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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숙영의 Out of Costa Rica (11)  * 코스타리카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필자 공숙영은 현지에서 마주친 다양한 인상과 풍경을 기록하고자 합니다. 
 
중남미의 ‘낙태’- 현실과 전망②
 
미주인권위원회(Inter-American Commission on Human Rights)에 따르면 멕시코의 소녀 파울리나가 피해자인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파울리나 델 카르멘 라미레즈 자친토는 14살에 주거침입강간의 희생자가 되었다.

사건은 즉시 정부의 담당부서인 가정폭력 및 성범죄 특별부에 보고되었다. 신청인들이 주장하기를 정부가 파울리나나 파울리나의 어머니에게 응급피임약이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아서 결국 파울리나는 강간으로 인해 임신을 하게 되었고, 파울리나가 거주하는 주의 형법은 강간에 의한 임신의 경우에 인공임신중절을 허용하므로 파울리나는 정부의 인가에 따라 합법적인 임신중절을 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파울리나 측이 임신중절 절차를 밟겠다고 일관되게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정부 및 병원의 담당자들은 임신중절 절차와 결과에 대해 잘못된 정보를 알리는 등 파울리나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정도의 심리적이고 행정적인 각종 방해를 일삼았다.
 
결국 임신중절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진 설명: 낙태 비범죄화의 날, 멕시코시티, 2009년 9월 28일 by ALFREDO ESTRELLA  ©AFP/Getty Images]

미주인권위원회와 파울리나 사건 
 
미주인권위원회는 미주대륙 인권보장을 위해 1959년에 설립된 기구로서 이에 가입한 국가의 개인이나 단체는 인권침해를 이유로 국가를 상대로 하여 소송과 유사한 구제절차를 이 기구에 신청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한 국가 내에서 재판을 다 받았는데도 권리구제가 되지 않았거나 또는 불가피하게 재판을 받을 기회를 놓쳤을 경우, 그 국가의 개인이나 단체는 자국 밖에서 사건을 회부할 수 있는 절차의 통로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 셈이니 이런 기회를 제도적으로 보장받는 것은 상당한 의미가 있습니다.
 
현재 중남미 국가들은 대부분 미주인권위원회 가입국가로서 멕시코도 가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파울리나 사건은 멕시코 국경을 넘어 미주인권위원회에 제기되어 다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미주인권위원회에서 사건이 다뤄지면 한 국가를 벗어나 그 지역 내의 쟁점이 되어 폭넓게 논의되고 해당 정부에게는 압력이 커지기 때문에 인권운동가들은 이 절차를 통해 권리를 침해받은 개인과 함께 또는 대리하여 권리구제를 위해 싸움과 동시에 사회적인 운동의 기회를 만들 수 있습니다.
 
1999년에 발생한 파울리나 사건도  두 개의 재생산 권리(reproductive rights) 단체들이 파울리나를 위해 신청인으로 나서서 2002년에  절차를 신청한 것이었습니다.
 
세계 여성의 날에 신청한 파울리나 사건
 
이 사건 신청서가 미주인권위원회에 접수된 날은 2002년 3월 8일입니다. 그 당시의 기사를 찾아보니 신청인인 인권단체들이 그 날이 세계 여성의 날이라서 택일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특히 그 해의 여성의 날에 미주인권위원회의 여성인권 특별조사관이 유엔과 아프리카인권위원회와 사상 최초의 공동선언을 발표하기로 예정되어 있어서 더욱 의미심장하였습니다.
 
이 선언문에는 국제사회가 여성차별 및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방지하고 처벌 및 근절하기 위해 기준을 확립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국가들은 아직도 국내에서 이러한 기준을 실행하기 위해 필요한 방도를 강구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고 합니다.
 
또한 이 기사는 미주인권위원회에 접수된 사건의 경향을 보면 성폭력 사건은 계속 증가세였던 반면 성교육, 임신중절, 피임과 같은 쟁점에 관해서는 지금까지 사건 접수가 거의 없었지만, 그간의 사회변화로 보건대 앞으로는 점점 더 많은 사건이 신청될 것으로 예상된다는 미주인권위원회의 관계자의 말을 전하고 있습니다. 파울리나의 경우도 바로 그 예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파울리나의 임신과 출산

 

미주인권위원회의 사건 기록에는 나와 있지는 않지만 당시 언론기사를 찾아 이 사건의 정황을 더 살펴보면, 파울리나가 언니네 집에서 언니와 어린 두 조카들과 함께 있던 날 두 명의 남자가 집에 침입하여 언니는 재갈을 물린 채 결박당해 바닥에 엎드려 있는 사이 파울리나는 조카들 앞에서 칼로 위협당하면서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사건발생 후 파울리나는 병원에 가서 검진을 받아 의사가 성폭행 사실을 확인해주었고, 몇 주가 지나자 파울리나의 임신 사실도 확인되었으며, 성폭행과 임신 간의 인과관계도 명확했습니다.
 
멕시코는 미국처럼 합중국으로서 주 단위로 법이 있는데, 대개 강간이나 산모의 건강, 태아의 기형 같은 경우에는 임신중절을 허용하고 어떤 주에서는 사회경제적 이유로도 임신중절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파울리나가 사는 주의 법은 임신이 강간의 결과이면 임신기간의 첫 삼개월 안에 임신중절을 허용합니다. 합법적으로 임신중절을 받을 수 있는 권리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파울리나는 임신중절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임신중절을 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기를 종용했습니다. 우리는 올바른 정보를 얻을 권리가 있고 선택할 권리가 있는데도 그들은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면서 조작적이고 편파적인 정보를 주면서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파울리나의 엄마 마리아 엘레나는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결국 파울리나는 아이를 낳아 십대에 엄마가 되었고 파울리나의 엄마가 그 아이를 키웁니다. 커서 변호사가 되고 싶다는 파울리나는 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의 아이를 “동생처럼” 사랑한다고 말했습니다. 
[사진 설명: 임신중절 합법화에 반대하는 시위. 멕시코시티. 2007 by Eduardo Verdugo © Associated Press]

파울리나의 임신중절 실패기
 
그렇다면 파울리나가 임신중절의 기회를 놓치게 된 과정에 관해 미주인권위원회의 사건기록을 통해 좀더 상세히 알아보겠습니다.
 
사건개요에 나오듯이 사건발생 직후 관계기간에 신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우선 그들은 응급사후피임약이 있다는 사실을 파울리나 측에게 알려 주지 않았습니다. 파울리나의 임신이 확인되자 임신중절이 최선이라고 여긴 파울리나의 엄마 마리아 엘레나는 주 정부로부터 공립병원에서 적절한 의료조치를 받을 수 있는 인가를 받아내었습니다(이것도 단번에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울리나는 그 병원으로부터 필요한 조치를 받지 못한 채 시간을 보내야했습니다. 병원은 마취전문인력이 없다, 산부인과 의사들이 휴가 중이다, 라는 이유를 대면서 시술을 연기했고, 파울리나는 시술도 받지 못하고 일주일을 병원에서 보내면서 심지어 금식을 강요당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결국 파울리나의 엄마 마리아 엘레나는 다시 주 정부에 가서 시술을 받기 위한 조치를 얼른 취하게 해 달라고 촉구하여 동일한 내용의 인가조치가 다시 내려졌습니다.
 
그러나 그 직후 주 정부의 법무장관이 임신중절을 단념시키려고 파울리나 모녀를 성당 사제에게 데려갔습니다(사건기록에는 안 나와 있지만 언론기사에 따르면 임신중절을 하면 파문을 당한다는 ‘위협’을 받았다고 합니다).
 
파울리나가 시술을 받으려고 병원에 재입원하고 나서는 병원 임원의 초청으로 두 여성이 찾아와 파울리나 모녀에게 인공중절과정을 담은 비디오를 보여주기도 했습니다(언론기사는 죽은 태아의 끔찍한 영상을 보게 강요했다고 나와 있습니다).
 
게다가 시술 직전에 의사가 파울리나의 엄마 마리아 엘레나에게 임신중절을 받으면 불임의 위험이 초래되고 치명적인 빈혈이 올 수 있다는 부정적인 의견을 심각하게 전하면서 만일 파울리나가 시술의 결과로 목숨을 잃는다면 그 책임은 엄마에게 있다고까지 하였습니다.
 
결국 파울리나의 엄마는 임신중절시술을 중지해 달라고 요청하였습니다.
 
화해협정의 성립과 승인 
 
신청이 접수된 날로부터 꼭 만 4년하고도 하루가 지난 2006년 3월 9일, 그러니까 그해의 세계 여성의 날 바로 다음 날에 사건당사자들은 화해협정을 체결하였습니다.

 
이 때 화해협정이란 추상적으로 화해하고 용서하겠다는 식의 애매모호한 합의가 아니라 당사자 간에 이미 이행되고 양해된 사항을 분명히 하고 장래에 이행할 구체적인 화해조건을 정하는 것을 내용으로 합니다.
 
화해협정의 내용을 협상하고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정부와 신청인들 간에 협의한 결과, 주 정부는 의료비와 소송비용을 포함하는 금전적 손해배상뿐만 아니라 파울리나와 파울리나의 아이에게 사회보장기관이 제공하는 의료서비스, 전문가의 심리치료, 학비를 보장할 의무를 지기로 하였습니다.
 
협상 기간 동안 주 정부는 이미 일정한 금액의 손해배상을 파울리나 측에게 지급하였고 그 지방의 주요 신문들에 파울리나 사건에 대해 정부가 책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종의 사죄광고도 실었습니다.
 
또한 화해협정에는 신청인들이 지적한 입법의 결여(합법적으로 임신중절을 할 수 있는 여성들이 권리를 행사하기 위한 절차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와 관련하여 제도적 개선을 위해 주 정부가 주 의회에 법안(신청인들이 제안하고 정부가 합의한)을 제출하고 통과되도록 노력할 것이라는 내용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화해협정은 멕시코 연방정부에게도 가정폭력 사건에서의 의료지원기준의 개선 및 개정을 위해 그 시행을 평가하고, 여성에 대한 폭력을 방지하기 위한 국가정책 수행의 성과를 측정하기 위한 전국적 차원의 조사를 실시하는 것과 같은 광범위한 의무를 부과했습니다.
 
또한 멕시코 연방정부는 멕시코 전역의 임신중절을 다루는 각종 자료 및 보고서 등 일체의 자료를 검토하여 그 결과를 신청인들에게 제공하기로 하였습니다.
 
화해협정이 성립된 때로부터 일 년 후인 2007년 3월 9일 미주인권위원회는 화해협정이 성립되기까지 양 당사자가 쏟은 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화해협정의 성립을 승인하고 멕시코 정부가 화해조건과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는지 계속 감시하겠다는 결정문을 발표하였습니다. 
[사진 설명: 임신중절 합법화에 찬성하는 시위. 멕시코시티. 2007 by Dario Lopez-Mills  ©Associated Press]

파울리나 사건의 성과와 한계

 
비록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신청인인 인권단체들이 정부로부터 얻어낸 성과는 그 의미가 꽤 커 보입니다. 이 사건절차를 통해 단지 파울리나 개인을 위한 배상과 보상에 그치지 않고 제도의 개선과 정책의 추구라는 거시적 차원의 진전을 이끌어내었습니다.
 
한편 파울리나 사건의 한계도 동시에 지적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사건의 쟁점은 법으로 인정된 예외적인 임신중절의 경우에 효과적인 대책을 보장하라는 것이지 임신중절의 권리 자체를 인정하라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성과와 한계를 동시에 안고 있는 가운데 파울리나 사건은 지난번에 소개한 로시타의 경우와 비교해보면 결과는 다르지만(로시타는 임신중절에 성공했고 파울리나는 임신중절에 실패하므로) 구조적인 동일성을 갖고 있습니다.
 
미성년자의 임신이고,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이라서 예외적으로 임신중절이 합법화되어 있는데도 정부와 교회가 개입하여 방해와 간섭을 하며, 결국 여성인권단체가 나서서 사태를 해결해냅니다.
 
그런 의미에서 파울리나 사건은 로시타 사건과 더불어 중남미에서 발생하는 여성에 대한 복잡한 폭력의 고유한 맥락을 보여준다고 하겠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얼마나 많은 또 다른 로시타와 파울리나가 끔찍한 폭력의 결과로 원치 않은 임신을 하게 되어 육체적 정신적 고통과 불안에 시달리고 있을지 상상하기조차 싫습니다. (다음 회에 계속) 이전 기사 보기-> 로시타의 임신과 파문: 중남미의 ‘낙태’ 현실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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