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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전범기업 연속폭파사건…여성 서사로 조명하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폭파음의 잔향으로 맺어진 새로운 관계


※ 가시화되지 않았던 여성들의 자취와 기억을 공적 담론의 장으로 건져 올리는 여성사 쓰기, <페미니스트 연구자들이 발굴한 여성의 역사> 연재는 한국여성재단 성평등사회조성사업 지원을 받아 진행됩니다. [편집자 주]


김미례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East Asia Anti-Japan Armed Front, 2019) 스틸컷


김미례 감독의 다큐멘터리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 8월 20일 전국에서 개봉하게 되었다. 필자는 2019년~2020년에 걸쳐 감독과 함께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공동체 상영과 토론회를 기획하고 그 여정을 기록해 왔고, 지금도 기록 중에 있다. (심아정)


일용직 노동자들이 전해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이야기


이 영화의 첫 장면은 일본 최대의 인력시장, 오사카(大阪)의 가마가사키(釜ヶ崎)에서 시작된다. 김미례 감독의 전작들, 특히 <노가다>(2005)와 <외박>(2009)을 본 관객이라면 ‘노동’ 문제를 다루는 연속성을 감지하며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김미례 감독이 주목하는 것은 노동하는 ‘인간’이다. <노가다>는 건설 일용노동자의 삶을 살았던 그녀의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건설 현장을 따라다니며 촬영하기 시작했고, 자료 조사 과정에서 한국의 건설 산업이 갖는 다단계 구조가 일본 제국주의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가마가사키를 찾아갔고, 그곳에서 처음으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에 대해 전해 듣는다.


노동의 문제는 그렇게 제국의 문제로 이어졌다. ‘전후’ 일본의 소시민적 삶의 안온한 자리는 하청의 하청의 하청이 있는 다단계의 끝, 그 저변을 살아내는 자들의 노동 위에서만 가능한 것이었다.


2006년, 일본 전역의 인력시장을 돌며 <노가다>(2005) 공동체 상영회를 하던 중, 감독은 어떤 노년 관객에게 “일본 노가다 운동의 전신은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이다. 그들의 영화를 만들어주었으면 좋겠다”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해 겨울, 도쿄에서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수십 년 간 지원해온 사람들을 만나보았는데 자신의 역량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기획을 접었다.


그 후, 두 편의 다큐멘터리 <외박>(2009)과 <산다>(2013)의 작업을 마쳤다. 그리고 2014년, 한국 사회의 커다란 트라우마가 된 세월호 사건을 겪으며 국가가 지닌 폭력성과 책임의 문제를 마주하게 되었다. 국가라는 틀 안에 사는 한 인간의 문제에 대해 고민하게 된 것이다. 김미례 감독은 오랜 동료인 역사학자 후지이 다케시(藤井たけし)의 제안과 협력으로, 결국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을 제작하게 되었다.


1974년 8월 30일, 도쿄 한복판에서 터진 시한폭탄


“그들을 정당화시키려고 하는가? 모른다

 그들의 폭력을 지지하는가? 모른다.

 당신의 관점은 무엇인가? 모른다.”

(김미례, 편집중에, 낡은 질문들 속에 갇혀서 괴롭던 순간에. 2017년 6월)


김미례 감독 다큐멘터리 영화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East Asia Anti-Japan Armed Front, 2019) 포스터


1974년 8월 30일 정오. 도쿄의 미쓰비시중공업 본사에 설치된 시한폭탄이 터져 8명이 죽고 376명이 다쳤다. 사건이 발생하고 3주가 지나자,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늑대부대라는 이름으로 성명서가 발표되었다. 4명의 늑대부대원들은 신대동아공영권을 책동하는 제국주의 침략기업과 식민자들을 향해 “해외활동을 정지하고 ‘발전도상국’에 있는 모든 자산을 지금-당장 포기하라”고 경고했다.


‘전후’ 일본 사회에서 일본인 자신이 일본인들을 향해 식민지 책임을 이토록 강렬하게 촉구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듬해 체포되기 보름 전까지도, 그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기반으로 성장해 전후에도 동아시아 여러 나라를 경제적으로 침략해 온 전범기업들에 대한 폭파를 이어갔다. 홋카이도와 오키나와라는 일본 ‘안’의 식민지를 포함한 일본의 식민지 침략과 천황의 전쟁 책임을 묻고, ‘전후’ 일본의 아시아에 대한 경제적 신식민지와 베트남전쟁 특수(特需)를 비판했던 그들은 1975년 5월 19일, 일제히 체포되었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 연속폭파사건 타임라인을 보면 늑대, 대지의 엄니, 전갈 세 부대가 모두 관여한 작전이 있다.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에 기소다니(木曽谷) 발전소를 건설하기 위해 중국인과 조선인에게 혹독한 노동을 강요하고, 1975년 당시에도 말레이시아에서 댐을 건설하는 데 열을 올리고 있었던 하자마구미(間組)에 대한 공격이다. 과거 전범기업의 수탈이 현재진행형의 문제이며, 지금-당장 멈추어야 한다는 절박함을 드러내는 작전이었다.


2014년 겨울, 다큐멘터리 출연진 섭외가 시작되었고, 2016년부터 본격적인 촬영이 시작됐다. 가장 어려웠던 점은 사건 당사자를 만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고 한다. 여전히 복역 중인 이들이 있었고,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몇 번인가 편지를 주고받으며 생각과 마음을 나누었던 대지의 엄니 부대 에키타 유키코는 2017년에 출소하여 섭외되었지만, 그녀의 출소 두 달 후 다이도지 마사시는 도쿄구치소에서 다발성 골수암으로 세상을 떠나 끝내 만날 수 없었다.



밝혀진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의 부대원은 총9명. 다이도지 아야코와 사사키 노리오는 국제 지명수배 중이며, 마스나가 도시아키는 사형수로 지금도 수감되어 있다. 사이토 가즈는 체포되었을 당시 청산가리를 삼켜 사망했고, 구로카와 요시마사는 무기징역으로 복역 중이며, 우가진 히사이치는 1982년에 체포되어 18년을 구형받고 2003년에 출소한 후 지금까지 재판투쟁과 관련된 신문, <구원(救援)>을 펴내고 있다.


1960년대 전공투 운동과 엘리트 권위를 버린 사람들 


동아시아반일무장전선은 이른바 전공투(全共闘) 세대다. 1960년대 후반, 일본 대학가는 대학생 수의 급증으로 대규모 강의가 늘고, 해마다 인상되는 등록금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편의시설 등으로 누적된 불만이 터져 나왔다. 당시 일본 최대 규모의 대학이었던 일본대에서 1968년 5월, 전학공투회의(全学共闘会議)가 만들어졌다. 한국에서 ‘전공투’에 대한 이미지는 헬멧과 쇠파이프, 나부끼는 깃발과 불타는 건물 등으로 전형화되어 있다. 그러나 천 명이 넘는 학생이 학교 건물을 점거하고 숙식을 함께 하며, 대학이나 제도권 교육에서는 배울 수 없는 내용으로 가득한 자주적 커리큘럼에 따라 스스로 구체적인 대안적 앎의 공간을 만들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적어도 전공투 초기에 바리케이트 안에서 열린 토론과 회의 과정은 대표를 두지 않고 자기 의지로 참여하는 ‘직접민주주의’의 실험장(場)이 되었다. 방침은 미리 정해져 있지 않았고, 기나긴 회의와 토론을 거쳐 서로를 설득하며 결정했다. 학생들은 학교 측에 ‘대중적 단체교섭’을 요구했는데, 학생 대표 몇몇이 학교 당국과 교섭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학생들이 참여한 가운데 교섭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성사된 대중적 단체교섭에 무려 4만여 명의 학생들이 참여하여 12시간동안 교섭을 진행하였고, 이사진 총사퇴, 회계 공개, 집회자유의 보장 등을 약속 받았지만, 국가권력의 개입에 의한 대대적인 탄압으로 결국 흐지부지되고 만다.


동경대의 경우, 발단이 된 것은 의과대학의 인턴들이 겪는 위계 구조와 노동 수탈의 일상화였다. 7월에는 야스다 강당을 점거하였고, 그 속에서 동경대 전공투가 결성되었다. 그들 또한 지도부 없는 운동을 지향했다. 엘리트로서의 ‘자기부정’이 운동의 중요한 모티브가 되어, 자신들도 편입되어 있는 사회적 권력 관계를 직시하고 그것을 거부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전공투 운동에서 중요한 것은 ‘투쟁의 실패 이후, 그들이 어떤 운동으로 나아갔는가’라는 물음이다. 대학으로 돌아가 엘리트가 된 사람들도 있지만, 법과 시민사회라는 안전한 자리로 돌아가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대학 밖에서 인력시장운동, 환경운동, 나리타공항건설 반대운동, 우먼리브 운동 등 각자의 현장을 만들어 나름의 방식으로 싸움을 이어갔다. 바리케이트는 해체되었지만, 전공투를 계기로 그 전까지는 권위에 눌려서 나오지 못했던 다양한 목소리들이 나오게 되었다.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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