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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일의 점거농성 ‘도로공사에 우리 존재 보여주려고’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의 투쟁이 남긴 것⑤ (시야/기록노동자)


작년 6월, 해고된 톨게이트 요금수납원들이 서울톨게이트 캐노피에 오르면서 이들의 실태가 알려졌다. 공공부문이 얼마나 많은 용역 노동자를 쥐어짜며 운영해왔는지 폭로하면서, 한국도로공사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217일간 농성했다. 도로공사는 ‘전원 직접고용, 2015년 이후 입사자는 (근로자지위확인소송) 패소 시 직접고용 해제’안을 발표했고, 올해 2월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농성을 해산했다. 하지만 싸움이 끝난 건 아니다. ‘공공부문 정규직화’라는 과업을 둘러싸고 사회에 큰 화두를 던진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투쟁을 돌아보며, 그 의의와 사회적 과제를 짚는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김천에 있는 한국도로공사 본사 건물로 진입한 톨게이트 요금수납 노동자들. 경찰 진압이 임박하자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 팔짱을 끼고 누웠다. (점좀빼 제공)


김천 도로공사 본사 건물로 뛰어간 요금수납원들


9월 9일, 그날도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대법원에서 ‘한국도로공사’가 요금 수납원에 대해 직접고용 의무가 있다‘고 결론을 내린 후, 한국도로공사 측이 대법원의 판결을 받은 사람들만 직접고용하겠다고 발표한 날이다. 이강래 사장을 만나서 결론을 내야 했다.


“우리 모두 이강래 때문에 뿔나서, 모자 벗고, 운동화 끈 묶고, 달리기 잘하는 사람은 앞에서 달리고, 못하는 사람은 뒤로 가고, 도로공사 정문 앞에 버스 세우자마자 다 달려나갔어. 본사 앞으로 갔는데, 회전문을 막고 있는 거야.”(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조미경, 18년 차, 진안영업소)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한국도로공사 김천 본사 정문 회전문 앞에 모여들었다. 문이란 문은 다 잠겼고, 건물 안에서 도로공사 직원들이 몰려나와 진입을 막고 있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회전문을 꾸역꾸역 밀어대자 조금씩 밀리기 시작했다.


“도로공사 구사대(노동운동을 진압하기 위해 회사가 시키는 대로 따르는 사람들)가 문이 넘어올 거 같으니까 본능적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할 거 아니에요. 구사대가 뒤로 물러서더라고요. 피하면서 문이 열리면 어떻게 되겠어요? 압사당할 수 있잖아요. 정말 문이 확 열리면서 제가 깔리는 상황이었어요. 아… 압사가 이런 거구나 하면서 기어서 나왔어요.”(경남일반노조 톨게이트지회 김연정/가명)


회전문이 열리자 노동자들은 사장실이 있는 20층을 향해 무조건 달렸다. 굳게 닫힌 개찰구는 높이뛰기 해서 넘었다. 죽을힘 다해 계단을 뛰어올랐더니 ‘20’이란 숫자가 보였다. 복도로 연결된 비상문은 잠겼다. 경찰이 밀고 올라왔다. 마실 물도 없고, 화장실도 가지 못한 채 꽉 막힌 밀폐공간에서 서른아홉 명의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끌려가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치면서 싸웠다.


“경찰들이 우리를 오도 가도 못 하게 포위했어요. 우리를 끌어내려고 하니까, 우리 몸에 손대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모두 상의 탈의했어요. 처음엔 남자 경찰들뿐이라서 다 등을 돌리고 서 있게 했고, 나중에 여자 경찰들이 올라오더라고요. 몇 명은 호흡곤란이 와서 구급차에 실려 나갔고, 남은 사람들은 안 내려간다고 버티는데… 깜깜해지니까 노조에서 ‘거기서 오래 못 버티니까 내려오라’고 연락이 오더라고요.”(경남일반노조 톨게이트지회 박재은/가명)


한국도로공사 구사대와 경찰들이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둘러싸고 밀어붙이고 있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김천 본사 2층 로비에서도 도로공사 직원과 경찰들에게 둘러싸인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거센 저항을 하고 있었다. 밤늦게까지 싸우다가 잠시 쪽잠을 자고서 다음 날 새벽부터 다시 몸싸움이 시작되었다.


“경찰이 사람 하나를 갑자기 덮쳐서 땅바닥에 탁 내리치더니 양쪽에서 사람을 둘러싸 가지고 질질 끌고 가는 걸 제가 봤어요. 우리는 그 사람을 놓치지 않으려고 발을 붙잡았는데, 경찰은 팔과 몸통을 잡고는 질질 끌고 가더라고요. 아… 진짜 끔찍했어요. 우리, 뭐 잘못한 거 없잖아요. 고용불안 때문에, 마음 편히 일하고 싶다. 최저임금만 받더라도 해고 걱정 없이 사는 것밖에 원하는 게 없는데 경찰이 우리를 짐승 취급하는 걸 보고 놀랐죠.”(재은)


경찰은 토끼몰이를 하듯 톨게이트 노동자들을 구석으로 몰아내면서 격리시키고 감금했다. 끌려나가지 않기 위해서 여성 노동자들은 상의를 벗고 저항했다. 서로 어깨를 붙이고 팔을 엮어서 몸을 단단히 묶었다. 쫓겨나가지 않기 위해 자신의 몸을 던졌고, 절박한 순간에도 동료를 지켰다.


“우리가 노동조합을 하는 게 이렇게 비참한 일인가? 노동자로 사는 게 비참한 일이어야 하나? 나도 문재인 뽑았는데, 문재인 정권은 노동자의 편이라고 믿었는데, 우리 편 되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설마 우리를 마지막까지 방치할까.”(김연정)


노동자의 편이라고 믿었던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신뢰는 농성이 길어지면서 점점 엷어져 갔다.


상의 탈의 시위와 점거 농성, 건물 밖에선 텐트 농성


한국노총 소속 톨게이트 노동자 300여 명은 경찰의 포위를 뚫고 본사 건물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지만, 정문에서 텐트 농성을 시작했다. 서울톨게이트와 청와대 앞에서 텐트를 치고 노숙농성을 했던 경험을 살렸다. 한편 민주노총 소속 톨게이트 노동자 300여 명은 김천 본사 2층 로비를 점거하는 데 성공했고, 건물 2층 로비는 후문으로 연결된 위치여서 안팎으로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김천 본사를 점거하게 된 셈이다.


도로공사 직원과 경찰공권력은 김천 본사를 포위한 거대한 노동자집단을 다 끌어낼 수는 없었다.


건물 안에서는 사태가 좀 진정되어서야 김연정 씨는 맨땅에 비옷 한 장 깔고 아픈 몸을 누일 수 있었다. 가진 거라곤 비옷 한 장뿐이었다. 등을 대고 누울 자리를 만들기까지 온몸은 피멍이 들었다.


김천 본사 농성장 안팎으로 경찰 병력이 배치돼 건물로 드나드는 출입구를 철통같이 봉쇄했고, 안으로 진입하려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크고 작은 싸움은 계속되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계속 김천 본사로 모여들었다.


“저는 11일 새벽에 건물 안으로 들어갔어요. 바닥에 은박지 깔고 주무시거나, 아니면 박스를 깔고 주무시는 분들이 많더라고요. 여성 노동자에게 그걸 양보한 남성 동지는 그냥 바닥에서 아무것도 안 덮고 자고. 그때까지 아무것도 없어서 힘들었거든요. 침낭도 준비가 안 되고, (도로공사 측이) 에어컨도 끄고, 환기도 안 되고, 공기 청정기도 끄고.”(공공연대노조 김정인, 11년 차, 북강릉 영업소)


김천 본사를 점거한 톨게이트 노동자 300명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서 턱없이 부족한 음식이 들어왔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아침과 저녁 두 끼의 식사가 노조를 통해 안정적으로 보급되었다. 농성장은 밥과 국이 담긴 사각 스티로폼을 재활용해서 밥상과 선반으로 쓰고, 수납장과 책꽂이를 만들었다. 잠자는 개인 공간이 생겼다.


본사 2층 로비를 거점농성장으로 쓰고 3층과 4층도 마음껏 활보하며 다닐 수 있었다. 3층 화장실은 여성 전용으로 만들어 간단한 샤워도 하고 빨래도 했다. 계단의 손잡이는 빨랫대가 되었고, 높다란 기둥만 보이면 빨랫줄을 거미줄처럼 연결해놓았다.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빨래가 3층과 4층으로 오르는 계단과 복도 사이로 주렁주렁 널려있었다.


“사람은 환경에 적응한다고, 우리가 너무 적응을 잘하는 거 같아.”(조미경)


한국도로공사 김천 본사 농성장 안에서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이 토론하는 모습. 뒤편으로 곳곳에 걸어놓은 빨래가 보인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건물의 출입구는 경찰들이 여전히 봉쇄했다. 건물 밖으로 나갈 수는 있지만 마음대로 들어올 수 없었다. 일상이 자리 잡는 시간 동안 날마다 도로공사 직원과 경찰과 대치하고 압착 당하고 넘어지고 끌려나가기를 반복했다.


추석 명절이 지나도 너무 더운 날들이 지속됐다. 도로공사는 농성장 위치만 냉방가동을 멈췄다. 환풍기도 차단했다. 전기를 끊었다 넣기를 반복하면서 노동자들을 조롱했다. 좁고 폐쇄된 공간에서 300명이 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감기와 호흡기 질환과 피부병으로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약도 없이 고통받았다.


박재은 씨는 어린 딸이 폐렴에 걸렸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 9월 중순에 본사 건물 밖으로 나가야 했다. 어린 딸이 병원 치료를 받고 난 후, 재은 씨도 자꾸 기침이 났다. 점점 심해졌다.


“오른쪽 가슴 갈비뼈가 끊어졌다가 붙었대요. 그런데 염증이 심하다고 하는 거예요.”


그날부터 보름 넘게 병원에 입원해서 치료를 받았다.


“우리 언니는 9월 말까지 김천 본사에 있다가 10월 초에 허리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갔어요. 허리가 아프니까 다리를 못 써서 수술하게 되었는데, 어느 날 팔이 안 올라가더래요. 그래서 검사를 했더니 어깨에 석회가 찼다는 거예요. 심줄이 끊어졌다고 하는데, 언니가 어떻게 다쳤는지 모르는 거예요.”


재은 씨와 언니뿐 아니라, 도로공사 직원과 공권력의 무자비한 폭력을 밤낮으로 당했던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크고 작은 부상을 당했다. 몸의 부상만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경찰들에게 범죄자 취급을 당하며, 감시하는 눈과 귀가 많아 불이익을 당하게 될까 봐 한편으로 두렵고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다.


‘노동자 갈라치기’ 떠나는 이들과 남겨진 이들


지옥 같은 시간을 동지가 있어서 견뎠고, 노동조합을 믿고 이겨냈다. 그러나 고립은 적들의 간교한 수법이다. ‘노동자 갈라치기’가 본격화되면서, 저편과 우리 편을 구분하기 어려워지는 상황이 왔다.


한국노총이 민주당 을지로위원회의 중재로 10월 9일 민주노총을 제외한 채 도로공사와 야합하자, 한국노총 조합원들은 텐트 농성을 철수하기 시작했다. 합의 내용은 1심 재판 승소하고 2심 계류 중인 노동자는 직접고용하고, 1심 계류 중인 노동자는 ‘임시직’으로 고용하되 이후 판결에 따르겠다는 것. 2015년 이후 입사한 노동자들은 차후 재판에서 판결이 난 결과를 따르겠다고 했다. 한국노총 조합원 중 70여 명은 지도부를 비판하며 한국노총을 탈퇴하고, 민주노총 소속 조합원들의 김천 본사 점거 농성에 힘을 실었다.


곧바로 민주노총 소속의 대법 판결 승소자 47명도 시험대에 올랐다. 도로공사에서 출근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대법 승소자들은 현장 복귀 시한을 넘겨 1500명 전원 직접고용을 요구하며 김천 본사 농성을 벌였지만, 냉혹한 현실 앞에 10월 20일 도로공사로 복귀했다.


“우리는 전부 다 이해는 했지. 처음부터 숨기지 말고 이야기했으면 될 일인데, 들어가기 직전에 이야기하니까… 그때는 정말 배신감 들고 투쟁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많이 했어요. 대법 판결자 들러리를 서는 건가?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조미경)


1500명 전원 직접고용을 목표로 마지막까지 함께 싸우겠다는 약속은 진심이었다. 전력을 다해 싸우려면 조직의 뒷받침이 필요했다. 상급조직인 민주일반연맹은 대법 승소자들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출근 명령에 따라야 한다는 ‘현장 복귀’ 지침을 결정했다.


“일부는 술렁였고, 일부는 화가 나 있었던 분도 계세요. 나는 그분들(대법 승소자) 말을 믿었어요. 복귀해서 그 안에서 투쟁할 거라고. 우리가 그분들 책임질 수가 없잖아요. 도로공사에서 (출근 명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해고를 하면, 지금까지 투쟁한 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잖아요. 그분들 말을 믿었고, 나를 믿고, 동지를 믿고, 조직을 믿고. 화가 난 분들도 많았어요. 하루 전에 발표하기까지 많은 고뇌를 했을 거예요.”(김정인)


도로공사의 전략이 노동자들의 분열이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은 도로공사의 시계에 맞춰서 흘러가는 듯 보였다.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의 공동투쟁은 깨졌고, 한국노총 조합원들이 빠져나간 주인 없는 텐트가 흉물스럽게 변해갔다. 농성장은 대법 승소자가 떠난 수만큼 채워지지 않았고 오히려 농성장을 떠날 이유가 되었다. 도로공사는 공공연하게 2015년 이후 입사자는 배제한다고 밝혔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도로공사의 음모와 술수에 휘말라지 않기 위해서 속울음을 참아내야 했다.


“김천 투쟁이 정체되어가고, 언론 노출도 점점 줄어들고, 선거철도 다가오고. 민주당사로 가서 시끄럽게 싸워야 한다고, 김천 본사 농성장에 70명 남기고 바깥의 조합원들은 청와대로 올라가자고 했어요.”(김연정)


파티를 열고, 춤추고 노래하고 기도하며 허물어진 벽


11월에 접어들며 노동자들 일부가 청와대로 상경했다.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김천 본사 건물 안팎으로 사람이 빠져나간 흔적이 역력했다. 김천의 골바람도 텅텅 빈 텐트 농성촌을 알아본 듯 거세게 몰아쳤다. 갑자기 면적이 넓어진 건물 안 농성장도 외풍을 막기 위해서 창문마다 두꺼운 비닐을 덮기 시작했다.


날이 추워지자 도로공사는 농성장 위치만 난방시스템을 정지시켰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월동준비를 하면서 장기전을 예감했다.


투쟁하면서 갈고닦은 실력은 싸움뿐 아니다. 날마다 파티를 열었다. 날마다 노래를 부르고 춤을 췄다. 김천 본사 농성장에서 요금수납원들은 연두, 초록, 주황, 남색 노동조합별 색상별 조끼를 입고 있었지만, 조끼의 색깔을 구분할 필요 없이 합창단을 만들고 몸짓패를 만들었다. 색깔은 서로를 구분하는 경계가 된 게 아니라 조화를 이루며 알록달록 캐릭터를 창작했다.


김천 한국도로공사 본사 농성장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조끼 색깔(소속 조직)의 차이를 넘어 함께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도로공사 건물 4층 작은 회의실의 문도 열었다. 유일하게 난방이 되는 공간이었다. 따뜻한 곳에서 합창단 노래 연습을 했다. 4층 넓은 복도는 몸짓패 춤 연습하는 공간으로 훌륭했다. 주말이면 투쟁문화제보다는 영화감상을 하면서 문화생활을 누렸다.


휴일도 쉴 새 없이, 종교행사가 기다리고 있었다. 기도는 동지와 연대의 끈을 이어주었다. 성직자와 평화의 종교인들이 건물 안 농성장을 찾아주었고 투쟁을 응원해주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농성장을 찾아주는 귀한 발걸음에 감사했다.


김천 본사 점거 농성이 길어지면서 서로 다른 노조의 벽은 허물어졌고, 서로를 알아가는 시간이 길어졌다. 날마다 농성장에서 편지를 썼다. 투쟁문화제 때마다 조합원들은 자신의 속내를 이야기했다. 누구 하나 아프지 않은 사람은 없었다. 내밀한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 공감하면서 벅찬 감동을 느꼈던 시간들이 힘겨운 농성 생활을 충만하게 해주었다.


“자신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는 게 쉽지 않은데, 한 분 한 분 이야기할 때마다 다 공감되니까, 60-70명이 듣고 울고 웃고. 내 이야기를 해도 되겠구나, 저 사람보다 내 처지가 낫네. 나는 여기 더 있어도 되겠고. 사람들의 개인 속사정 알게 되면서 이해하게 되었어요. 쟤는 왜 온다고 해놓고 안 오냐던 불평과 불만이 해소되기 시작한 거죠.”(김연정)


김천 본사 농성장을 지킨 조합원 한 사람 한 사람이 가진 재능과 역량을 다 발휘했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솜씨 있는 그림과 맵시 있게 잘 쓴 손글씨, 그리고 오락 등 모든 이의 장기를 총출동시켰다. 살아오면서 기회가 주어지지 않아서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숨은 재능을 찾아내고 마음껏 발휘하고 누렸다.


“우리 경남일반노조 조합원들은 수가 적어서 배려를 많이 받았어요. 배식 당번 한번 안 해 봤는데, 밥은 우리가 먼저 먹고. 우리가 다 먹어야 끝난 거야. 김천에서 마지막까지 남은 사람들은 조끼 색깔 달라도 정말 동지애로 뭉쳤어요. 덩어리가 크고 작고를 떠나서 조직은 소외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해요.”(김연정)


기약 없는 한겨울 농성장의 밤


12월 6일, 톨게이트 노동자 4120명이 대구지방법원에 낸 근로자 지위 확인 소송에서 ‘도로공사에게 직접고용 의무가 있다’는 승소 판결을 받았다. 또 한 번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옳다고 법원이 손을 들어주었다.


노조 지도부는 김천 본사 농성장을 빼서 서울 청와대와 여당을 압박하는 투쟁에 집중하자고 했고, 본사 농성장을 지켰던 인원은 서울로 더 많이 올라갔다. 김천 본사를 지키겠다는 조합원들도 있었다.


“집에 돌아간 사람은 안 나와, 전화해도 안 나와. 우리도 일단 집에 가면 치료받아요. 김천 본사 건물 안에 있으니까 병원 갔다가 다시 오지만, 서울은 노숙농성을 한겨울에 해야 하니까 자신 없지, 무조건 (점거 농성을) 빼면, 이 한겨울에 광화문에서 천막생활을 해야 하는데, 만약 우리가 다 쫓겨나면 갈 데가 없잖아. 청와대든 광화문이든 다 길거리에서 투쟁을, 맨날 길거리에서 가능하겠냐고요.”(조미경)


겨울을 넘기는 시간은 더디게 갔다. 노조 지도부는 김천 본사 농성을 접고 서울로 합쳐서 올라가자고 하지만, 나이가 많고 몸이 아프고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깃털 같은 힘이라도 보태고 싶어서 농성장을 지켰다. 직접고용 권리를 무시하는 도로공사에게 톨게이트 노동자의 존재를 보여주고 싶었다. 그러나 인원이 점점 줄어들었고,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내기 어려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내는 날이 늘었다.


노조의 교섭은 양보의 양보를 거듭해서 대법원 판결에도 미치지 못한 내용으로 들려왔다. 소송계류 중인 노동자 전원을 일단 직접고용하고, 이후 소송에 패소하면 패소자에 대한 고용안정 방안은 노사 간 별도 협의하자는 것이었다. 도로공사의 바람대로, 2015년 이후 입사자 문제로 노조는 흔들렸다. 도로공사는 2015년 이후에 불법 파견의 소지를 없앴다고 주장했지만, 재판 결과는 입사연도를 문제 삼은 적 없었다.


도로공사는 마지막까지 노동자의 단결을 깨고 갈라치기 위해서 몽니를 부렸고, 김천 본사에서 농성하는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수는 점점 줄어 서른 명 안팎이 되었다. 그러나 2015년 이후 입사자까지 단 한 명도 남기지 않고 함께 현장으로 복귀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자’는 구호가 건물을 쩌렁쩌렁 울렸다.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내 일인데, 내가 왜 멍청하게 가만히 있었지. 그래 이제 가만히 있으면 안 되겠다. 내가 늦게 깨달았어. 내가 조합원들 앞에서 화를 냈지. 도대체 우리가 농성하면서 최선을 다한 거 맞냐? 난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 같아. 난 도로공사를 가만히 둘 수가 없었어요.”(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김정희, 5년 차, 경주영업소)


2015년 이후 입사한 해당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동지를 두고 먼저 현장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하는 동지들 덕분에 또 힘을 낼 수 있었다.


톨게이트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이 가진 재주로 창의력을 발휘해 저항하며, 힘겨운 농성을 이어나갔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20층 사장실을 진격해 도로공사 직원들에게 비상을 걸었다. 농성장 면적을 넓히기 위해서 직원식당으로 넘어가 경찰공권력을 긴장시켰다. 이강래 사장은 사태수습은 뒷전이고 개인의 영달을 위해 총선에 출마하러 떠났지만,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분노와 저항에 부딪혀서 본사 건물에서 퇴임식도 변변히 못 하고 불명예스럽게 자리를 옮겨야 했다.


투쟁을 멈추면 고립된다는 걸 뼈저리게 알고 있는 요금수납원들은 끝까지 싸우려 했지만, 소수의 인원으로 넓은 농성장을 지키는 것도 버거웠다.


“우리 지쳤어요. 누가 이끌어주지도 않잖아요.”(김정희)


그렇다고 해를 넘겨서도 해결의 국면을 열지 못한 교섭 소식에 가만히 있을 수도 없었다. 건물을 나와 거대한 25층 김천 본사 둘레를 달렸다. 아침에 출근하는 도로공사 직원을 향해 선전전을 하면 그들의 차가운 발걸음과 무심한 눈길에 서운했지만, 화도 나지 않았다. 도로공사가 잘 닦아놓은 산책길을 따라 산길도 걸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출근하게 될 도로공사 김천 본사 건물이 내 집 안방이요. 잘 닦아놓은 정원이 내 집 앞마당같이 푸근했다. 경찰공권력은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밤새도록 인형 4개를 만들고 뱀 대가리 아홉 개 만들어서 구사대 이름 적어서 주렁주렁 건물에 매달아 놓았더니 도공(도로공사 직원들)이 기겁하더라고요. 내가 뭔가 시도를 하니까 옆에서 도와줘요. 우리 비주류잖아요. 풍선 불면서 이야기 나누고, 내가 뭔가 할 수 있어 즐거운 거지. 흰 천에 쓰고 싶은 말을 쓴 소복, 저걸 누가 입겠나 싶었는데 사람들이 고맙게 입어준 거야.”(김정희)


여성 노동자들은 가만히 있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가진 재주로 창의력을 발휘하고 일을 찾아내서 만들기 시작했다. 김천 본사 농성장은 활력을 되찾기 시작했다. 최대한 혐오스럽게 꾸며서 도로공사 직원들을 압박하고 싶었는데, 아기자기하고 소름 돋을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럽게 만들어버렸다.


겨울밤은 깊어만 갔다. 기약 없는 농성장의 밤을 이겨내야 승리할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몸 아파도 억지로 있었어. 밖에서 찬 바람 안 쐬고 안에 있으니까 견딜 수 있었지만. 우리가 할 수 있는 최대치를 하고 있었어요.”(조미경)


145일간의 김천 본사 농성의 의미는 무엇일까


도로공사와 노조는 2015년 이후 입사자 고용문제로 협상을 벌였지만, 도로공사는 조건부해제 직접고용 방안을 언론에 먼저 발표해 반칙을 썼다. 전원 직접고용하겠다는 발표는 투쟁의 성과였지만, 2015년 이후 입사자에 대해 첫 판결의 결과에 따라 내보낼 수 있는 단서를 둔 조건부해제는 독소조항이었다. 도로공사의 잔인한 결정에 노동자들은 울고 웃었다.


한편으로 도로공사는 김천 본사 농성장에 퇴거 가처분 신청을 해서 노조를 압박했다. 현장으로 복귀해서 싸우자는 이야기가 나왔다. 법적인 문제로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지도부의 고민도 깊었고, 장기간 농성과 투쟁의 피로도 쌓였다. 1월 마지막 날, 김천 본사 145일 점거 농성은 일단락되었다.


한국도로공사 본사 농성장 안에서,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다른 사업장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에게 보낼 연대의 메시지를 적고 있다. (민주연합노조 톨게이트지부 제공)


톨게이트 노동자들에게 김천 본사 투쟁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제게 도로공사는 엄청나게 아픈 곳이거든요. 지고 싶지 않았어요. 김천 본사 건물에서 어떤 식으로든 내가 먼저 항복하고 내 발로 나가지 않겠다, 공권력 투입돼서 끌려나가면 어쩔 수 없잖아요. 나는 잘못한 게 없으니까. 끝까지 투쟁하겠다고 마음먹었어요.”(김연정)


공공기관마저 지키지 않는 한국의 법치는 죽었다. 톨게이트 노동자는 8월 29일 대법원 판결을 이행하지 않고, 함께 일할 동료로 인정하지 않는 도로공사를 향해서 젖 먹던 힘까지 짜내어 보여주고 싶었다. 결국, 함께 일할 동료가 될 것이라는 걸.


결론을 내기 위해서, 한국도로공사의 심장부로 뛰어들었다. 이들 중 누구도 김천 본사 건물을 함락할 거라고 장담하지 못했지만, ‘우리가 옳다’는 확신이 있어서 거침없이 행동할 수 있었다. 같은 목소리를 내어준 사람들과 같은 곳을 바라보았고, 함께 행동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오롯이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동지’가 있어 결국 톨게이트 노동자들의 일터가 될 한국도로공사에 투쟁의 깃발을 꽂았다.


“투쟁하기 전엔 노조에 가입해서 이름만 걸고 있다는 것밖에 없었는데, 김천 본사 뚫고 투쟁하면서 용기를 얻었죠.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런 투쟁을 해야 하고, 해봐야죠. 단합된 힘이 참 좋다.”(박재은)


도로공사는 톨게이트 노동자 사태를 해결하지 않는 핑계를 청와대로 돌렸고, 2015년 이후 입사자를 직접고용하면 정규직노조가 반발한다면서 변명했다. 그 비루한 변명에 재갈을 물리기 위해서 싸웠다.


“도로공사가 말을 안 듣잖아. 우리가 김천 본사에 남아서 계속 우리의 존재를 보여줘야지. 다시 뭉쳐서 투쟁할 수 있는 곳이 김천 본사라고 생각했어요.”(조미경)


긴 시간 투쟁한 민주노총의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도로공사로부터 ‘직접고용하겠다’는 사회적 공언을 들었다. 대법원 판결문만 믿고 기다렸다면 절대로 들을 수 없었던 말은 직접고용만이 아니다. 톨게이트 노동자들이 도로공사 심장부로 들어간 건 예상치 못한 반전이었다. 건물을 다 에워쌀 정도로 많은 노동자들의 힘을 확인했고 자신감을 가졌다. 농성이 길어지면서 떠나는 사람이 생겨났고, 투쟁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둘씩 늘었다. 점거 농성을 하는 동안 노동자들은 단단해졌다.


조끼의 색깔이 다른 4개의 노동조합이 화단을 만들어서 알록달록한 꽃을 피웠다. 여성, 장애인, 탈북민, 한부모에 대한 차별로 권리를 상실했던 노동자, 늙고 젊은 노동자들이 모여서 각자 다른 장소에서 겪었던 ‘노동인권을 박탈당한 경험’을 털어놓고 공유하며 서로를 치유하는 시간을 보냈다.


자신을 위한, 그리고 가족 생계를 위한 싸움이 우리 사회의 비정규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싸움이 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자신이 겪은 고통이 또 다른 누군가의 고통이 되지 않기 위해서 세상을 바꿔내야 한다는 생각이 김천 본사 농성장을 지켰다.


처음 도로공사를 향했던 목소리는 어느새 세상을 향한 진군의 북소리가 되었고, 잘못된 정부 정책을 비판하는 칼날도 되었다. 여성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이 흔들릴 때마다 초심으로 돌아가기 위해 목소리를 높였다. 잃어버렸던 이름과 목소리를 되찾는 데는 시간이 걸렸지만, 톨게이트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권리를 찾기 위해 도로공사 김천 본사 건물로 당당히 들어가 145일간 민주주의 꽃을 피워냈다.  인터뷰 진행 및 기록: 톨게이트 기록팀(나랑, 시야, 희정)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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