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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 잘하는 수컷으로 인정받고 싶니?

<홍승희의 치마 속 페미니즘> 남자 역할, 여자 역할의 허망함



열아홉 살 때였다. ‘남자다운 남자’가 이상형이었던 나는 세 살 연상의 남성스러운 학군단(학생군사교육단) 남자를 소개받았다. 그는 과묵하고, 듬직하고, 자상했다.

 

화이트데이였다. (찝찝한 첫 경험 이후 화이트데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모든 기념일이 싫다.) 어쨌든 그는 화이트데이를 기념하기 위하여 줄 것이 있다며 나를 집으로 유인했다. 알았다. 우리가 섹스하겠구나. 뭘 입고 갈까 고민하다 여성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

 

그가 집에서 크림소스 스파게티를 만들어줬다. 버섯을 깨끗하게 씻고 칼로 송송 자르는 그의 손이 아름다웠다. 깨끗하고 계획적이고 책임감 있고 남자다운 그가 요리하는 모습이 이색적이고 신선했다. 나는 화이트데이임에도 하트 모양 초콜릿을 만들어서 그에게 선물했다.

  

스파게티를 먹고 상에 나란히 앉은 우리는 키스를 하게 됐다. 내 원피스 치맛자락을 만지작거리던 그의 손이 다리 안으로 들어왔다. 그의 침대가 있는 불 꺼진 방으로 들어갔다. 입술, 목, 가슴을 애무하면서 손가락으로 나의 성기를 만졌다. 손가락이 더러웠을 텐데, 씻으라는 말도 못했다. 분위기를 깨는 게 아닐까 해서.


▶ 성기 삽입이 섹스인가?  ⓒ홍승희


몇 번의 피스톤 후, 그는 콘돔을 치우고 다정하게 말했다.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의 옆자리까지 다리를 벌리고 우두커니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까만 천장에 그가 열고 닫은 문틈에서 빛이 한줄기 그려졌다.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거지? 깜깜한 천장에 그려진 빛을 보면서 생각하는데, 화장실에서 샤워기 소리가 들린다. ‘씻고 오는구나. 그래, 깨끗한 사람이니까 씻어야겠지.’ 생각했다. 시간이 멈추고 영영 혼자인 느낌이 들었다. 10분 쯤 지났을까, 드디어 그가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에겐 산뜻한 비누향기가 났지만, 내 몸은 끈적했다. 내 몸은 찝찝한데, 산뜻해진 그가 이질감이 들었다. 섹스할 땐, 아니 정확하게는 그가 삽입을 하고 사정을 할 때까지는 몸을 포갠 하나였는데, 사정이 끝난 후 우리는 다시 각자의 존재로 뚝 떨어졌다. 이질감은 외로움이 되었다. 입이 닫혔다.

 

멀뚱히 그를 바라보는 내게 팔베개를 해주고 머리카락을 두어 번 만져주더니 그가 입을 열었다.

“좋았어?”

 

친구들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남자들은 ‘오늘 정말 좋았어. 최고였어!’라고 꼭 말해줘야 진짜 좋아한다고. 그래야 다음 섹스 때도 ‘기죽지’ 않고 열심히 할 수 있다고. 진심으로 좋기는커녕 더 외로워지기만 했지만, 나는 여자 역할을 훌륭히 연기했다.

“응, 너무너무 좋았어요. 정말 최고야.”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이 예상하는 대로 나는 정확한 명예남자였다. 명자!

 

‘이벤트 사랑’밖에 하지 못하는 관계

 

▶ 너와 나의 온전한 시간  ⓒ홍승희 作


안 그래도 긴장의 연속인 이 세상에서, 섹스할 때조차 서로를 소외시키고 여자와 남자를 열심히 연기한다. 알몸으로 교감하는 이 행위에서도 내가 나의 몸을 소외시킨다는 건 얼마나 슬프고 허망한 일인가. 왜 나는 ‘손가락 씻고 와줘요’, ‘손가락으로 애무하는 건 안 좋아해요’ 라고 말하지 못했을까. ‘섹스가 끝난 후에 그렇게 후다닥 혼자 일어나버리는 건 상대방을 배려하지 못하는 행동이에요’, ‘섹스는 삽입만 있는 게 아니에요. 함께 몸의 진동을 음미하는 거라고요’ 라고 왜 말하지 못했을까. 나는 여자 역할을 연기하느라 바빴으니까.


그에게 섹스는 자신의 성기가 삽입되는 것, 나에게 섹스란 그의 성기가 내 성기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전희-삽입섹스-후희’가 섹스인가? 애무는 삽입을 위한 도구이자 수단인가? ‘머리 어깨 무릎 팔 무릎 팔’ 노래처럼 ‘입술, 목, 가슴, 성기’ 애무도 비슷하다. 남성들이 공동으로 배우는 섹스 교재가 있는 걸까? 야동에서 삽입 장면만 봐서 그럴까? 우리는 오늘을 수단화하고, 서로를 에너지 드링크처럼 수단화하듯 애무도 수단화해버린다. 애무는 삽입을 위한 수단이고, 삽입은 섹스이고, 사정은 섹스의 완성이 된다. 사정 후 섹스가 훌륭히 끝났다고 생각한 그는 화장실로 달려가 후다닥 씻고 나왔다. 나는 섹스가 끝난 게 아닌데….

 

그 말고도 참 많은 한국남자들은 섹스 후 물었다. “어땠어? 좋았어?” “응, 좋았어. 오늘은 100점 만점 중에 애무는 구석구석 해주어서 70, 삽입은 아주 꽉 찼기 때문에 90, 시간은 길지 않았기 때문에 20, 강도는 조절을 적절히 했기 때문에 50, 오르가즘은 엄청나게 느꼈기 때문에 100점이었어.” 이렇게 채점해주길 바라는 건가? 남성들은 자신의 수컷성을 인정받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런 모습이 애잔해져서 성욕은커녕 인간에 대한 연민이 들어 부둥켜안고 울고 싶어진다.

 

강약조절(강약약강), 적어도 한 시간 동안 피스톤 운동을 하는 것. 여자를 ‘느끼게’ 해주었는가. 그런 것들이 수컷 능력의 객관 지표가 된다. 정말 그녀를 위한다기보다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고 싶은 거다. 섹스머신이 된 남자는 스스로의 수컷성에 도취되어 인정받기 바랄 뿐, 여성이기 전에 인간으로서 타자와 교감하는 기본자세는 없다. 명예남자인 나도 비슷했다. 그와 진솔하게 교감할 용기가 없었다. 나의 여성성에 상처가 날까봐.

 

우리의 섹스는 하나의 이벤트로 끝났다. 엄청난 폭죽(남자의 사정)과 함께 열렬히 불타버리고 다시 차가운 일상으로 돌아가 버리는 화이트데이 기념일처럼. 이후에도 우린 차 마시고, 영화 보고, 밥 먹고, 섹스하는 데이트코스를 밟다가 여느 청춘로맨스 영화가 그렇듯 애틋하게 헤어졌다. 이벤트 사랑, 이벤트 섹스, 이벤트 관계였다.

 

그의 과묵함은 자신의 감정을 이야기하지 못하는 말하기 능력의 부족이었음을, 그의 듬직함은 가부장이 될 수컷으로서의 정체성이었음을 이제 안다. 나는 이제 남자다운 남자가 싫다. 내가 여자 역할에서 아무런 의미를 못 느끼는 것처럼, 그들의 남자 역할에서 매력은커녕 연민이 차오른다. 남자들이 꼭, 페미니즘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다. 제.대.로.   페미니스트들이 만드는 저널리즘, 일다 Feminist Journal IL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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