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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쏘지 마세요, 선량한 변태입니다’

<이상성욕자? 선량한 변태들의 목소리> 1화


※ 음란함, 이상함, 혹은 폭력적이라는 선입견의 베일에 덮인 채 야동을 비롯한 미디어에서 왜곡된 이미지로 재현되고 있는 bdsm에 관하여 직접적으로 다루어봅니다. 기록노동자 희정님이 bdsm 성향의 당사자들을 만나 기록한 <이상성욕자? 선량한 변태들의 목소리>를 4회에 걸쳐 연재합니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빨간 구두 소녀의 비명


아람은 ‘작고 귀여운 여자아이’처럼 보였다.


“지금 생각하면 잔인하고 충격적인데, 유치원 때 집에 동화 읽어주는 CD가 있었어요. <빨간 구두> 동화에서 마지막에 소녀의 다리를 자르잖아요. 그거를 계속 돌려들은 거예요. 영상도 아니고 비명만 나는데. 나는 정말 큰일 났구나.”


아람은 다소 민망하다는 듯 크게 웃었다. 맞은편에 앉아 나도 따라 웃으며 생각했다. 정말 큰일 났구나. 이걸 대체 다른 사람들이-그러니까 이 글을 보게 될 사람들이-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인가. 비명 소리에 묘한 감정을 느끼는 다섯 살짜리 꼬마를.


아람의 말을 글의 시작에 세운 지금도 고민은 여전하다. 그럼에도 말한 그대로 적으려 한다. 성(性)에 대한 이야기는 만연한데, 정작 ‘그걸’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선별적으로 들린다.


▶ 스칼렛 달튼의 책 <BDSM: How to Take Your First Steps Into BDSM> 표지 이미지


비명소리를 좋아하던 아이는 커서 뭐 대단한 ‘변태’가 된 게 아니다. 사이코패스가 되지도 않았고, 누드로 밤길을 활보하는 사람이 되지도 않았다. 친구를 잘 놀리고 인형을 줄 세워 상명하복 놀이 하는 아이로 자라났을 뿐이다. 알고는 있었다. 자신의 몸과 감정이 ‘일반’사람들과는 다르게 반응한다는 걸.


스무 살이 되어서야 자신을 달뜨게 한 정체가 bdsm인 것을 알았다. 아람은 지배와 가학 성향을 지닌 사람(도미넌트-새디스트)으로, 흔히 ‘펨돔’이라 지칭된다. bdsm은 지배와 복종, 속박과 훈육, 가학과 피학 성향 하에 이뤄지는 롤 플레잉, 감금, 본디지 등 다양한 성적 활동과 인간 상호작용을 가리킨다.(위키백과를 참조)


bdsm까진 몰라도, ‘보통’사람들에게도 sm은 낯선 단어가 아니다. 새디(스트)와 마조(히스트)라는 말 정도는 익숙하다. 가죽 옷 입고 채찍 든 여성을 떠올렸다면 세상에 통용되는 bdsm 이미지를 알고 있는 게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성향자라고 하는, bdsm을 행하는 사람들을 직접 본 적도, 이야기 들은 적도 없을 것이다.


세상은 ‘변태’에 대해 즐겨 말하지만 정작 ‘변태’들의 목소리는 들을 수 없다. 그네들의 이미지는 야동 화면이나 범죄 목록에나 들어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로 했다. 글을 시작한 이유는 그것뿐이다.


왜 나를 슬퍼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지?


아름과 반대 성향이라 할 수 있는, 마조히스트 가연은 인터뷰 자리에 앉자마자 이 이야기를 꺼냈다.

“저는 이게 날 때부터 주어진 성향이라 생각해요.”


나도 말했다.

“안 물어 보려 했는데…”


왜 그런 성향을 갖게 됐나요? 같은 질문은 하지 않으려 했다. 왜 (여자가) 여자를 좋아하냐?와 마찬가지로 무례한 질문이라 생각했다. ‘그러한’ 사람은 그냥 존재한다. 존재에 ‘왜’라는 의문을 붙이는 건 내가 할 일이 아니다. 그 일은 이미 동성애 혐오세력 등에서 열심히 하고 있다.


글에서 다루고 싶은 지점은, ‘어떻게’였다. 이들이 어떻게 자신을 인정하고, 어떻게 사회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는지.


우선 그네들은 스스로를 어떤 존재로 생각할까. 다시 아람을 소환한다.

“선량한 변태입니다.”


인터넷에 ‘쏘지 마세요, 선량한 변태입니다!’라는 짤이 돌아다닌다. 아람이 자학 겸 하는 농담이기도 하다. ‘변태’라는 단어에 담을 수 있는 자학은 다 들어갔다. 폭력과 학대를 즐기는 위험한 ‘변태 성욕자’로 세상에 비춰진다. 이들에게는 성애라는 명칭조차 붙여주지 않는다. 성욕자라 칭하며 욕망만을 강조한다.


“나는 즐거운 변태일 뿐인데 나를 환자로 취급하다니. 왜 나를 슬퍼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거야.”


▶ 도미넌트-새디스트 아람의 BDSM 도구인 목갑, 파트너의 손이나 목에 묶어 몸의 통제권을 가질 수 있다. (제공: 아람)


누구든 잘 수 있는 여자 낙인


‘즐거운 변태’라. 아람은 즐겁다. bdsm을 하기 전과 후, 삶의 만족도가 달라졌다.


“머리로만 떠올릴 때는 변태적이라 생각했어요. 그래서 이건 판타지야. 상상만 해야 하는 거야. 하면 안 돼. 그런데 직접 접하고 나서, 아! 해도 되는 거구나. 이런 과정(합의)을 거치면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고 할 수 있는 거구나.”


상상하는 것만으로 죄책감을 들게 하던 행위. 그러나 막상 해보니, 할만 했다. 판타지일 뿐이라 취급하던 것을 자신의 세계로 받아들이니 삶이 한결 나아졌다.


선량하고 즐거우나, 세상으로 한 발자국만 나가면 그냥 변태다. 새디스트, 차라리 어딘가 이상한 ‘가해자’로 비춰지기만 하면 다행이다. ‘여성’이라는 젠더와 ‘변태’ 이미지가 결합하면 다른 결과물을 내기도 한다. 세상은 아람에게 주홍글씨를 새길 준비를 하고 있다.


여성 성향자일 경우 마음이 병든 여자 또는 음란한 아니 ‘만만한’ 여자로 인식되기도 한다. 까놓고 말해 몇 대 때려/맞아주면 누구나 ‘잘 수 있는’ 여자.


상대를 신중히 찾고, 혼자 하는 상상만으로도 만족한다는 아람의 말 같은 것은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람에게 새겨진 주홍글씨는 종종 위험을 몰고 온다.


그러나 또 다른 ‘즐거운 변태’ 가연은 위험을 반문한다.


“여성으로 패싱(passing)되는 사람이 성적으로 어떤 정체성을 갖고 있다고 밝히는 건 다 위험하지 않나요? 정도의 차이야 있는 거지만.”


어떤 성적 취향이건 간에 여자가 성적인 무언가를 드러내면 위험은 어디서나 온다는 말. 세상이 여자들을 향해 ‘짧은 치마 입지 마라’ 하는 이유와 같다. 성적인(?) 다리를 세상에 내놓지 마라.


움직이는 성: 무엇이 섹스로 간주되는가


다리뿐 아니라 다른 곳도 헐벗었을 것 같은 bdsm 여성 성향자의 이미지는 ‘성적 욕망을 드러낸’ 여성으로는 으뜸이다. 수십 년 전만 해도 결혼하지 않았으나 ‘비(非)처녀’인 여성 또한 바로 이곳 ‘성적 욕망을 드러낸’ 집합에 속했다. 이 ‘더럽혀진’ 여자는 정상-성애의 영역에 포함될 수 없었다. 그런데 ‘성적 열망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더럽혀진’ 여자만 ‘비처녀’에 포함된 것은 아니다.


강간의 역사를 다룬 <우리의 의지에 반하여>에서 수잔 브라운밀러은 역사적 ‘비처녀’의 범주를 언급하는데, 포로와 노예 그리고 이민족 여성 등이 여기에 속했다. ‘비처녀’의 범위는 방대한 듯 보이나 명료하다. ‘비처녀’란 곧 결혼을 통해 지배 체제가 인정한 공간으로 들어올 수 없는 ‘모든’ 이들을 지칭했다.


그 공간으로 들어갈 수 없는 이들과 마찬가지로 이들의 성애도 인정되지 않았다. 인정의 범위에서 멀어질수록, ‘비정상’ ‘변태’ 때로는 ‘성 도착’이라 불렸다. 한때 우리가 아는 키스도 그 자리를 차지할 뻔 했다. 미국 할리우드 영화를 통해 국내(조선)에 들어와 로맨스라는 신문물의 상징이 된 키스. 당시에는 키스를 정상-성애의 영역에 포함시킬 것인가를 두고 갈등을 겪었다. 지배 체제가 인정한 성의 목적인 생식(출산)과 키스가 무관했기 때문이다. “재생산을 목적으로 하지 않는 쾌락”인 키스는 아무리 해도 가족 내에서 대대손손 자손을 만들어낼 수 없었다. (박차민정, <조선의 퀴어>)


성은 자연스럽고 본능적인 것으로 비춰지지만, 실제 그 자리를 차지한 형식과 위계는 본능에 충실하지 않다. 게일 러빈은 [여성 거래]에서 그러한 ‘성’의 성격을 밝힌다. 배고픔은 배고픔일 뿐이지만, 어떤 것이 음식으로 간주되느냐는 그 시대의 문화에 의해 결정된다. 섹스(성)도 섹스일 뿐이다. 다만 “무엇이 섹스로 간주되는가는 문화적으로 결정되고 획득”된다.


▶ 새디스트와 마조히스트를 소재로 한 로맨틱코미디 영화 <세크리터리>(스티븐 세인버그, 2002) 한 장면. 매기 질렌할, 제임스 스페이더 주연의 이 영화는 선댄스영화제에서 ‘독창성’ 부문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다.


“섹스로 간주되지” 않는 섹스를 하는 이들이라. 사회는 ‘정상’으로 간주되는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과 행위에 처벌과 제재를 가한다. 특정 몸과 성애에만 국한된 일이 아니다. 노동자가 되길 거부하던 사람들을 부랑자로 분류하여 귀를 자르던 자본주의 초창기의 모습을 떠올려보자. 사회는 역할극을 수행하려 하지 않은 사람들을 처벌한다. 모두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가부장체제 내 ‘제자리’에 있지 않는 여성, ‘비처녀’들에게도 처벌이 기다린다. 여러 권리를 박탈하는 방식으로. 그 중 하나가 ‘강간당하지 않을 권리’다. 남성(가장)의 소유가 아닌 여성들은 만인의 소유라 여겨지는, 일명 공유재로 취급받는다. 그네들은 ‘누구나 잘 수 있는 여자’가 된다.


사회는 이들을 향한 강간을 허용하거나 눈감았다. 전쟁 시 타국의 여성들에게 그러했고, 몇 세기에 거쳐 하층-노동 계급 여성에 대한 강간죄의 처벌은 미비했다. 여전히 성매매 여성들에 대한 강간은 ‘일반’여성과는 다르게 취급된다. 지금도 ‘비정상’ 여자를 ‘섹스(강간)’로 훈육하여 ‘정상(성애)’으로 되돌려(?) 놓는다는 발상이 컴퓨터 모니터 속에 만연하다. 아주 특이한 상상이 아니다. 역사가 있다.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미끄러진’ 사람들


‘비정상’과 특정 젠더가 만났을 때, 위험은 가중된다. (여기서 말하는 특정함은 bdsm 여성 성향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레즈비언, 게이,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등 ‘이탈된’ 정체성들은 가중된 위험을 안고 산다.)


반면 ‘처녀’의 영역, 그러니까 지배 규범에 따라 ‘정상 성애’ 영역에 들어가는 여성들은 보호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인터뷰 도중 아람은 의문했다. 자신은 지금보다 ‘일반’ 연애할 때가 더 위험했다고.


“남성들하고 ‘일반’적인 연애를 했을 때, 더 위험했어요. 강제로 당한다는 느낌? 은근슬쩍. 해도 되지? 묻지 않고, 일단 눕히고 나서. 안 돼. 위험한 것 같아. 싫어. 그렇지만 여기서 싫다고 하면 날 사랑하지 않니? 이럴 것 같아서.”


이 말 또한 사실이다. 우리는 위험한 연애를 알고 있다. 사랑은 아름다운데, 하필 ‘개새끼’를 만나서 생기는 일이 아님을 안다. 그러기에는 위험이 너무 잦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외쳐진 여자라서 죽었다는 말은 일면 뼈아프게 맞는 말이다. 문제는 그 말 자체가 위험에서 우리를 구해주지 않는다는 것.


세상은 기울어진 운동장이고, 미끄러지는 그룹은 언제나 존재한다. 그러다 다친다. 죽기도 한다. 어떻게 하면 모두, 안전해질 것인가. 숨겨진 ‘변태’들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글을 시작했다고 했으나, 실은 이 물음의 답을 찾고 싶었다. 누구도 안전하지 않은 사회에서, 나 또한 살아가야 한다.


‘정상이 아닌 여자’들의 목소리가 이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 거라 생각했다. 세상이 규정한 ‘여자’가 아니다. “여자라면 자고로”에 포함되지 않는 비처녀들. 세상은 그네들을 ‘여자’ 취급하지 않는 동시에 한시도 그네들의 ‘여성(性)’을 잊지 않는다. 까닭에 이들은 ‘위험’해진다. 


‘정상’을 추구하는 운동장에서 마구잡이로 미끄러지는 특정 젠더와 섹슈얼리티. “여자라서 위험하다” 그렇다면 (세상이) 위험에 처했다(고 말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 다시 묻고자 한다. 우리는 이 운동장에서 어떻게 스스로를 구할 것인가. (※이어지는 기사에서는 젠더와 bdsm의 관계를 더 깊이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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