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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했다고 조용히 사라지진 않을 거예요”

문화콘텐츠 제작소 소문자에프의 ‘세 파산녀’를 만나다



“제가 마이너스 통장이 되어버려서 카드빚이 생겨버렸거든요. 어떻게 하죠?”

“방법이 있어요. 회사 돈으로 다 정산하고 폐업하면 됩니다.”

“(허탈하게 웃으며) 아아…”


파산녀1 미사장의 ‘통장잔고 0원 소식’에 파산녀3 만두는 ‘사업의 존속이냐 폐업이냐를 결정할 때’라고 말하고, 파산녀2 요세이는 ‘우리의 월 수익은 공개할 것도 없다’고 덧붙인다. 세 명의 파산녀는 결국 ‘회사의 존속이냐 폐업이냐’를 놓고 시청자 투표를 진행하겠다고 선언한다.


▶ “[월간파산녀] 파산녀는 왜 파산했을까?” 만두, 미사장, 요세이 ⓒ유튜브 <세 파산녀> https://bit.ly/2PzCJ5H


검은 색 점프 수트를 똑같이 입은 젊은 여성 셋이 모여 개인의 빚과 파산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시청자 투표를 진행하겠다는,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는 이야기가 담긴 이 유튜브 영상이 <세 파산녀>를 처음 접한 계기였다.


사실 파산녀1로 등장하는 미사장의 유튜브는 예전에도 종종 봤었다. 소문자에프의 지난 프로젝트 중에서 퀴어 댄스스포츠를 배우는 <원, 투, 퀴어 앤 포!> 영상도 몇 번 봤고, 공연까지 잘 마무리됐다는 소식도 들었던 터라 이들이 ‘파산녀’가 되어 돌아왔다는 게 좀 의아했다. 꾸준히 잘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알았는데 파산 상태에 놓였다니, 충격적이기도 했고 안타깝게 느껴졌다.


하지만 또 그걸 유튜브에서 ‘웹예능’ 장르로 풀어내고 있는 모습이 흥미로웠다. 여성들도 뭐든 할 수 있다는 “걸즈 캔 두 애니띵!”(Girls can do anything) 이후 여성들의 성공을 위한 임파워링이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사업 실패’로 여겨지는 파산 선언을 당당히 내 건 이들에 대해 더욱 궁금해졌다.


문화콘텐츠 제작소 ‘소문자에프’의 거침없는 행보


유튜브에 업로드 중인 웹예능 시리즈 <세 파산녀>를 만들고 있는 이들은 ‘소문자에프’라고 하는 문화콘텐츠 창작집단의 미사장, 만두, 요세이다. 같은 대학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미사장과 만두는 메갈리아 등장 이후 2015년 겨울에, “미디어에서 소수로 존재했던 사람들을 가시화하는 방법”으로 ‘페미니즘 시각예술 매거진’을 구상하게 되는데, 그게 소문자에프의 시작이었다.


당시만 해도 페미니즘이나 젠더, 퀴어 이슈 등을 다룬 출판물이 많지 않았다. 천만 원이라고 하는 큰 금액을 목표액으로 설정했음에도, 잡지 발간을 위한 펀딩이 성공적으로 마감되었다. 페미니즘 시각예술 매거진 <소문자에프>는 2호까지 발간되었다.


2016년부터 소문자에프는 퀴어/페미니스트 창작자들이 만들어낸 콘텐츠가 오프라인에서 사람들과 만날 수 있도록 ‘페미니즘 굿즈 팝업스토어’ <후로파간다>와 ‘페미니즘 페스티벌’ <페밋>을 기획, 개최했다.


올해에는 “퀴어들이 모여 성별 정체성과 성적 지향에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춤으로써 드러내고 표현하는 퀴어 댄스스포츠 공연을 목표로 하는 프로젝트”인 <원, 투, 퀴어 앤 포!>를 기획, 제작하고 공연까지 마무리했다.


잡지를 발간하다가 창작자들을 모아 페스티벌을 열고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하고, 하나만 해도 벅찰 것 같은데 소문자에프의 사업은 계속 변화하면 진행되어 왔다. 왜 이렇게 다양한 일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에 대한 이들의 대답은 의외로 명료했다. “퀴어/페미니스트 창작자/소비자들을 위한 플랫폼을 만들고 싶었고, 소수자의 ‘이야기’를 더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한 결과였다”고.


“지금까지, 하고 싶은 일과 그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소문자에프는 “더 많은 이들에게 다가가기 위해 플랫폼을 확장해 온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사업이 지속되었고, 시작했을 때는 학부생이었던 이들은 대학 졸업 후 본격적으로 일에 뛰어들었다. 페미니즘 시각예술 매거진 <소문자에프>의 펀딩 성공, 이틀 동안 진행된 행사에 약 5천명이 참여한 <페밋>의 성공까지. 그렇게 소문자에프의 행보는 순조롭게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나아가고 있었다.


남은 건 마이너스 통장과 ‘번 아웃’


“3년 가까이 사업을 진행했는데 다 잘 된 편이죠. 운영이 어려웠던 적이 없었고 <원, 투, 퀴어 앤 포!>를 시작할 때도 자신감이 있었어요. 그런데 영상 제작이라는 게 시간과 비용이 굉장히 많이 들어가는 반면, 창작자한테 수익이 별로 생기지 않더라고요.” (미사장)


▶ <원, 투, 퀴어 앤 포!> 영상 중에서 ⓒ유투브 <미사장> 채널 https://bit.ly/2EjYYdY


호기롭게 시작한 <원, 투, 퀴어 앤 포!> 프로젝트는 성공적으로 끝났다. 댄스스포츠를 함께 배우고 공연을 할 팀원을 모집하고 오디션 보는 것부터 공연 현장과 후기를 담은 영상까지, 총 8개의 에피소드와 그 외 짧은 영상들도 업로드 되었다. 시청자 입장에선 말끔한 마무리였다.


하지만 그렇게 ‘성공한 프로젝트’라는 이면에는 적금을 깨는 등 금전적 지출과 주말도 없이 일하는 과도한 노동이 있었다. 그렇게 소문자에프에게 남은 건 멤버들의 ‘마이너스 통장과 번 아웃’이었다.


“보기엔 잘 되었는데 개인의 희생으로 끝난 것 같아요. 콘텐츠에 대한 반응도 좋았는데 그게 다 돈으로 연결되지 않더라고요. 내용적인 실패라기보다 구조적인 문제라고 생각해요.”(미사장)


요즘 수많은 유튜버들이 등장하고 있지만, 사실상 유튜브를 통해 돈을 벌기란 쉽지 않다. 이용자들이 영상을 한번 클릭했을 때 창작자/저작권자에게 배분되는 수익은 고작 1원(광고 유무 및 시청자의 광고 시청 유무에 따라 차이가 있음)이 좀 넘는다. 영상에 광고가 붙거나 협찬 등이 있어야 본격적으로 수익이 발생하는 구조다. 하지만 페미니즘, 퀴어 이슈를 다루는 콘텐츠에 광고나 협찬이 생기기란 아직 쉽지 않다.


메이크업 노하우를 알려주는 뷰티유튜버로 활동한 적도 있는 미사장은 “어떤 걸 하면 수익을 낼 수 있는지 알고는 있다”고 했다. 하지만 탈코르셋 이슈가 등장한 이후 그는 뷰티콘텐츠 제작하는 일을 그만뒀다. “오로지 돈만 벌기 위해 일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할 수 있었던 결정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수익이 나지 않는 콘텐츠를 제작할 생각은 아니었다.


“내용이 좋으면 수익이 생길 줄 알았다”며 아쉬움을 표현한 만두는 이번 일을 겪으며 현실적인 부분을 좀 더 고려해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음을 전했다.


‘파산’은 우리 이야기의 결말이 아니라 시작!


무난하게 차근차근 일을 하나 둘 진행해 오던 소문자에프는 그렇게 예상치 못한 ‘실패’를 만났다. 이런 실패가 처음이었던 이들은 두려움에 휩싸였다. 몸도 마음도 지쳐 무언가를 더 기획할 생각조차 들지 않았을 때, 그냥 이 모습 그대로를 보여주기로 결심했다.


“우리 자신이 등장하는 건 정말 안 하고 싶었는데… 누굴 섭외할 돈도 없고 하니까(웃음), 이런 기획을 생각하게 된 거죠.”(만두)


▶ “본격 프리랜서 충격 실상 파헤치기!? 말이 좋아 프리랜서의 하루” 중 ⓒ유튜브 <세 파산녀> https://bit.ly/2PzCJ5H


그렇게 <세 파산녀>가 나왔다. 웹예능이라는 장르가 더해지며 가공된 부분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각자가 자신의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이야기, 그것도 사람들이 감추고 싶어하는 것 중에 하나인 ‘사업실패, 돈없음’을 이야기하면서.


<세 파산녀>의 등장은 소문자에프의 행보를 지켜오며 응원하던 이들에게도 충격적인 일이었다. “우리의 롤모델이었는데… 저렇게 되고 싶었는데…라는 (주변의) 기대를 저버리는 것에 대한 부담감”은 <세 파산녀>를 만들 때 마음의 짐이 되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이런 이야기도 전해야 한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아직 성공 사례가 많지 않으니까 소수의 사람들이 그걸 열심히 증명해야 하는 상황인데, 전 오히려 ‘왜 여성들에겐 실패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가?’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미사장)


“(성공 이야기 말고) 좀 다른 이야기가 나와도 되지 않을까? 싶었어요. ‘실패했으니까 조용히 사라지겠다’가 아니라 ‘뭐라도 해 보겠다’, 그걸 보여주겠다고 생각한 거죠.”(요세이)


‘조용히 사라지지 않겠다’고 말한 세 파산녀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파산=실패’라고 간주하는 것처럼 자신들을 루저(Loser)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스스로를 “생존자”라고 명명한 이들은 “보통 파산이라는 상태를 결말이라고 생각하기 쉬운데 우리한테는 이게 시작인 것 같다”고 할 정도로 여전히 거침없는 열정을 보였다.


“우리에게도 웃음이 필요하잖아요”


‘파산녀’라는 이미지를 내보내다가 자칫 ‘자기비하’가 되지 않을까? 그런 부분에 대한 경계가 있는지 묻자 세 파산녀는 “지금의 상황이 ‘나의 존엄을 버린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강조했다. “비록 돈은 없지만 내가 나를 인간으로 구성할 수 있는 상태를 포기하지 않았거든요.”


<세 파산녀> 영상엔 실제로, 통장잔고가 거의 바닥임에도 좋아하는 아이돌 가수의 콘서트 티켓을 지르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가는 등 삶의 소소한 행복을 찾고 그걸 지키려는 모습들이 나온다.


“영화 <소공녀>(전고운 감독, 2018년)를 보면 집세를 낼 돈이 없는데 담배와 위스키를 선택하고 오히려 집을 포기해요. 사람마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잖아요. 전 자영업자/프리랜서로서 나의 심리 상태와 체력이 수익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나 자신을 돌보는 걸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운동도 꾸준히 하는 건데, 어떤 사람들은 그걸 사치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사람에게 물이 필요하듯이 저한텐 그만큼 필요한 거예요.”(미사장)


▶ 소문자에프들의 작업공간인 한 카페에서 멤버들과 만났다. (왼쪽부터 만두, 미사장, 요세이) ⓒ일다(박주연)


‘돈 없는 젊은 여성 자영업자/프리랜서’로 살아간다는 건 “당장 다음 달을 예측할 수 없는 것”이라며 불안정함을 드러냈지만, 주5일 꼬박꼬박 카페로 출근해 퇴근할 때까지 일을 해내는 이들은 여전히 “더 많은 일을, 더 큰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안고 있었다.


“아직 저희 월급도 못 벌어서(웃음) 그렇긴 한데, 더 많은 여성들과 일하고 싶어요. 정당한 인건비를 주고, 또 받으면서요.”(만두)


힘들다고 하면서도 더 많은 여성과 더 큰 일을 하고 싶다니, 무슨 일을 그렇게 하고 싶은 걸까? 무엇이 이들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걸까? 만두는 “콘텐츠는 많은데 사실 (퀴어/페미니스트들이) 재미있게 즐길 콘텐츠가 아직 많진 않은 것 같다”고 말하며 “즐겁게 즐길 수 있는 콘텐츠를 만들고 싶다”고 밝혔다.


“우리에게도 웃음이 필요하잖아요. 보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지 않고, 빻지 않으면서 웃길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PC한(정치적으로 올바른) 콘텐츠는 재미없다는 편견을 깨고 싶어요.”


꿈만이 그들을 계속 움직이게 하는 건 아니었다. 서로에 대한 신뢰도 두텁다. “혼자 하다가 실패했으면 그만두었을 텐데 셋이니까 계속 서로를 믿고 의지하면서 계속할 수 있다”고 얘기하는 세 사람의 모습은 여성동료와 여성연대를 부정하는 세간의 이야기가 얼마나 허구인지 다시 한 번 증명하고 있었다.


늘어나는 자영업자들과 그들의 폐업, 실패. 이것이 경제에 미치는 영향 등에 대한 뉴스가 연일 들려온다. 그 뉴스 안에서조차 가시화되지 못하지만 ‘젊은 퀴어/페미니스트 여성 자영업자’ 또한 이 사회에 존재하고 있고, 열심히 일하고 있다.


2019년에도 계속 “잘 버티고 싶다”는 <세 파산녀> 제작자인 소문자에프. 조용히 사라지지 않기 위해, 존엄을 잃지 않고 자신이 믿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계속 실험 중”이라는 이들. “고민을 거듭하고 있으니까 ‘쟤가 왜 저렇게 할까?’ 싶더라도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으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도 웃음이 필요하잖아요.”라는 말 속 ‘우리’ 안에 소문자에프의 멤버들도 포함되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들이 웃을 수 있어야 그걸 지켜보는 이들 또한 웃을 수 있을 테니까 말이다. 소문자에프가 자신다움을 잃지 않고 웃으며 계속 도전할 수 있기를, 새해에는 더 다양한 여성들의 성공, 그리고 실패의 이야기가 우리 사회에 울려 퍼질 수 있으면 좋겠다. (박주연)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 세 파산녀 유튜브 채널: https://bit.ly/2PzCJ5H

* 미사장 유튜브 채널: https://bit.ly/2EjYY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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