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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울지 않아, 내 인생은 이미 망가졌으니까…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말하기> 내 몸에는 흉터가 많다(하)



<일다>의 지면을 빌어 독일에 살고 있는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를 전하기로 했다. 베를린에 있는 정치 그룹 국제여성공간(IWSPACE, International Women Space)에서 발행한 책자 <우리 자신의 언어로–독일 난민 여성들의 이야기>에 수록된 11편의 이야기를 번역해 소개한다.


각각의 이야기는 이주 여성과 난민 여성들로 구성된 팀이 다른 난민 여성들을 인터뷰한 내용을 1인칭 시점의 에세이로 재구성한 것이다. 이들 다수가 망명신청자(asylum-seeker) 신분이며 이라크, 사우디아라비아, 아프가니스탄, 마케도니아 등 분쟁 지역에서 자유와 안전을 찾아 국경을 넘은 이들이다. 첫 번째 이야기 “내 몸에는 흉터가 많다”(I have many scars on my body)의 주인공은 아프가니스탄 출신의 여성으로, 이름은 공개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노르웨이에서 망명을 거부당하다


노르웨이에 도착했을 때 난 생각했다. ‘그래, 이제 모든 문제는 끝난 거야.’ 날 잡아먹으려던 전남편도 없고 이란 사람들도 없었다. 이란에 있을 때 우리 가족은 이란 사람들의 아프간 혐오 때문에 살기 힘들었다. 두 나라 사람들은 서로 잘 지내지 못한다. 이란인들은 우리가 아프간 사람인 걸 알아채고 내게 “저 아프간 당나귀 좀 봐라”라고 말하곤 했다. 노르웨이에선 더이상 당나귀 소릴 듣지 않아도 되고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하면서 죽이겠다고 협박하던 전남편도 없으니 좋았다. 정말 행복했다. 그 때가 2009년이다.


그런데 끝이 아니었다. 노르웨이 당국은 우리가 ‘더블린 케이스’에 해당된다며 그리스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일 년이 지나고는 그리스에서 지문 정보가 넘어왔으니 망명 심사 면접을 보라고 했다.


※더블린 조약(Dublin Regulation)은 유럽으로 유입되는 난민의 망명 처리에 대한 조약으로, 1990년 유럽 12개국이 체결하고 1997년 처음 발효되었다. 핵심 내용은 난민들이 처음 입국한 국가에서 자격 심사를 받아야 한다는 것으로, 다른 유럽 국가에서 중복 신청을 할 경우 처음 입국한 국가로 이송된다는 것. 중복 신청을 막아 심사 효율성을 높이고 난민들의 ‘망명지 쇼핑’을 방지하자는 취지였다. 또 망명 신청을 받은 국가가 난민 보호 책임을 회피할 수 없게 한다는 목적도 있었다. 그런데 곧 갈등이 불거졌다. 난민들 다수가 이탈리아와 그리스, 헝가리 같은 유럽연합 경계의 국가로 처음 들어오기 때문에 이들 나라에게 책임이 과중된다는 점이다. 난민들 입장에서는 특정 국가로의 망명하려는 의사가 전혀 존중되지 않는다는 문제도 있었다.


독일은 2015년에 더블린 조약을 깨고 시리아 난민에 한해 전면 수용을 발표했다가 철회한 바 있고, 유럽연합은 2011년에 그리스의 인권 상황이 열악하다는 이유로 그리스 송환 조치만은 예외적으로 중단한 적이 있다. 이 글의 화자가 도착한 2009년은 노르웨이가 더블린 조약에 가입하기 전이므로, 당국은 조약을 거짓 근거로 사용한 것 같다. 더블린 조약은 몇몇 개선점(개별 인터뷰 의무화, 항소권 보장, 무료 법률지원 의무화, 가족 재결합 원칙 등)을 새로 포함하기도 하면서 현재까지 효력을 미치고 있다. 대안으로 논의되던 ‘난민 쿼터제’(인구 수, 경제 지표, 이전 난민 신청자의 수치 등을 고려하여 각국의 난민 수용치를 할당하는 제도) 법안은 2015년 유럽의회에서 통과된 상태다. 


▶ 더블린 조약의 모순을 꼬집는 풍자만화 한 컷. (출처: 유럽위원회 Council Europe ⓒPANCHO)


※난민의 지문 채취는 2003년 1월부터 유럽연합에서 시행해온 유로닥(European Dactyloscopy; Eurodac) 시스템을 근거로 한다. 유로닥은 더블린 조약 시행을 보조하는 역할로, 14세가 넘은 모든 망명 신청자 및 비합법 이민자들의 지문을 데이터베이스화 해서 이들의 이동 경로를 파악한다. 이러한 생체정보 데이터베이스 제도가 윤리적 측면에서 논란이 된 것은 물론이고, 난민 수용을 회피하고자 의도적으로 유로닥 사용에 태만한 국가들도 있어 실효성에도 의문이 제기돼 왔다. 일부 난민들은 유로닥이 자신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할까봐 손가락 지문을 스스로 불태워버리기도 한다고 알려졌다.


나는 면접에서 전남편과 관련해 겪었던 모든 문제를 설명했고, 결혼과 이혼에 대한 서류도 제시했다. 전남편이 마약 거래로 재판을 받았고 경찰에도 수차례 체포됐었다는 증거도 보여줬다. 모든 걸 다 내밀었는데도 면접관들은 나를 믿을 수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당시 우리 아버지는 알츠하이머형 치매가 와서 점심에 뭘 먹었는지도 기억을 못했다. 면접관들은 “당신은 유리가 흰색이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검은색이라고 하네요. 서로 맞질 않습니다” 라고 했다. 나는 반복했다. “아니에요. 전남편이 어땠는지 다 설명했잖아요. 그 사람이 내 뱃속에 있던 아이까지 죽였다고요. 서류 다 보여줬잖아요.” 그들은 날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결국 5년 뒤, 작년 3월에 경찰이 새벽 5시 반에 우리 숙소로 들이닥쳤다. 5년이면 알다시피 긴 시간이다. 경찰은 노르웨이 당국이 우리 이야기를 인정하지 않았으니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그리고 우릴 감옥으로 보냈다. 전남편이 날 찾아낼 게 분명하고 날 또 공격하고 죽이려할 게 뻔한 곳으로 돌려보낸다는 건, 해도 너무 했다. 나는 자살을 시도했다. 감옥에서 손목을 그었다. 노르웨이인들은 화를 잘 낸다. 정황이 잘 기억나진 않지만 그 사람들은 길길이 날뛰면서 손목을 그은 내게 말했다. 내가 죽어도 자기들은 상관없다고, 그래도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낼 거라고. 나는 울기도 많이 울고 죽고 싶어 스스로를 때리기도 했다. 노르웨이 사람들은 그런데도 눈 하나 깜짝 안 했다. 5주 동안 감옥에 있어야 했지만 이송은 되지 않았다. 우리 어머니를 못 찾았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과 노르웨이 간 합의 조항에는 함께 온 가족 중 한명이라도 없으면 나머지도 못 돌려보낸다는 내용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프가니스탄으로 송환되는 게 두려워서 덴마크로 도망쳤다. 엄마도 내 전남편을 무서워했다. 나머지 가족들은 감옥에 있고, 어머니가 덴마크에 숨어 있는 동안 변호사는 우리에게 재심 청구를 권해서 우리는 거기 돈을 꽤 들였다. 첫 번째 판결은 긍정적이었다. 판사는 우리가 증거 문서를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재심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이후 법정에서 여러 차례 심리(hearing) 끝에, 결론은 우리가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야 된다는 쪽으로 뒤집혔다. 그들은 우리 말을 믿을 수가 없고, 문서는 위조라고 했다.


우리는 8만 크로나를 들여 지난 해 9월 다시금 재심을 청구했다. 이번에는 체류 허가가 분명히 나올 것이란 희망에 차있었다. 하지만 마지막 심리 2주 후에 변호사는 전화로 결과를 말하길 우리가 또다시 망명 거부를 당했고 이제는 정말 돌아가야 된다고 했다. 난 너무 겁이 났다. 아버지는 한 달째 병원에 있었다. 우울증이 극심해서 전기충격 치료를 받은 상태였다. 나는 아버지에게 이대로 있다가는 송환될 테니 노르웨이를 떠야 한다고 했다. 주치의에게는 아버지를 모시고 가서 커피 마시고 오겠다고 하고, 그 길로 블랙 택시를 타고 독일로 향했다. 거금을 들여야 했다.


※난민 인정 절차는 크게 난민 인정 신청, 심사, 결정 및 통보의 단계로 구분된다. 유엔난민기구가 정한 난민 기준은 ‘종교적 신념이나 사상이 다르다는 이유, 인종이나 국적, 사회적 특수 집단 등의 사유로 박해를 받는 사람’이다. 망명 신청자들은 본국을 급하게 떠나오느라 ‘객관적인 증거’를 제출하기 어려워, 면담 내용을 ‘결정적인 자료’로 보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이는 원칙일 뿐 화자처럼 진술 내용의 신빙성이 떨어진다며 심사에 탈락하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독일에서 난민-이주민 여성들이 3개 국어로 직접 발행하는 잡지 <Stimme>(목소리) 1호에는 망명 신청 시 요령을 알려주는 기사가 실렸다. 진술만으로는 인정이 잘 안되니 휴대폰에 사진과 비디오, 이메일, 진료기록, 신문기사, 페이스북 메시지, 증인까지 가능한 모든 것을 동원하라고 했다. 분위기에 주눅 들지 말고 할 말을 다 할 것, 면접관들은 며칠이 걸리더라도 이를 모두 들어줄 의무가 있으며 변호사 선임이 가능하다는 내용도 있었다.


2015년 9월 9일자 허프포스트코리아 보도(한국도 난민을 더 받아들여야 하는가?)에 따르면, 한국은 아시아 최초로 난민법을 제정하고 시행한(2013년 7월) 국가이긴 하지만, 2014년 기준 3천 건에 달하는 망명 신청 중 수용률은 겨우 4.2% 에 그쳤다. 협약국 평균치는 38%이다.


그래도 노르웨이에서 내 처지가 다른 가족들보다는 나았다. 거기선 망명 신청자들, 특히 성인여자들에 대한 제한이 심하다. 미성년이 아니니 학교에 갈 수 없고, 그렇다고 다른 데 자유로이 갈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예를 들어 지금 두 분이 난민 숙소로 찾아와서 이렇게 내 얘기를 듣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것이다. 정말 차가운 사람들이다.


우리 가족의 망명 심사 때 4명의 의사가 증인으로 왔었다. 법원이 우리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 그래서 아프가니스탄에 돌아가도 가족을 부양할 처지가 못 된다는 것을 안 믿어서였다. 아버지의 주치의가 법정에서 증언할 때 판사에게 말했다. “이 남자 분은 정말 건강상 문제가 있습니다. 저희 4명의 의사가 이 분 케이스를 맡고 있어요. 어떻게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제가 의사로서 하는 말을 안 믿습니까? 판사가 있고 경찰이 있듯이 저는 의사입니다. 아픈 사람은 경찰 조사나 재판에 못 갑니다. 의사한테 갑니다.” 주치의 선생님은 자기를 안 믿어주는 법 당국에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법원은 아버지가 아프다는 것은 결국 인정했지만 그래도 나머지 가족과 같이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다. 가족을 갈라놓는 것은 인권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처음에는 아프다는 것을 증명하면 체류 허가가 날 거라고 하더니, 주치의까지 법정에 나서 증명이 되고 나니 아프다는 것은 믿지만 나머지 가족은 돌아가야 하고, 아버지를 빼고 보내는 것을 옳지 않으니 다 같이 가야한다는 논리였다. 미칠 노릇이었다. 이게 바로 우리가 독일로 달아난 까닭이다. 우리는 가는 길에 덴마크에 들러서 어머니를 픽업했다.


▶ 2015년 ‘유럽 난민 위기’ 당시 난민들의 주된 유입 경로를 보여주는 지도. (출처: ⓒBusinessinside.com) 유엔 난민기구에 따르면 시리아(388만 명)와 아프가니스탄(259만 명), 소말리아(110만 명)가 3대 난민 최다 배출 지역이다.


어머니는 덴마크에 있던 8개월 동안 집 밖을 나오지 않았다. 누구 눈에 띄어 체포될까봐 두려워 말 그대로 집안에만 있었다. 어느 아프간 가족 집에서 빨래하고 밥해주면서 집안에서만 살았다. 나라면 하루라도 밖에 안 나오면 병이 날 듯 한데 어머니는 그 긴 시간을 못나왔다.


독일로 도망쳐온 지 3주, 앞으로 내 삶은 어떻게 될까


독일에 온 지 이제 3주가 지났다. 나는 남동생과 진지하게 대화를 좀 했다. 동생은 우리가 노르웨이로 갈 당시 15살이었는데, 거기서 한동안 친구를 많이 사귀고 학교도 다녔다. 친구들과 파티에도 다녔다. 그 애는 그 모든 걸 한순간에 빼앗겨버렸다. 우리와 똑같이 이런 문제들을 겪기에 내 동생은 너무 어리다. 그 애는 지금도 많이 불안해하고 노르웨이에 대한 반감이 심하다. 방금 계단에 있던 그 애를 보셨듯이, 누구든 동생이 많이 우울하고 불안하다는 걸 쉽게 알 수 있다.


독일에서도 우리에게 또 어떤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노르웨이 정부가 우리 지문을 갖고 있으니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 독일에서 우릴 노르웨이로 보내버리면 아예 유럽에서 추방당할 것이다. 노르웨이에서 이미 출국 명령 편지를 받았다. 지금으로부터 2주 전 어느 날이 기한이었다. 그 날짜 이후에 노르웨이에서 발각되면 우리는 ‘쉥겐 조약’ 위반 명목으로 2년을 복역해야 한다.


※쉥겐 조약은 더블린 조약 체결의 배경이 된 국경개방 조약이다. 26개국(유럽연합 22개국과 기타 4개국)을 하나의 솅겐 국가(Schengenland)로 간주하고 이 영역 내에서는 국경 검문과 검색을 하지 않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비회원국에서 온 사람들은 솅겐 지역 입국 시 첫 입국 국가에서 심사를 받으면, 6개월 이내 90일간은 회원국 내를 자유롭게 통행할 수 있다. 화자의 경우 노르웨이에서 체류권을 연장하지 못하고 독일로 왔는데, 같은 쉥겐 지역인 독일에서 망명 신청을 하기까지 무단 체류했으므로 조약 위반이 된다.


슈판다우(베를린 구 중 하나)에서 했던 망명 신청 면접에서 나는 그 종이를 보여주면서 제발 뭔가 해달라고, 노르웨이로 보내지는 말아달라고 간청했다. 거기선 우리 케이스를 다시 봐주지 않을 거고 곧바로 아프가니스탄으로 송환할 텐데 거긴 못 간다고. 내가 가족을 돌봐야 한다고도 말했다. “난 한 사람, 한 명의 여자에 불과해요.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가족 세 사람을 혼자서 돌볼 순 없어요. 그리고 제일 중요한 건, 거기 돌아가면 전남편이 날 찾아낼 거예요. 아프가니스탄은 사람들이 서로를 모르는 독일이나 노르웨이 같지 않아요. 거기선 사람들이 서로 다 지켜보고 있어요. 사람들은 누가 누구고 누가 어디로 가는지 다 알고 싶어 해요. 돌아가면 전남편이 분명히 날 찾아내서 자기 아내가 되든가 자기 손에 죽으라고 할 거예요.”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아 듣는 분들께 미안하다. 그런데 내 얘기를 정말 꼭 해야 했다. 14살 이후로 내 인생이 이렇게 흘러왔다. 지금 나는 24살이다. 아, 곧 25살이 된다. 이런 게 인생, 때로는 좋고 때로는 나쁜 내 인생이다. 아프간 사람들이 저지르는 실수는 여자애들에게 자기 남편을 직접 택하게 하지 않고 부모가 고른다는 것이다. 아프간 사람들은 20살 넘고도 결혼안한 여자를 두고 무슨 문제가 있어서라고 단정 짓는다. 내게 힘이 있었다면 맨 먼저 이런 아프간 사람들의 사고방식부터 뜯어고쳤을 것이다. 그게 미래세대 아프간 사람들을 위해 낫다고 생각한다. 아마 10세대쯤 걸릴 것이다. 사람들은 변화를 원하지 않는다.


독일에 오고 나서 지난 월요일, 망명 신청 면접을 볼 때 25개의 질문을 받았다. ‘독일 어디에 있었나?’ ‘어떻게 거기에 갔나?’ 같은 질문들. 우리가 실수한 점은 ‘쉥겐 조약’이 적용되는 한 국가(노르웨이)에서 다른 국가(독일)로 옮겨갔다는 점이다. 규정을 위반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 상황으론 정말 어쩔 수가 없었다. 노르웨이에서 지문을 채취를 했냐는 질문도 있어서, 나는 그렇다고 했다. 독일 당국은 노르웨이를 떠난 이유를 물었다. 떠나라고 해서. 나는 아프가니스탄 송환 조치에 대한 경고가 담긴 마지막 편지를 보여줬다. 송환당할 게 두려워서 독일로 왔다고 말했다. 망명 심사국에서 그 문서를 중요하게 볼지는 모르겠다.


내가 알기로는 우리 케이스가 심사 대상에 들어가는지에 대한 편지부터 우선 받게 될 것이다. 만약에 탈락하면 항소를 할 수 있는 시간이 2주 주어진다. 심사 대상이 되었는지에 대한 두 번째 편지는 6개월 쯤 있으면 올 것이다. 또 탈락하면 변호사가 재심 청구를 하고, 그러면 우리는 직접 법정에 가서 왜 노르웨이를 떠나야했는지 자기변호를 할 것이다. 이게 일반적인 방식이고 앞으로 일어날 일이다. 하지만 잘 될지는 모르겠다. 쉥겐 조약을 어긴 게 문제가 될 것은 확실하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어떤 마음인지 이해 못해”


노르웨이에 살 때 우리 가족은 개종했다. 이슬람교였는데 그 때 이후로는 더 이상 아니다. 탈레반(Taliban)이나 대쉬(Daesh)과 같은 무슬림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이제 와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게 되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기독교로 보고 죽일 것이다. 이렇게 간단하다. 개종했다는 이유로 우린 살해당할 것이다. 돌아가면 우리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걱정되는 점들이 너무 많다. 독일 당국도 이렇게 생각해주길 바랄 뿐이다.


노르웨이에 있을 때 사귄 한 아프간 친구는 노르웨이에서 망명을 거부당해 아이와 함께 독일로 갔는데, 거기서는 3개월 뒤에 노르웨이로 돌려보내서 거기서 재심사를 또 받았다. 독일로 가는 건 규정 위반이라며 우선 두 달 간 형을 살아야 했고, 이후에 결국 망명 거부를 당해 아프가니스탄으로 보내졌다. 아직 연락을 하고 있어서 아는데, 그들은 지금 파키스탄에 있다. 내 친구는 젊고 아름다운 여자였는데 더 이상 처녀가 아니고 애도 있어서 아프가니스탄으로 돌아가기 두렵다고 했었다. 남자 없이 혼자 아이를 데리고 있는 걸 보면 남자들은 죄다 그녀를 먹잇감으로 보고 ‘저런 여자랑은 무슨 짓을 해도 된다’고 할 테니까. 노르웨이에서는 문제가 안 되는 ‘아이 있는 여자’라는 처지 때문에 그녀는 돌아가길 무서워했다.


이렇게 말하는 게 옳은 건지 모르겠지만, 노르웨이 사람들은 현 집권 당에 불만이 많다. 인종차별이 심한 당이다. 17살짜리 남자가 있었는데 사고를 당해 다리를 한쪽 잃었다. 휠체어가 필요한 미성년자였는데도 당국은 그 애를 비행기에 태워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보냈다. 3일 전에 노르웨이에 있는 아프간 난민들의 커뮤니티 사이트에서 읽었는데, 애 셋을 데리고 있던 여자도 송환됐다고 한다. 노르웨이는 난민들을 강제 추방시키고 있다. 소말리아인가, 국가는 확실치 않지만 여하튼 아프리카에서 온 한 여자는 난민숙소에 살다가 아이를 낳았는데, 아이 낳고 병원에 있는 여자를 그대로 비행기 태워 아프리카로 돌려보냈다. 이런 게 새로운 법이다.


독일에 오기 전에 나는 밤에 잠들 때마다 경찰이 들이닥칠까 봐 겁이 났다. 난민 추방 인력은 주로 새벽 5시 반에 온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 시간에 휴대폰 알람을 맞춰놨었다. 알람을 듣고 깨어 침대에 앉아서 경찰이 오나 안 오나 마음 졸이고 있다가 7시가 되어서야 ‘아, 안 오는 구나’ 하고 다시 잤다. 그게 내 생활이었다. 독일에 오고는 다시 좀 맘 편히 자기 시작했다. 8, 9개월 동안이나 잠을 설쳤는데 이제야 경찰이 들이닥치지 않는다는 게 실감난다. 노르웨이에서 새벽에 체포될 때 나는 옷이나 소지품을 가져갈 수 있냐고 물었는데 경찰은 그랬다. 그냥 겉옷이나 입으라고.


▶베를린의 여성센터 아피다멘토(Fruenzentrum Affiamento)에서 본 전시회 포스터. 터키 출신 여학생들이 조혼 및 강제 결혼을 주제로 그린 작품 10여점이 전시되고 있었다.


남동생은 언젠가 물었다. “우리 가족한테는 왜 이렇게 문제가 많은 거야? 다른 가족들도 다 그래? 우리 엄마는 왜 의사가 아니야? 아빠는 왜 엔지니어가 아닌 거야?” 나는 대답했다. 이게 우리 인생이고 우리 가족이라고, 이 분들이 우리 어머니 아버지니까 그대로 사랑해야 된다고. 사람은 저마다 다 다르고 다른 사정이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있지 않은 것만으로도 우린 괜찮다. 내가 여기 이렇게 앉아서 여러분과 얘기하고 있다.


한 3, 4년 전에 한 아프간 여자 얘기를 들어보신 적 있는지? 남편에게 제발 그만 때리라고 했을 뿐인데 코가 잘린 여자. 지금은 미국에 있다. 나는 더 이상 아프간 사람들처럼 살고 싶지 않다. 5년 전에 노르웨이에 처음 갔을 때 나는 의사표현을 잘 못했었다. 지금은, 예를 들어 어떤 남자가 내게 손대려고 하면 난 그만두라고, 하지 말라 말한다. 내겐 내 삶이 있고 자유가 있으니까. 남자들이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내게 뭐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시절이 있지만, 노르웨이에서 많이 배웠기 때문에 지금은 그렇지 않다. 이제 누구도 날 해치게 두지 않는다. 이제 내가 강한 여자처럼 보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내 안에는 아직 15살짜리 여자애가 있다. 불안을 가라앉히고 새 삶을 시작하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 강한 사람처럼 보이지 않으면 사람들은 날 함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학대해도 되는 아주 불쌍한 여자라고 생각할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 동생은 아직 배우지 못한 많은 걸 배웠다. 남동생은 3주 전쯤 사는 게 지겨웠던지 벽에 머리를 박으며 죽고 싶다고 했다. 요즘 나는 세상을 다르게 본다. 예를 들어 핸드폰이 고장 났다. 그 때 내가 울더라도 고장 난 상태는 똑같다. 우는 게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다. 내가 별 걱정을 안 하고 있거나 심지어 좋아해도 망가졌다는 것엔 변함이 없다. 그러니 나 스스로를 해칠 필요가 있나? 내 인생은 이미 망가졌었다. 스스로를 추스려서 더 이상은 망가뜨리지 않는 게 낫다. 동생에게 이걸 가르쳐주려 한다.


우리 인생이 이렇다. 선택권이 없다. 별 힘도 없다. 나는 우리 가족의 운명을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만일 그럴 수 있었다면 ‘당신들은 독일에 머물러도 됩니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난 할 수 없다. 그래서 나는 동생에게 이게 우리에게 주어진 삶이니 어떻게든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네가 자해하고 자살시도를 하는 건 너 스스로를 더 망가뜨리는 거야. 그러다 네가 정말 가버리면 나는 한 2,3년은 슬퍼하겠지. 하지만 결국엔 널 잊어버릴 거야. 더 이상 내 삶에 없을 테니까. 나는 내 인생을 계속 살고 있을 거고. 그러니까 그런 생각하지 마.” 동생은 그런다. “누나는 너무 태평해. 걱정이 없어.” 나는 또 답한다. “나도 걱정을 하지. 그런데 다른 사람한테 네가 화나고 불안하다는 걸 내보일 필요는 없어. 다른 사람들은 우리가 속으로 어떤 마음인지 이해 못해.”


내 동생은 나보다 세 살 아래인데, 꼭 15살 같다. 생각하는 게 아직 어린애 같다. 내겐 남자형제가 둘이다. 원래 셋이었는데 하나는 탈레반에 살해당했다. 탈레반과 대적하던 다른 조직에서 일하다가 목이 잘렸다. 오래 전 일이다. 다른 오빠도 그 조직에서 일했지만 도망쳐서 목숨을 건졌다. 처음엔 러시아로, 거기서 덴마크와 독일을 거쳐 노르웨이로 가서 체류허가를 얻었다. 내게는 호주에 사는 여자형제도 있다. 사실 언니가 둘 더 있는데 10년 넘게 소식을 모른다. 아버지가 둘 다 12살 때 시집을 보냈기 때문이다. 아프가니스탄에서 결혼한 여자는 시집 사람이 되고, 시집의 허락이 있어야 친정을 올 수가 있는데 허락을 못 받아서 못 온다. 우리가 아프가니스탄과 이란을 오가는 동안 언니들 소식이 끊겼다. 아프가니스탄에 있는 아버지의 오랜 친구가 말해주길, 이란에서 우리 언니를 봤다고 했다. 그 언니는 나보다 세살 위인데, 내가 알기로 지금 딸이 넷이다.


나도 안다. 내가 운이 나빴다는 걸. 나는 운이 정말 정말 나빴다. 여자로 태어난 것, 더구나 아프간 여자로 태어난 것. 남자였다면 훨씬 나았을 것이다. 아프간에서 여자로 사는 것은 감옥살이나 마찬가지다. 정말 감옥과도 같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어쨌거나 노르웨이로 간 이후로 우리 가족은 많이 변했다. 많이는 아니지만 조금은 개방적이 되었다. 지금도 남자들과는 못 어울리지만 여자 친구들이랑은 외출할 수 있다. 술 마시고 디스코텍에 가는 건 여전히 안 된다. 커피나 차 마시러는 갈 수 있다. 그래도 난 내가 하고 싶은 걸 하는 편이다. 나는 부모님이 두려운 게 아니라 그냥 존중하는 것이다. 인간 사회에 살면서 우리는 서로 존중해야지, 동물처럼 살 순 없다. -끝-


▶베를린의 여성센터 아피다멘토에서 열린 터키 출신의 여학생들의 그린 작품 전시회 중에서 귤베이(Osman Enes Gülbay)의 작품. 이 글의 화자가 말한 ‘감옥에서 사는 듯한 삶’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번역자 노트] 망명 심사, 잔혹한 진실 게임


14살에 강제 결혼하고 가정폭력과 유산, 살해 위협까지 당했던 18살 소녀가 어울리던 친구들을 잃고 감옥에 다녀온 15살짜리 남동생을 ‘이런 일을 겪기엔 너무 어리다’고 가여워한다. 그 소녀는 24살이 되어 면접관들에게 호소한다. ‘나는 나약한 한 인간이지만 내가 우리 가족을 돌봐야한다’고. 이 소녀는 아버지에게 순종하느라 원치 않는 결혼을 했지만, 그 아버지에게 칼이 날아올 때는 망설임 없이 제 몸을 던져 막았다. 그것을 알게 된 나는 더없이 속이 상해 울었다.


시간이 흘러 쇠잔해진 아버지가 우울 속을 헤매자, 그녀는 이번에는 가장을 자처한다. 그 때 나는 큰 바위처럼 거대하고 위엄이 있게 된 그 여자의 환영을 봤다. 뿌리 깊은 가부장 나무는 사실 자주 실패한다. 제 팔 아래 그리 두꺼운 그늘을 드리웠어도, 힘없는 한 여자아이가 틈새를 뚫고 햇빛을 향해 높이 자라는 것을 막지 못한다. 우리가 읽은 이야기는 그래서 생존기일 뿐 아니라 성장기다. 한 여자의 아주 잔혹한 성장기다.


사실 “내 몸에는 흉터가 많다”를 붙들고 있는 내내 의문점이 있었다. 바로 ‘이 가족에게 합법적인 이주는 불가능했을까?’ ‘왜 불가능했을까?’라는 것. 국경을 넘고 망명 심사를 하는 과정에서 꽤 큰 비용을 들였다고 했고, 가족 중에 아프간 정부 당국에 쫒기는 수배자가 있었던 것도 아닌 것 같다. 이렇듯 가난이나 도주 때문이 아니라면 정상적인 이주 경로를 밟을 수 있어야 하는데 왜 밀입국을 할 수밖에 없었는지 이해가 잘 안되었다. 아프가니스탄이 내전 중이긴 하지만 민주국가의 꼴을 갖추고 있고 유럽 국가들과 수교도 맺어져 있는데, 국민의 이주 권리는 전혀 보장되지 않는 걸까? 수도 카불에는 노르웨이 대사관이 있는데, 이민은 안 된다 해도 취업이나 어학 명목의 비자를 받을 수는 없었을까? 도대체 정부 기능이 얼마나 엉망인 걸까? 지금도 정확한 답은 모른다. 내가 상상할 수 있는 삶, 내가 상식이라고 여겼던 앎의 경계 바깥에서 어마어마한 수의 사람들이 어마어마한 일들을 겪으며 살고 있다는 것만 재차 확인했다. 앞으로 만나게 될 다른 여성들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길 기대한다.


논리와 문서와 숫자로 따진다면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그녀의 이야기에는 분명 있다. 망명 심사에서 진실 공방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것은 제도와 절차, 판결 등이 바로 그런 것들에 기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굴러가는 시스템은 과연 공정한가? 그리도 정확한가? 진실은 단 하나인가? 문득 망명 심사국에서 일하는 사람들도 악몽에 시달릴지 모른다는데 생각이 미쳤다. 그들은 매일 같이 절망, 폭력, 죽음의 기억을 읽는다. 필사, 호소, 고통의 말들을 듣는다. 그리고 그 말들에 언제나 참 또는 거짓이라는 판결을 내려야 한다. 이 또한 잔혹한 악몽이 아닌가? 꿈에서 사람들은 수건돌리기 게임을 한다. 무엇이 참인지 거짓인지 끝내 결코 알 수 없지만 누군가는 거짓을 받아야만 해서, 술래는 끝없는 혼란과 죄책감을 반복하는 잔혹한 게임을.    페미니스트저널 <일다> 바로가기


[필자 소개] 하리타- 독일살이 4년차. 온갖 차이와 차별에 대한 감각이 여전히 곤두서있다. 일다에 <29살, 섹슈얼리티 중간정산> 칼럼을 연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오늘부터 내 몸의 이야기를 듣기로 했어-더 자유로운 페미니즘을 위하여>(2017, 동녁)를 썼다. 독일 프라이부르크에서 환경사회학을 공부했고, 이제 베를린에서 여러 창작 활동을 해나가려 한다. 하리타는 산스크리트어로 ‘초록’이다. facebook.com/haritamoonrid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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