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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안 바뀌어도 우리는 바뀔 수 있다’

영화 <허스토리>가 보여주는 여성연대의 힘



페미니스트로 산다는 건 종종 고달프다. 한번 ‘빨간약’을 먹고 나서 진짜 세계를 보고 나면 외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진짜 세계가 전에 알고 있던 것보다 훨씬 괴롭고 끔찍하다는 걸 알고 난 뒤엔, 이전으로 돌아가기가 어렵다.


그런 관점에서 일본군 ‘위안부’ 이슈는 빨간약을 먹고 나면 굉장히 아프게 다가오는 사실 중 하나다. 학교에서나 언론에서 접하는 내용으로 다들 대충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알면 알수록 그 역사가 가진 무게가 생각보다 훨씬 무겁다는 걸 깨닫게 된다.


‘미투’(#MeToo)의 시초라고 불리는 故김학순 할머니의 공개 증언(나는 일본군 위안부였다)이 어떤 의미였는지 와 닿고, ‘위안부’ 할머니들이 지속적으로 요구하고 있는 일본 정부의 공식적인 사과(번복하지 않는 사죄)와 법적 배상이 더 이상 글자로 들리는 게 아니라 마음을 향해 날아든다.


▶ 영화 <허스토리>(not history, but HERSTORY) 포스터  ⓒNEW


일본군 ‘위안부’ 소재의 영화를 보는 불안감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담은 영화나 드라마가 나온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이슈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겠구나’라는 기대감과 함께 사실 늘 불안감도 들었다. ‘위안부’ 이슈는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서 굉장히 자극적으로 풀어낼 수도 있고, 민족주의 관점에서 소모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성노예 생활을 한 ‘위안부’들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재현’하는 방식에 있어서 논란이 된 영화도 실제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위안부’ 소재의 영화를 보러 가는 과정엔 마음의 문턱 같은 게 있었다. ‘자극적인 장면이 나오지 않을까’, ‘캐릭터를 어떻게 묘사했을까’, ‘전형적인 피해여성 이미지에 가두는 게 아닐까’ 이런 조마조마한 마음과 함께,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를 직면하는 것이 나의 죄책감을 가중시킨다는 부담도 있었다. 영화를 보고 나서 찝찝하고 무거운 감정들에 사로잡히게 될까봐 무서웠다.


<허스토리>(민규동 감독, 2018) 개봉 소식을 들을 때도 마음을 정하지 못했었다. ‘보러 가야 한다’는 마음과 ‘괴로우면 어쩌지’라는 마음이 갈등했다. 하지만 개봉한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상영관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일단 봐야겠다 싶어 극장으로 달려갔다.


※ 이후,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NEW


‘관부재판’을 둘러싼 다양한 여성연대 그려


영화는 ‘관부재판’이라 불리는, ‘위안부’ 및 ‘여자근로정신대’ 피해자 10명이 1992년부터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를 오가며 일본 정부에 사죄와 배상을 청구하는 재판을 진행했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영화에 나오는 인물이나 이야기가 모두 사실을 바탕으로 한 건 아니지만, 주요 인물과 재판 과정 등의 기본 구조는 실제 이야기가 바탕이다.


영화는 부산에서 여행사를 운영하며 잘 나가는 문정숙 사장(김희애 역)이 회사 팀장이 일본인들을 대상으로 한 ‘기생관광’을 운영한 게 적발돼 유치장에 들어갔다 나오는 사건으로 시작한다. 전시 성노예 체제였던 ‘위안부’와, 돈을 매개로 국경을 넘어 싼 값에 여성의 성을 구매하는 ‘기생관광’을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무엇보다 <허스토리>는 처음부터 여성들의 관계와 연대를 조명한다. 문 사장은 안내데스크 여성 직원의 유연하지 못한 대처로 경찰서에 불려갔다 왔음에도, 그 일을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또 부산여성경제인협회 모임에서 요즘 사업이 잘 된다는 친구 신 사장이 겸손하게 손사래 치며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다”고 하자 “여자들은 이래서 안 되는 기라. 왜 다 남 때문이고? 니는 어딨노?”라고 호통을 치고, “협회에 들어오는 신입(여성 사장)들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더 열심히 해야 한다”며 격려한다. 문 사장과 주위 여성들의 관계는 이 영화가 어떤 관점을 담고 있는지 초반부터 전달한다.


<허스토리>는 재판을 이끌었던 단장 문 사장과 할머니들과의 관계와, 할머니들 내부의 연대뿐만 아니라 그동안 정말 보기 어려웠던 다양한 여성들 간의 관계를 보여준다. 무려 이 관계에는 우리 사회에 신화처럼 존재하는 ‘여적여’(여자의 적은 여자) 구도가 등장하지 않는다. ‘여적여’ 없이 어떻게 여성 간 관계를 보여 주냐고 의문을 가졌던 이들에게 ‘내가 보여줄 테니 한번 봐’라고 도전장을 던지듯 말이다.


문 사장과 여성 직원(들)과의 관계는 직장에서 위치가 다른 사람들이 희생, 음모, 배신 없이 서로의 성장을 어떻게 돕고 구축해 나가는지 보여준다. 할머니들을 지원하는 일에 올인하는 문 사장과, 그에게 “언니 진짜 미칫나?”라고 말하는 신 사장의 관계는 다른 영화에서라면 쉽게 ‘여적여’ 구도로 그려질 수 있을 법하지만, 이들은 때론 냉철한 조언을 던지고 그럼에도 든든한 빽이 되는 끈적한 의리를 드러낸다.


싱글맘인 문 사장과 “전 일이 너무 좋아요”라고 하는 워커홀릭 엄마를 둔 딸의 관계는 또 어떠한가. 엄마의 관심을 받지 못해 반항하던 딸이, 엄마가 집까지 팔아가며 ‘위안부’ 할머니들의 재판을 지원하는 일에 모든 걸 쏟아 붓자 엄마를 응원하게 된다는 흐름은 너무 영화적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엄마인 여성과 딸인 여성이 ‘모녀’ 관계에만 머무르지 않고 일방적인 희생이 아닌 ‘여성의 경험’이라는 공통분모 속에서 이해하고 지지하는 과정이 드러났다는 점이 흥미롭다.


▶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NEW


매력적인, 성장하는 여성 캐릭터를 보는 즐거움


문 사장의 매력과 힘은 영화의 큰 주축이다. 당당하고 독립적이며 이기고 싶어 하는 자신의 욕망을 표현할 줄 알고,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이 확고하며 또 그 이유로 주눅 들지 않는 캐릭터는 지금껏 보기 어려웠던 멋있는 여성 캐릭터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과하게 칭송하는 것 아니냐고 해도 어쩔 수 없다. 그는 좀 과하게 멋있다. 단지 잘 나가는 사업장을 이끄는 리더여서가 아니다. 그는 자신의 위치가 어디인지, 그리고 그걸 어떻게 이용할 수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그걸 이용하는 걸 두려워하지도 않는다. 또 시작했으면 이겨야 한다고 말하며 목표를 향해 가차 없이 돌진한다.


“문정숙씨 정말 징그럽네요” 라는 말도 듣기도 하지만, 고집스럽게 그 자리에 머물지 않고 성장해 나가는 캐릭터이기도 하다. 자신의 잘못을 감추고 싶어하면서도, 그게 밝혀졌을 땐 자신에게 책임이 있었음을 인정하고 진심 어린 사과를 할 줄 안다. “내가 지금까지 잘 먹고 잘 산 게 부끄러워서 그런다!”는 말을 밖으로 꺼내며 자신의 수치심과 마주하는 모습은 굉장히 희망적이기도 하다. 주로 ‘억척스러운 아줌마’로 그려지는 중년여성이 고정된 존재가 아니라 성장하고 변화할 수 있으며 입체적인 존재라는 걸 증명하고 있다.


문 사장의 여행사에 근무하는 직원 선영(이유영 역)의 캐릭터도 돋보인다. 영화 초반에 “사장님 죄송해요. 제가 경찰에 연락하는 바람에”라면서 울먹거리는 선영을 볼 때만 해도, 이 캐릭터가 영화에 오래 등장하리라는 예상을 하지 못했다. 이런 캐릭터는 주인공의 성공 서사에 방해가 되는 ‘민폐’ 여성으로 소비되고 끝나는 일이 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영은 꾸준히 등장한다. 여행사 한 켠에 ‘정신대 피해자 신고센터’를 만들었을 때 최초의 전화를 받은 것도 선영이고, 이후 문 사장과 함께 할머니들을 찾아 나서고 할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그는 “저는요, 음식에 벌레가 나와도 아무 말도 못하는 사람이에요” 라고 고백했던 인물에서 할머니들의 증언을 격려하고 적극적으로 지지를 표현하는 인물로 성장한다. 선영이 ‘민폐나 끼치는 여사원’에 머물지 않고 스토리 안에서 성장하는 캐릭터로 그려진 점이 참 좋았다.


▶ 영화 <허스토리의 한 장면.  ⓒNEW


적어도 우리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


영화를 보면서 역시나 울었다. 할머니들의 법정에서의 증언 장면을 비롯해서 3번은 운 것 같다. 하지만 괴롭지만은 않았다. 여전히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고 일부 승소 판결을 얻었던 재판이 결국 항소에서는 패소했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라렸고 화가 나고 답답했지만, 영화관을 나오면서 힘이 났다. 이렇게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조금 신이 났던 것 같기도 하다.


영화 자체도 재미있었지만 너무나도 오랜만에 이렇게 다양한 연령과 각기 다른 위치에 놓인 여성들이 모여 내는 목소리와 연대를 영화관에서 봤다는 사실이 즐거웠다. 그들이 보여준 삶의 방식과 메시지가 날 들뜨게 한 것이다.


한편으론 그렇기 때문에 다시 반성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내가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관해 부채감이 들었던 건 ‘나 하나로 바뀌지도 않는데, 내가 뭘 할 수도 없고…’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문 사장의 “세상은 안 바뀌더라도 우리는 바뀌겠지예” 라는 말은 그 생각을 뒤집었다. 나와 우리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을, 그 힘을 간과하고 있었구나.


누군가 나에게 이 영화를 한 마디로 설명하라고 한다면 ‘위안부’ 영화라고 하기보다는 ‘임파워링’ 영화라고 말할 것 같다. 또 그 어떤 영화보다 답답한 지금 우리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 줄 여름영화이기도 하다.


기사에서 할머니들의 캐릭터와 그들의 연대를 굳이 언급하지 않은 건, 그 부분은 직접 영화를 보고 느끼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다. 영화를 보시라. 그리고 바뀌는 우리가 더 많아져서 ‘허스토리’가 여기서 멈추지 않았으면 좋겠다. 약 한달 남짓 남은 8월 14일은 세계 일본군 위안부 기림일이다. 잊지 말자.  (박주연 기자)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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