 하다. 이 지난한 과정 중에 소수자가 연대로써 방향을 모색해 흩어지지 않고 힘을 키우는 상상을 해본다. 우리가 원하는 세상을 마주하기 위해! “뭐, 언젠가는 오지 않겠어? 랄라~”  (푸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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