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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의 경험, 몸이 말하는 페미니즘

<치마 속 페미니즘>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대하여


※ 글 쓰고 그림 그리고 퍼포먼스를 하는 예술가 홍승희 씨의 섹슈얼리티 기록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 여성학을 배운 남친, 임신중절수술, 빈곤, 외로움

 

5년 전, 한 포럼에서 그를 만났다. 정의로운 가치를 추구하는 그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았다. 세상을 바꾸는 실천, 페미니즘에 대한 생각, 일상의 소소함과 삶의 고민을 나누면서 서로에게 서서히 끌렸다. 그는 외국에서 평화학과 여성학을 공부하던 학생이었다. 재작년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우리는 종종 만나 고민을 나눴다. 그는 어머니가 집안일에 대한 잔소리가 심하고, 아침 일찍 깨우고 자신의 일정에 간섭을 한다고 답답함을 토로했다. 일찍이 부모님과 떨어져 생활한 나는 집을 나오는 것도 좋을 거라고 조언했다. 그는 오랫동안 고민하더니 부모님에게 편지를 남기고 집을 나왔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 살게 되었다.

 

그는 사르트르와 보부아르 같은 관계를 꿈꿨다. 나도 그랬다. 우리는 폴리아모리(비독점적 다자연애)를 지향하면서 서로를 존재로 사랑하려고 노력했다. 학자가 되는 것이 꿈인 그는 5월 초 대학원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공부하면서 소소한 일상을 즐겼다.

 

그와 삽입섹스는 잘 맞지 않았다. 관계를 하고 나면 아파서 근육통이 생겼다. 그는 콘돔을 꾸준히 사용하다가, 가끔 콘돔을 빼고 질외사정을 했다. 그렇게 삼 개월 쯤 생활했을까. 식은땀이 나고 소화가 잘 안됐다. 며칠간 계속되는 복통에 임신테스트기를 해보았다. ‘설마… 임신은 아니겠지.’ 테스트기 빈 공간에 희미하게 두 줄이 드러나더니, 붉은 줄이 선명해졌다. 평소에 그와 대화를 나눴던 것처럼, 우리는 아이를 낳을 생각이 없었다.

 

예비군 훈련에 가있는 그에게 연락했다. “나 임신했어.” 그는 “승희는 어떻게 하고 싶어?”라고 물었다. “수술해야지.” 그는 내일 일찍 들어가겠다고 했다. 뒤늦게 알고 보니, 그는 친구와 술을 마시고 있었다. 그에게 다시 전화해 말했다. “이건 우리 둘이 함께 책임져야 하는 일이야. 지금 올 수 있으면 와줄래?” 그는 알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늦은 시간 집으로 돌아온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임신중절수술 자체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지만 처음 해보는 수술이라 긴장됐다. “그냥 애 낳을까?” 내가 물었다. “아니.” 그의 목소리가 단호했다. 그가 아이를 낳자고 했어도 나는 임신중절을 할 생각이었는데도 서운했다.

 

그는 수술비용이 얼마나 될지 걱정했다. 학교를 졸업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는 경제적 여력이 안됐다. 돈이 없는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내가 수술을 받으러 병원에 갈 때까지 친구들에게 전화해 돈을 빌렸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부모님에게 솔직하게 말씀 드리는 건 어떨까?” 그러나 그는 부모님에게 연락하기를 거부했다.

 

초음파 화면에 까만 세포덩어리가 보였다. 6~7주 된 것 같다고 한다. 비용은 현금으로 55만원. 짧은 수술 시간이 끝나고 회복실로 옮겨졌다. 회복실에는 노란 햇빛이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친구는 수술비를 마련하기 위해 밖으로 나가고 없었다.

 

병원에서 나와서, 햇볕이 내리쬐는 거리를 그의 팔에 의지해 걸었다. 머리가 복잡했다. 5월 초에 그는 시험을 앞두고 있는데, 3주 전에 내가 이렇게 수술을 하게 되다니… 그가 나를 간호하기 부담스러워하지 않을까. 나도 그에게 서운해질까 봐 지레 걱정이 됐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누웠다. 무슨 말을 할 기력도, 일어날 힘도 나지 않았다. 그는 내 앞에 앉아 노트북을 켜고 공부를 했다. 그에게 방해가 될까봐 나는 자는 척 했다.

 

아침에 일어나 그에게 부탁했다. “미안한데, 미역국 좀 끓여줄 수 있어?” 그는 마트에서 이것저것 사와 미역국을 끓였다. 국을 먹으며 나는 말했다. “대학원 시험 준비로 힘들겠지만 적어도 한 달 동안은 고통을 분담해줘. 내가 몸이 회복될 때까지 만이라도.” 그는 믿음직한 표정으로 알겠다고 대답했다.

 

그가 부엌에서 전화 통화를 하면서 냄비에 미역, 물, 들기름을 넣고 끓이고 있었다. 그가 친구에게 연구계획서를 아직 못쓰고 있고, 일이 많아서 힘들다고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미역국은 따뜻하지만, 밥상에는 온기가 없었다. 표정 없는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눈물이 뚝 떨어졌다.

 

이 아픔을 함께 짊어지기에는, 대학원을 준비하는 그의 삶의 무게가 너무 무거운 걸까. 나에게도 그랬듯 임신과 중절수술은 그에게도 갑작스러웠을 것이다. 집을 나와 공부하면서 지내려고 했는데, 여자친구가 덜컥 임신이 되는 바람에 부모님에게는 어려워서 말도 못하고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가며 미역국을 끓이고 있는 지금 상황이 그도 힘들겠지. 나는 그런 그를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나는 예정되어 있던 퍼포먼스 작업과 행사를 모두 취소했다. 꼭 하고 싶던 작업이었지만 나갈 수도 없고, 못나가는 사정을 말할 수도 없다. ‘저, 낙태수술 해서 못가요. 당분간 집에서 쉬어야 한대요. 저도 정말 가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요.’ 세상에서 소외된 고통 같았다. 삶이 중단된 느낌이 들었다. 대학원 입학시험을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불안해하는 그는 나의 상실감을 공감할 여력이 없었다.

 

수술 후 몇 주 간은 성관계를 하면 안 되었지만, 일주일이 채 안되었을 때 그는 콘돔을 사용하지 않고 내게 삽입했다. 하지만 나는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어서인지 싫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관계 후 그가 먼저 잠이 들면, 알 수 없는 외로움에 몸을 떨었다. 어떤 날은 새벽에 집 밖으로 나가 운동장을 돌면서 울었다. 그는 울고 있는 나에게 다가와 가만히 서서 손바닥을 등에다 갖다 대주었다. 식은 표정으로 나를 보던 그의 얼굴. 그를 바라볼수록 외로워졌다.

 

어느 날은 아침에 일어나 갑자기 눈물이 쏟아져서 침대보에 얼굴을 대고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 그는 대답이 없다. 더 이상 내가 웅크린 곳으로 오지 않는다. 그는 한참 후 나에게 다가와 몇 번 토닥여준 후 밖으로 나갔다.

 

한동안 그는 부모님이 자신을 찾는다며 걱정했다. 나는 그에게 말했다. ‘솔직하게 부모님한테 말씀드리는 건 어때. 어머니라면 이해해주시지 않을까?’ 그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여성의 인권과 사회정의에 대해 말하고 또 애쓰는 분들이었다. 나와 언니, 언니의 남자친구와도 만나 고민을 나눈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상황을 두 분께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부모님을 존경하면서도 지나치게 어려워하는 그의 태도가 나는 이해가 되지 않고 답답했다.

 

그의 대학원 시험일 전날이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부모님이 시험 전날 그를 데리러 우리가 함께 사는 집 쪽으로 오셨다. 나는 혼자 남게 되었지만, 이참에 그가 부모님에게 우리 관계를 말씀드리고 편안히 함께 생활할 수 있길 바랐다. “시험 잘 봐. 연락 기다릴게.” 그는 부모님의 차를 타고 집으로 갔다.

 

밤새 연락을 기다렸지만 아침까지 연락이 없다. 다음날 저녁이 되어서야 연락이 닿았다. 열 번쯤 전화를 했을까, 그때야 전화를 받았다. 그의 목소리는 밝았다. ‘어제는 부모님 집에서 계속 시험 준비했어. 핸드폰이 가방에 있는데 꺼내기가 눈치 보여서 연락을 못했어.’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시험은 잘 봤어?’ ‘응. 그냥…’ ‘언제 올 거야?’ ‘아직 모르겠어. 아버지 좀 만나고.’ ‘부모님께는 말했어? 나 수술한 것도?’ ‘아직. 이제 얘기해보려고.’ ‘응. 연락 줘, 기다릴게.’ 답답한 마음으로 전화를 끊었다.

 

해가 지고, 뜨고, 또다시 질 때까지 연락이 오지 않았다. 견디기 힘든 시간이었다. 종일 침대에 누워 연락이 없는 핸드폰을 붙잡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그가 없는 집에서 혼자 있는 것이 견디기 힘들었다. 늦은 밤, 아픈 몸을 이끌고 밖으로 나왔다. 그러나 갈 곳이 없었다. 예전에 섹스를 빌미로 스폰서처럼 나를 도와줬던 남자에게 연락했다. 그에게 털어놨다. ‘나 중절수술 했어. 몸이 많이 아파. 돈이 필요해.’ 그때의 나는 그 남자에게 연락을 할 만큼 기댈 곳이 없었다. 다시 병원에 가기 위해서 돈이 필요했다.

 

다음날 오후 남자친구에게 메일이 왔다. “어머니에게 모두 말씀드렸어. 어머니가 쓰러지셔서 간호하느라고 연락을 못했어. 세상에서 내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 두 명이 힘들어해서 나도 힘들어. 핸드폰은 놓고 와서 없어. 몸을 두개로 찢어서 존재하고 싶지만, 그런 순간 나란 존재는 없게 될 테고, 적어도 일주일, 한 달, 아니면 얼마나 될지도 모르는 그 시간. 영원이 될 수도 있는 시간동안 세상에서 실종되고 싶어.”

 

“p.s. 아침에 장봤어. 건강 조심해. 제발 아프지 말고”

 

그는 이렇게 내게 이별을 고했다. 현관문 앞에 생수, 1분 미역국, 골뱅이통조림, 황도통조림, 햇반이 봉투에 담겨 쓰러져 있다. 나는 저것을 쳐다볼 수도, 만질 수도 없다.

 

▶ 촛불, 2016.   가해자 없는 폭력   ⓒ홍승희

 

# 홀로 방치된 시간, 낙태 증언 그리고 ‘검은 옷’ 시위

 

몸에서 열이 나고 하혈이 계속됐다. 일어날 기운도, 먹을 것도 없다. 그의 책 100여권이 보였다. 사회정의, 사회적 경제, 민주주의, 평화, 공존, 인권. 아름다운 책들이 내 고통과 상관없이 늘어서 있다. 그래도 공부하는 애니까 책이 필요할 텐데. 나는 엉금엉금 기어가 그의 책을 박스에 정리했다. 택배로 보내줄 생각이었다. 그의 책을 하나하나 뽑아서 박스에 차곡차곡 넣고 있었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는 거지? 이것은 사랑에 배신당한 한 여자의 비극이 아니다. 방치된 고통이다. 소외된 아픔, 가해자 없는 폭력이다. 섹스와 임신은 둘이 함께했는데 이 고통에서 왜 나는 혼자일까. 그는 낙태한 내가 부담 되어서 도망갔다. 그는 그렇게 해도 되니까 그렇게 한다. 수많은 여성들이 이렇게 방치되어왔을 것이다. 사회는 영아를 유기한 여성에게 손가락질하고, 자기 뱃속의 태아를 낙태시킨 여자를 ‘살인마’라 부른다. 남자들은 없다.

 

분노는 나를 일어나게 했다. 바닥에서 일어나 노트북을 열었다. 일방적인 이별통보를 하고 ‘두 여인’ 중 한 명으로 나를 생각한 그에게 편지를 썼다. ‘너랑 섹스 하는 거 진짜 별로였다. 나는 얼마 전 스폰서로 만났던 남자를 만났다. 부모님 그늘에서 벗어나 부디 어른이 되어라. 네가 한 행동이 얼마나 폭력적인건지 성찰하길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타자기를 꾹꾹 누르며 글을 써내려갔다. ‘나는 살아있다. 혼자가 아니다.’ 이곳은 나만의 독방이지만, 나만 갇혀있는 독방이 아니다. 심장이 전처럼 뛰고 피가 빠르게 몸을 회전했다. 지금 내 존재를 이 작은 모니터에 남기는 일밖에는, 내 고통에 공감해줄 세상이 없다. 글을 쓰는 동안에는 숨 쉴 수 있었다. 글을 쓰고 집 밖으로 나가 뚜벅뚜벅 산책하며 생각했다. 또 다른 나에게 편지를 쓰자. 낙태수술 경험을 증언하는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궁에서 줄줄 피가 흘러 나왔다. 생리가 내 자궁과 마음에 붙은 앙금을 씻겨주는 성수처럼 느껴졌다.

 

며칠 동안 자지도 먹지도 않고 A4 50페이지가 넘는 글을 썼다. 한나 아렌트의 말처럼 “모든 슬픔은, 그것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그것들에 관해 이야기할 수 있다면, 견뎌질 수 있다.”

 

괜찮아질 줄 알았던 몸에 다시 열이 올라왔다. 하혈이 또 시작됐다. 몸무게가 10kg이나 빠졌다. 이대로 몸을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땅히 고통을 분담해야할 그는 실종되어버렸다. 고민 끝에 그의 아버지에게 SNS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따금 내게 조언해주던 분이다. 그러나 메시지를 읽은 후 나는 차단됐다. 그의 어머니에게 문자를 보냈다. 알고계시겠지만 임신중절 후 적어도 한 달은 함께 고통을 분담하기로 한 OO이가 일방적으로 실종이 된 상황이라고, 함께 있다면 연락을 부탁드린다고.

 

핸드폰이 없다고 한 그는 전화를 받지 않는다. 사정을 처음부터 알고 있는 그의 친구에게 연락했다. 친구는 그에게 연락이 없었다고 말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친구에게 ‘혹시 승희에게 연락 오면 나랑 연락이 안 된다고 말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나와도 가까운 그의 후배에게 연락했다. 그녀는 어제 연락이 왔다며 문자로 주고 받은 내용을 보내줬다. “많은 일이 있었지ㅎㅎ”, “나 이제 시간 많아졌어ㅎㅎ 화욜 저녁에 보자.” 핸드폰이 없고, 영원히 실종되고 싶고, 자신의 존재를 찾지 못하겠다고 편지를 보낸 그의 메시지였다. 나의 임신중절수술은 “많은 일" 중 하나였다.

 

그의 어머니에게 연락이 왔다. 그가 집에 없지만, 연락이 되면 연락하라고 전해주시겠다고 했다. 얼마 안 있어 그에게 전화가 왔다. 그의 목소리는 아무렇지도 않아보였다. 그는 엄마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우리는 만나기로 했다. 그가 약속 장소에 나왔다. 다시 마주한 그의 표정은 당당했다. 나와 다르게, 떨지도 않았다. 나는 목이 메었다. 여성학을 공부한 너 같은 사람도 여자친구에게 이렇게 행동할 수 있는 권력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거냐고, 이건 결코 사소한 문제가 아니라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나는 내가 경험한 것을 기록하고 있다고 했다. 그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더니, 자신도 힘들었다고 했다. 나는 함께 살던 집이니 그의 짐을 정리하고 빨래, 냉장고 청소를 부탁했다. 그리고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보고 반성이 담긴 글을 써서 보내달라고 했다. 그것이 나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생각한다고. 그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돌아갔다.

 

다음날 그녀의 어머니가 인문학카페에 왔는데, 우연히 나와 마주쳤다. 그녀는 ‘승희야, 몸은 괜찮니? 우리 OO이도 대학원 시험도 잘 못 봤고…’ 하며 말끝을 흐렸다. 그녀는 "큰 일"을 할 청년들이 이런 일에 기운 빼면 안 된다고 다독였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고 말하는 페미니스트, 한 때 존경했던 그녀에게 나는 말했다. “선생님, 저는 이번에 낙태수술 후 혼자 방치된 시간 동안 여성이 어떻게 소외되는지 제 몸의 감각으로 깨달았어요. 저는 이게 저만의 문제가 아니고 모든 여성들이 겪는 문제라고 생각해요. 이건 절대 사소한 일이 아니에요.”

 

마침 카페에 들린 엄마와 그의 어머니가 마주쳤다. 그의 어머니는 우리 엄마에게 가정사에 대한 글을 봤다며, SNS 같은 곳에 사적인 이야기를 쓰는 건 보기 안 좋다고 말했다. 나와 언니가 아버지에게 폭력을 당하고 이혼한 엄마의 이야기를 쓴 것을, 엄마는 알고 있었다. 그런 글을 쓰는 우리를 격려해주는 엄마였지만, 그때 엄마는 위축된 것처럼 보였다. 그의 어머니와 헤어진 후 엄마는 울었다. “승희야, 그 애 어머니가 돈 필요하지 않냐고 내게 말하더라. 됐다고, 지금 돈이 문제냐고 말했어.” 나를 낳은 후에도 혼자 병원에 가서 세 번의 낙태수술을 하고 후유증을 견뎌야 했던 엄마. 나와 비슷한 고통을 통과했을 엄마의 무릎을 안았다.

 


그날 저녁, 카페에 모여 팀원들과 오랜만에 만났다. 그간 쌓인 눈물이 터졌고, 우리는 함께 울었다. 그러던 중에 그에게 연락이 왔다. 그는 마지막으로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카페로 들어온 그의 표정은 당당해보였다. ‘네가 보낸 편지에서 성노동했다는 거 읽었어. 너도 잘못 있는 거 아니야?’ 그가 나를 질책하며 말했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네가 실종되겠다고 일방적으로 통보했잖아. 고작 그 얘기 하려고 왔어? 미안하다는 사과도 아니고?’ 그는 자신이 나를 떠난 이유가 내가 성노동을 해서라며 순서를 바꾸어 말한다.

 

그가 한 모든 거짓말들이 떠올랐다. 그의 손에 쥐고 있는 핸드폰을 뺏어서 집어던지고, 어깨를 힘껏 밀었다. 함께 있던 카페 팀원들이 나를 말렸지만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니가 나한테 일방적으로 실종되겠다고 했잖아. 맞아, 안 맞아? 적어도 한 달 동안은 함께하기로 했는데. 잊었어? 가스 끊긴 집에서 니가 버리고 간 짐들 속에서 혼자 방치된 채 하혈하고, 진통하고… 너는 내 고통을 생각해봤어?” 그의 옷을 붙잡고 늘어질 때까지 놓지 않았다. 팀원들이 겨우 말려 상황은 끝났다. 그는 밖으로 나갔다.

 

나는 그와 살던 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정리하겠다고 약속했던 빨래, 냉장고 속 반찬과 짐들도 그대로 방치되어 있다. ‘아름답고 기품 있는 이별’. 언젠가 그의 글에서 본 단어다. 나에게는 아름답고 기품 있는 이별보다 안전한 이별이 절실했었다. 데이트 폭력을 당했던 연애관계를 나는 애틋한 사랑으로 기억할 수 없다. 권력이 있었던 그들은 나를 사랑했던 여자로 추억하겠지만 말이다. 그의 어머니는 마지막 전화통화에서 ‘너희가 서로 좋아하는데 좀 서로서로 잘 지내지 왜 이렇게 싸우냐, 안타깝다’고 했다. 공적인 문제로 발화하지 말고, 사적인 문제로 간직하라고 당부하고 싶었던 걸까.

 

며칠 후 언니의 남자친구가 SNS에 ‘여자가 임신중절수술을 한 몇 주 후 남자가 실종’된 정황을 얘기했다. 대상을 특정하지 않은 200자 이내 짧은 글이었다. 그는 언니의 남자친구에게 ‘형, 이런 식으로 나오면 승은누나가 돈을 받고 섹스를 한 경험을 폭로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한다. 내가 임신중절수술의 경험을 이야기하는 글을 쓰려고 하자, 눈치를 챘는지 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우리 얘기를 공유하면 내 피해상황과 성노동, 언니의 성노동 경험을 매스컴에 폭로할 거야. 성매매는 범죄야, 범죄. 너는 범죄자야.’ 페미니즘 독서 모임을 같이 하며 팀원들이 성노동의 경험에 대해 이야기했을 때, 함께 공감해주었던 그였다.

 

그리고 A4 한 장의 메일이 왔다. 내가 그에게 부탁했던, 반성의 글이라며 보낸 편지였다. ‘성노동을 하면서 동시에 나를 생각했다는 게 말이 돼? 나와 상의도 없이 책을 갖다버린 건 있을 수 없는 횡포야. 너는 가족 등 여럿이서 나를 두들겨 팼고, 내 핸폰을 박살내버렸다’라고 써 있었다. 어서 방을 비워야 했던 상황에서 나는 실종된 남자친구의 짐을 혼자 처리해야했었다. 또 내가 핸드폰을 던지고 그의 어깨를 밀친 건데, 우리 가족이 자신을 두들겨 팼다고 말하고 있다. 편지의 마지막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나는 쓰레기처럼 내동댕이쳐졌다. 너는 내가 얼마나 좋아하던 여성인데. 미안했고, 애도하는 맘으로 살게. 네가 하는 일도 응원할게. OO형 글 좀 즉각 내려줘.’

 

이런 상황이 답답해서 몇몇 페미니스트 학자를 찾아가 상담을 받았다. 어떤 분은 “남자친구랑 다시 만나고 싶어서 그래요?”라고 물었다. 나의 낙태 경험을 기록하는 행위가 남자친구를 돌아오게 하려는 여자의 발악으로 보인다는 건가, 바로 그런 시선과 페미니스트들이 싸우는 게 아닌가, 답답하고 화도 났다. 대부분은 낙태수술 경험을 공유하는 걸 감당할 수 있겠냐며 나를 걱정해주었다. 외국에서도 낙태수술이 합법화된 후에야 여성들이 자신의 경험을 털어놓았다며, 소설로 써서 공유하는 건 어떠냐고 했다.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고민했다. 소설로만 남길 수 있는 걸까, 여자의 경험은. 나는 감당할 수 있을까? 확실한 건, 이 고통을 말하지 않으면 내가 견딜 수 없다는 것이다. 낙태충, 살인마라고 낙인 찍히고 돌팔매질 당할 것쯤, 협박을 당하고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것 쯤 견딜 수 있다. 고통스러운 독방을 말할 수만 있다면….

 

다시는 한국에 돌아오지 못할 것을 각오하고 낙태수술을 증언하는 기록을 써서 공유했다. 그리고 인도로 떠났다.

 

생각보다 특별한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많은 여성들이 내 글을 읽고 메시지를 보내주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어요.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아요. 얼굴도 본 적 없고, 나는 당신을 잘 모르지만 끝까지 손 놓지 않을게요.” 보이지 않는 끈이 내내 나를 잡아주었다. 6개월 후 한국에서 ‘검은 옷’ 시위가 열렸다. “숨은 남자, 드러나는 여자”라는 구호가 보였다. 많은 여성들이 검은 옷을 입고, 낙태죄 폐지를 외치며 거리로 나왔다. 그녀들의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 지구여자, 2016.  나는 혼자가 아니다   ⓒ홍승희

 

임신중절수술은 쓰라린 아픔이었지만, 그것 자체가 비극은 아니었다. 그보다 나를 고통스럽게 한 건 여성학을 공부한 남자친구의 행동과 나를 입막음하려던 태도였다. 여성의 인권을 말하는 이들이 여성에게 ‘성노동을 했으니 네 책임’이라고, 세상에 알리겠다고 협박하다니 공포스럽고 우스꽝스러웠다. 데이트폭력, 가정폭력, 성추행 피해자들을 입막음하기 위해 가해자가 즐겨 쓰는 ‘문란한 여자’ 서사는 손쉽고 효과적인 방식이다. 정말 힘들었던 건, 그런 협박에 위축되는 나 자신을 보는 것이었다. 그들은 내가 성노동을 한 적이 있다고 아직 ‘매스컵에 폭로’해주지 않았다. 그게 뭐 큰일이라고.

 

아픈 시간을 지나면서, 나는 나를 옥죄어왔던 이성애 신화를 점점 더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남성중심 사회의 맨얼굴을 온 몸으로 대면했고, 두려움 없이 말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는 그들이(이 사회가) 원하는 것처럼 두렵거나 수치스럽지 않다. 부끄러워해야하는 건 내가 아니다. 여성을 억압해온 전형적인 ‘문란한 여자’ 서사의 무기로 나를 입막음하려던 사람들이 여성 인권을 말하며 존경받는다는 게 슬프다. 내가 활자 속 페미니즘, 엘리트 민주주의를 믿지 않는 이유다. 나는 내 몸이 겪은 일들만 말할 수 있다.

 

“고통에 귀를 기울인다. 고통은 지난한 삶의 증거이다. 다른 증거따윈 없다. 다른 증거 같은 건, 나는 믿지 않는다. 사람의 말이 얼마나 우리를 진실에서 멀어지게 했던가.” -알렉시예비치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페미니스트 저널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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