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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이웃이 유방암 수술을 받고 퇴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병문안을 갔다. 암이 진행되어 임파선을 모두 제거했다고 하니, 앞으로 그녀가 겪을 고통이 적지 않을 듯하다. 암이 전이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정신적 불안도 힘들겠지만, 임파선이 없어 죽기 전까지 감내해야 할 몸의 불편함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의학적 질병’ 상태와 ‘개인적 통증’ 경험의 간격
 

"화해, 나랑"(2008) ©일다- 천정연 作

일상적으로 몸의 고통을 껴안고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큰 병에 걸려 죽음을 늦추기 위해 불가피하게 겪어내야 하는 고통도 그렇지만, 잔병들로 인한 고통, 혹은 아무런 의학적 질병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를 실제로 괴롭히는 고통도 모두 힘들기는 마찬가지이다.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를 하며 자라온 내 경우는 어느 정도 몸의 고통에 익숙해져 있다. 때로는 강하게, 때로는 약하게 지속적으로 찾아오는 고통이 점차 익숙해지고 있다고 해도, 여전히 괴롭다. 나이가 들면서 확실히 고통의 부위도 다양해지고, 고통의 정도도 심해지는 듯하다. 통증의 원인은 대체로 신체 여러 기관의 염증으로 인한 것이고, 심각한 질병에서 기인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몸의 고통은 일상생활을 제대로 해낼 수 없을 만큼 무시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그런 나를 놓고 “잔병치레를 하는 사람은 평소 건강한 사람보다 오래 살아” 라는 말을 툭 던지곤 했는데, 그 말이 위로가 되지는 않았다. 통증으로 인한 불편, 피로, 고통은 일상생활을 지속할 자신을 잃게 할 정도로 심각했다. 때문에 이렇게 아픈 내가 과연 오래 살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지만, 오래 살 수 있다고 하더라도 내내 앓으면서 살아가야 하는 것이 무슨 좋은 일일까 싶었다.
 
나처럼 사소한 질병들을 가지고 있거나, 의학적 질병이 없는 경우라 하더라도 여러 신체증상으로 곤란을 겪으며 살아가는 사람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실제로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는 경우에도, 3분의 1정도는 치료받아야 할 질병이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하니 놀라운 일이다.
 
아무튼 의학이 판단하는 질병 및 통증과, 병원 문을 두드리는 이가 경험하는 통증은 차이가 난다는 것이다. 요즘에는 병원에서도 통증관리를 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한동안 의사는 환자가 겪는 주관적 통증에 무심해왔다. 의학적 차원에서 질병이 없다면, 통증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그 간격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나만해도 예전에는 몸이 아프면 바로 병원도 찾고 검진도 받았다. 하지만 나의 통증과 무관하게 결과는 심각한 질병이 아니거나 ‘이상 없음’일 때가 많았다. 이상 없다는 병원의 판정을 듣기 위해 돈을 지불했을 뿐, 나의 고통이 줄어들지는 않았다. 또 약을 처방 받고 복용하기도 했지만, 그 약이 통증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하지도 못했다. 그야말로 나의 통증은 의학적으로 검증되지 않는 철저히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이해 불가능한 무엇이었다. 의학이 설명해주지 않는 것이다 보니, 나조차도 나의 통증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러다 한 치과의사로부터 내 신경감각체계가 다른 사람보다 예민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내 통증의 원인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개개인의 감각신경계는 차이가 나지만, 병원은 개개인의 특성을 고려한다기보다 평균적으로 환자를 대하고 있기 때문에 나같은 사람의 통증은 이해 받기 어렵다.
 
몸의 통증과 맞서기보다 어울려 살기
 
2년 전 겨울, 심한 설사로 응급실에 실려갔다 돌아온 이후부터 수개월간 계속된 심각한 통증만 해도,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다. 의학적으로 특별한 이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를 적시고도 방바닥이 흥건해질 만큼 밤마다 식은땀이 흐르고, 심장고동과 맥박이 갑자기 빨라지고 숨이 가빠오며 체온이 떨어지는 등,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병원에서 처방해주는 약은 오히려 더 상태를 나쁘게 했을 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체중도 줄어들고 집 밖을 다니기도 어려울 정도로 몸이 쇠약해져 일상생활을 계속 해나갈 수 없었다. 중병에 걸린 사람처럼 고통 받고 있었지만, 아무도 제대로 도움을 줄 수 없었다. 고통은 고스란히 내 몫이었다.
 
다행히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1년이 지나면서 평범한 일상생활도 가능해졌다. 하지만 그 통증에서 지금도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 통증은 강약을 반복하며 내 생활 속에 진득하게 파고들어 자리잡은 듯하다.
 
그렇게 제자리인양 또아리 틀고 있는 통증을 불청객, 침입자 취급하며 내쫓으려 애쓰는 성급함이나 발을 동동 구르는 초조함은 확실히 예전에 비해 줄어들어 좀더 느긋해지긴 했다. 통증도 나이 들어가는 것만큼 자연스러운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어서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더불어 살아야 할 불편한 손님 정도로 여기려 한다.
 
아무튼 그 손님맞이에 있어 나름의 요령을 터득해가고 있다. 오랜 시간 통증과 맞서는 동안 현대의학이 적절한 도움의 손길을 건네주지 못한 까닭에, 스스로 체득한 방법들이 하나 둘 늘어갔다. 통증이 있을 때마다 숨을 고르고 복식호흡에 집중하는 것, 천천히 산책을 하거나 다른 일에 시선을 돌리면서 통증을 무시하는 것, 요가나 체조와 같은 가벼운 움직임을 통해 통증을 조절하는 것, 자가 마사지를 해 보는 것, 음식을 조절하는 것 등.
 
가장 최근에 시도하고 있는 것은 바로 ‘명상’이다. 내 몸의 통증이 안겨다 주는 괴로움은 현재 내가 겪고 있는 통증 자체에서 오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고통에 이어 도래할 미래, 즉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그리고 앞서 반복해 온 통증경험으로 인해 각인된 고통의 기억에서 유래하기도 한다. 그래서 과거와 미래로 향하는 자아의 움직임을 정지시키며, 현재의 나와도 적절히 거리 두기를 함으로써 통증을 과장하지 않는 연습을 해보려 하는 것이다.
 
의학의 발달로 인해 ‘통증의 부재’를 건강으로 여기는 경향이 지배적이지만, 건강이 통증과 대립해 있다는 생각은 지혜로운 것 같지 않다. 늙어가는 것, 노화과정 속에서 통증을 경험하는 것은 생명체로서 자연스러운 삶의 과정이라는 생각이야말로 병원이 해결해주지 못하는 통증을 조절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날씨가 추워져서 인지 이번 주에 들어서는 몸 곳곳으로 염증이 심해지고, 그만큼 통증도 심해지고 있다. 그래서 새벽마다 통증으로 잠을 깰 뿐만 아니라, 낮 시간에도 약한 통증이 이어져 피로로 지칠 때가 많다. 그렇다고 해도 나의 일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며, 오히려 통증을 다스려 평소보다 더 많은 일을 해내기까지 했다.
 
지금껏 몸의 고통은 내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쳐왔다. 그것으로 분명 잃은 것도 있었지만, 상실한 것 이상으로 얻은 것이 있었다면 몸을, 몸과 정신의 관계를 좀더 깊이 들여다 볼 기회를 얻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좋은 삶으로 나아가는 방향을 제대로 잡아나갈 수 있었다. 암 때문에 변화의 길목에 선 이웃집 그녀도 좋은 삶을 향한 새로운 길을 발견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일다 www.ildaro.com)

* 함께 듣자. 김영동의 명상음악(禪 II) 서울음반
 
[이경신의 철학하는 일상] 죽음이 두렵지 않을만큼 잘 살고 있나? | 우리는 왜 옷을 입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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