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이경신의 도서관나들이(20) 다른 생명체와 공존하려는 노력  
 
“내가 손바닥에 올려놓을만한 지렁이 하나를 고른 이유는 여러 해 동안 그것들을 데리고 있으면서도 한 번도 만져볼 생각을 못했다는 자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지렁이가 내 살에 닿는 것을 꺼리던 것이 이상한 일이었다. 지렁이와 친해지려고 하지 않았으면서 어찌 뜰의 식물들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어둡고 축축한 곳에 대해 무언가를 알려고 했는지?” (에이미 스튜어트 <지렁이> 달팽이, 2005, ‘다윈의 지렁이들’) 
 

▲붉은 큰 지렁이. 비오는 날 땅위에서 가장 많이 눈에 띄는 지렁이. 출처: 에이미 스튜어트 <지렁이>   
 
비온 다음 날이면 동네 곳곳에서 지렁이들과 마주친다. 개중에는 살아 꿈틀거리는 것도 있고, 죽어 널브러져 있는 것도 있지만, 포장된 길에서 방황하며 죽어가는 지렁이를 대하는 것도, 토막 나 있거나 허옇게 퉁퉁 불어터진, 죽은 지렁이를 바라보는 것도 결코 유쾌한 일이 아니다.
 
가끔은 가던 걸음을 멈추고 길 잃은 지렁이를 흙으로 돌려주기도 한다. 흙을 덮어 보도블록을 깔고 콘크리트로 길을 포장해 인간만의 편리함을 추구하는 세상에서 그 혜택을 보고 있는 한 사람으로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런데 차마 맨손으로 지렁이를 덥석 집어들 용기가 나질 않아 주변에 떨어져 있는 나뭇잎이나 나뭇가지를 이용한다. 그때마다 지렁이는 있는 힘껏, 온 몸으로 저항하는데, 참 난감하다. 때로는 그 몸부림에 소스라치게 놀라 지레 포기해 버리기도 한다.
 
아무리 발버둥치는 지렁이도 손바닥에 놓고 가만히 쓰다듬어 주면 금방 진정이 된다고 하지만, 도저히 시도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아직도 나는 지렁이가 징그럽다. 지렁이와 친해지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할 듯싶다.
 
나는 왜 지렁이를 혐오하는 걸까?
 
같이 사는 친구의 지렁이 혐오도 나 못지않게 대단하다. 그녀는 어렸을 때, 아버지께서 낙엽더미 아래서 미끼로 쓸 지렁이를 구하는 모습을 본 이후, ‘낚시는 못하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한다. 나 역시도 지렁이를 낚싯바늘에 꿰어 써야 한다는 사실에 경악했다. 다른 생명체에게 고통을 주는 것도 싫었지만, 무엇보다도 꿈틀대는 지렁이를 맨손으로 만져야 한다는 사실이 소름끼치도록 끔찍했다.
 
농사를 짓는 일조차 지렁이 때문에 주저했다. 땅을 갈다 지렁이가 나오면 어떡하나, 하고 걱정이 되었다. 당연히 비온 후 밖을 나가는 것도 싫었다. 지렁이를 피해 길을 걷는 것도 피곤했고 혹시나 지렁이를 마주하게 되면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나뭇가지만 봐도 지렁이인양 화들짝 놀랐다.
 
나는 왜 그토록 지렁이를 혐오하는 걸까? 궁금하다. 사실 나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다른 생명체에 대한 편견이 없어 크게 위험하지 않으면 손부터 가져갔다. 나비, 사마귀, 새, 쥐, 뱀도 거리낌 없이 손으로 만져보곤 했다. 곤충 애벌레만 해도 꿈틀꿈틀 기어가는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지 두렵지는 않았다. 학교에서 곤충이나 쥐를 보고 야단법석을 떠는 아이들을 위해 그것들을 조용히 밖으로 내보내주는 것도 내 담당이었다. 그런데 유독 지렁이만 예외였다.
 
화분에서 지렁이를 기르다

 
▲ 에이미 스튜어트의 책 <지렁이> (달팽이, 2005)  


지렁이가 위험하지도 않은데, 나의 혐오가 좀 지나치다 싶었다. 혐오감을 떨쳐내기 위해서는 혐오하는 존재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하고, 친하게 지내려고 애쓰는 수밖에 없다.

 
그들은 지저귀거나 울지도 않고, 내달리거나 날아오르지도 않고, 사냥을 하거나 연장을 만들거나 책을 쓰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그에 못지않은 대단한 일을 한다. 그것은 땅의 흙을 소화하고 변형해서 바꿔버리는 일이다. (같은 책, ‘쓰레기를 황금으로’)

어느 해인가, 화분 분갈이를 하다 지렁이 몇 마리를 발견한 적이 있다. 보통 화원에서 구입한 흙에는 지렁이가 없다. 아마도 주워온 화분 속 흙에 지렁이가 있었던 모양이다. 지렁이가 발견된 참에 그냥 키워보자는 생각이 불현 듯 들었다.
 
마침 정토회에서 음식물 쓰레기를 이용해 지렁이를 키우는 지렁이 화분을 분양한다는 이야기도 들었던 참이었다. 난 커다란 화분에 흙을 가득 넣고, 지렁이를 넣고 흙 속에 음식물 쓰레기를 묻었다. 지렁이가 음식물을 먹기나 할까, 반신반의하면서 지켜보니, 정말로 지렁이는 과일껍질과 찌꺼기 채소를 잘 먹어치웠다. 특히 수박을 좋아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기름진 배설물, 분변토를 안겨주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때만 해도 난 지렁이가 무려 4천 5백 종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당연히 음식물쓰레기를 분해하는 데 이용하는 지렁이는 두엄지렁이, 낚시지렁이로도 불리는 ‘줄지렁이(Eisenia fedita)’인지 전혀 몰랐다. 뿐만 아니라, 집에서 지렁이를 어떻게 사육하는지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아무 지렁이나 그냥 키우면 되는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키운 지렁이는 비 오는 날 땅으로 올라오는 ‘붉은 큰 지렁이(Lumbricus terrestris)’였던 것 같다. 다행히도 흙이 가득한 큰 화분에 키운 덕분에 죽지 않고 잘 자라주었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작은 지렁이인줄로 생각했는데, 나중에 음식물로 영양분을 잔뜩 섭취한 지렁이는 놀랄 정도로 통통하고 기다란 몸집을 하고 있었다. 최초로 지렁이를 과학적 연구대상으로 삼았다는 찰스 다윈, 그가 관심 있게 살펴보았던 지렁이도 바로 이 붉은 큰 지렁이였다고 한다.
 
음식물 쓰레기를 열심히 처리해 주던 우리 집 지렁이들은 내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친구  손에 의해 아파트 정원으로 내쫓기고 말았다. 그 지렁이들이 땅 위에서만 살아가는 줄지렁이가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아쉽긴 하지만, 지렁이를 손으로 만지지도 못하고 지렁이에 대한 충분한 지식도 없었던, 자격미달의 사육자 손을 벗어나 땅 속으로 해방된 지렁이들, 그들은 정말 운이 좋았다.
 
어쨌거나 화분에서 지렁이를 키워본 경험 덕분에 지렁이와의 심리적 거리가 좁혀져 혐오감이 한결 줄어든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에이미 스튜어트처럼 양손에 지렁이들을 가득 올려놓고, 또는 단지에 지렁이들을 가득 담아 책상 위에 놓고 그들이 근육을 오므리고 펴는 모습을 바라보며 기분전환을 하거나 그 아름다움에 심취할 정도로 지렁이와 친해지지는 못했다.
 
그래도 지금은 지렁이가 이 땅을 위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잘 이해하고 있고, 그들과  친해지려고 애쓰는 중이다.
 
인간보다 더 중요한 존재, 지렁이

 

“지렁이에게는 몸의 일부가 새로 자라게 하는 능력, 상처가 저절로 낫게 하는 능력이 있다. (...) 지렁이는 자기 몸 전체의 상당 부분을 다시 자라게 할 수 있는 데 우리는 왜 손가락 정도도 다시 나게 할 수 없을까? 그러다 나는 만물의 원대한 계획으로 볼 때 지렁이의 생존이 우리보다 더 중요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아픈 결론을 내려야 했다.” (같은 책, ‘그들은 보지도 듣지도 못하니’) 
 
▲ 메리 아펠호프 <지렁이를 기른다고?> (시금치)  
 
혹시 밭을 갈다 지렁이의 꼬리를 자른다 해도 걱정할 필요는 없다. 지렁이는 다시 온전히 꼬리를 되찾을 만큼 강한 자생력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 자생력은 땅을 지키는 존재로서 자연적 필요에 부응한 것이라는 데 공감한다.
 
땅 속 세계의 거대한 생명체인 지렁이는 땅 속 생활에 꼭 맞아떨어지는 몸을 타고 났다. 땅 속에서 살아가야 하니, 눈도 폐도 필요 없다. 그래서 길을 잃지 않을 정도로 빛에 민감하고, 촉촉한 피부를 통해 호흡한다. 몸은 흙을 담고 내보내기에 완벽하다.
 
지렁이의 소화관을 거쳐 나온 배설물을 ‘분변토’라고 부르는데, “분변토에는 수천 마리의 세균과 효소, 소화되지 않은 식물과 동물성 퇴비 찌꺼기 등이 포함”되어 있다고 한다. 지렁이는 하루에 자신의 몸무게만큼 분변토를 생산해내는 부지런한 일꾼이다.
지렁이가 먹고 배설하며 만들어내는 분변토는 식물에게 풍부한 영양을 제공한다. 지렁이의 도움을 받아 집안의 음식물 쓰레기를 식물의 영양분으로 바꿔 우리 인간도 물질과 에너지의 자연스런 생태순환에 참여할 수 있다면 멋진 일 아닌가!
 
요즘처럼 더운 날, 음식물 쓰레기통 주변은 악취가 진동한다. 머리가 아플 지경이다. 난 가끔 집집마다 지렁이 화분이나 상자를 갖춰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하는 상상을 해 보곤 한다. 물론 그전에 지렁이를 이해하고 혐오하는 마음부터 버려야 할 것이다. 음식물 쓰레기 줄이기에는 동참해도 지렁이 키우기에는 적극 반대라는 친구를 도저히 설득하지 못해서, 당분간 나도 지렁이의 도움을 구하긴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원래 쓸모없는 쓰레기를 만들지 않는다는 자연생태계를 갖은 쓰레기로 더럽히고 있는 우리 어리석은 인간에게 지렁이의 도움은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해 보인다. 친해지려고 노력해야 하는 쪽은 오히려 우리 인간이다.
 
언젠가 나도 지렁이를 사랑스럽게 쓰다듬어 줄 수 있을까?  

[이경신의 도서관 나들이]
어머니의 죽음을 떠올리며 | 왜 지금, 용산참사를 기억해야 하는가?

댓글
댓글쓰기 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